OLD BUT NEW /화평동 - 냉면, 함세덕…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동네
OLD BUT NEW /화평동 - 냉면, 함세덕…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동네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0-07-25 21:55:40
냉면, 함세덕…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동네
도시를 가로지르는 철도로 인해 중심지에서 조금 비켜서있던 화평동. 어느 날 갑자기 지금까지 요리책 어느 페이지에도 없던,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냉면의 발생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냉면 삶는 냄새를 뒤로 하고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인천이 낳은 거인들의 발자취를 쫓을 수 있다. 비가 오면 인천 곳곳을 거쳐 온 빗물이 이곳에 모였다. 이 물은 갯골을 따라 바다로 나갔다. 화평동에서 태어난 이들은 빗물처럼 거친 바다로 나가 세상에 그 이름을 남겼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화평철교를 사이에 두고 중구와 동구가 갈린다. 동인천 지역이 한창 융성할 때는 화평철교가 도심의 화려함과 거주지의 소박함을 구분하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동구에 속한 화평동의 뿌리는 평동(平洞)이다. 동네가 평평해서 얻은 이름인데 일부 지역은 평평하기보다는 지대가 낮다. 낮다보니 비가 내리면 물이 모이곤 했다. 이 물은 갯골을 만들었다.
화평치안센터 앞에는 화강암으로 된 교각 두 개가 남아 있다. ‘송현교’라고 새겨진 이 교각은 마치 뽑다만 덧니처럼 박혀있다. 예전에 다리가 있었던 흔적인데 남은 교각 두 개를 기준 삼아 발걸음으로 어림잡아 측량해보면 폭 3미터, 길이 15미터 정도의 크기이다. 이 다리 밑으로 화평동 일대로 모인 물과 바다에서 밀려들어 온 짠물이 만나 흘렀다. 수문통이라 불린 이곳부터 옛 인천극장이 있는 언덕배기까지가 화평동이다.
냉면의 이단아, 세숫대야 냉면
화평동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건 아무래도 냉면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인 함흥냉면이나 평양냉면 측에서 보면 ‘이단아’라고 할 수 있는 화평동 냉면은 일단 지름 30센티미터에 가까운 세숫대야처럼 생긴 냉면그릇때문에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맛에도 뒤지지 않는다. 고추장 양념과 오이, 무, 열무, 깨 등 채소 고명의 조화는 특유의 얼큰하고 시원한 맛을 자아낸다.
같은 종류의 음식점이 한데 모이면 슬슬 ‘원조’ 다툼이 시작된다. 화평동 냉면도 예외는 아니다. 원조에 대한 규명은 결국 그 골목에 대한 역사를 더듬어 보게 한다. 6·25 동란 이후 화평철교를 기점으로 경인철로 변을 따라 무허가 집과 가게들이 들어섰다. 1980년대 초 인근 화수시장에서 3, 4평 정도의 소규모 냉면집을 운영했던 상인들이 동인천역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에 하나 둘 개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냉면골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
현재 냉면 골목 중간쯤에 자리잡은 아저씨 냉면집의 간판은 원조 밝히기의 단초로 삼을 만 하다. ‘길 건너편 허름한 집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집으로 거짓이면 다른 집에서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간판의 반 이상을 할애해 적어 놨다. 이 간판이 아무 문제없이 계속 걸려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냉면집들도 순순히 인정하는 모양이다.
‘원조’로 추정되는 아저씨집에서 냉면을 시켜놓고 취재에 응하기를 요청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는 ‘아저씨’. 시간이 좀 지나자 식탁을 맴돌면서 하나둘씩 이야기 보따리를 푼다.
아저씨가 냉면을 말기 시작한 것은 현재 서른두 살 된 아들이 태어나기 한두 해 전, 그러니까 1976년경이다. 지금은 경인선 복복선 공사로 다 헐리고 없어졌지만 건너편에는 양화점과 양복점 등 가게들이 즐비했다. 아저씨는 솜틀집 옆 작은 가게에서 탁자 한 개를 놓고 냉면집을 시작했다. 당시 인천 냉면집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경인면옥의 냉면 값이 4천500원 할 때 이 집은 500원짜리 냉면을 팔았다. 지금은 4천원. 아직도 당시 경인면옥의 냉면값을 넘지 못하고 있다.
가격에 비해 양은 풍성했다. 엄청난 양을 담기 위해서 두터운 스텐레스 재질의 양푼을 개당 9천900원에 금형 떠서 특별 주문 제작했다. 만들고 보니 세숫대야 모양의 그릇이 되었다. ‘지금의 이 그릇이 그때 만든 것이냐’고 했더니 ‘30년 넘게 닦았더니 두께가 거의 절반으로 닳았지만 그 그릇을 아직도 쓴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80년대 초 만해도 인근 대성목재, 동일방직, 인천제철 그리고 인천항 부두 근로자들이 작업복을 입은 채로 허름한 냉면집을 찾았다. 한창 때는 새벽 6시 동틀 무렵에 가게 앞에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원한 냉면으로 해장도 하고 배도 채우기 위해서다.
주변에 냉면집이 늘기 시작한 이유 중의 하나는, 주변 양화점과 양복점의 장사가 잘 되지 않자 냉면집을 드나들던 사장들이 아예 간판을 냉면집으로 갈아 달면서부터다. 전성기 때는 골목 양쪽으로 23개나 있었던 냉면집이 이제는 9곳만 남았다. 이 마저도 곧 불어닥칠 재개발 바람 속에 자리를 지키며 명맥을 이어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대신에 이곳을 고향으로 둔 화평냉면이 인천 시내는 물론 서울 등 전국으로 ‘분신’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에 그나마 위안 삼아야 할 것 같다.
북으로 간 작가 함세덕
냉면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아쉬운 동네다. 화평동 골목에는 우리나라 연극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의 태가 묻혀 있다. 오래된 기와집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 이 동네를 거닐다보면 먼저 ‘함세덕’이란 이름 석 자와 만나게 된다. 극작가 함세덕(1915∼1950)은 1915년 화평동 455번지에서 태어났다. 1936년「조선문학」에 희곡 ‘산허구리’를 발표하면서 연극계에 얼굴을 내민 뒤 39년 1막짜리 단막극 ‘동승’으로 일약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무의도 기행’ ‘도념(道念)’ ‘해연’ 등 20여 편의 역작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혼돈기에 나온 그의 작품은 가난과 자유가 주 테마였고 토속적이고 때론 치열한 서정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시대를 초월한다. 그러나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40여 년간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한 ‘함구 대상’ 작가였다.
그의 생가가 궁금했다. 번지 주소와 생가를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 갖고 탐문한 끝에 마침내 생가를 찾아냈다. 반가움도 잠시, 소주방으로 변해 버린 집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옥상에 올라가서 뒷집을 내려다 볼 수 있을까요” “뒷집에 뭐 볼 게 있다고…”. 뒷집의 ‘정체’를 몰라 마득치 않은 눈치를 보이는 아줌마의 시선을 뒤로 하고 이웃집 옥상에 올라가서 생가를 내려다보았다. 낡았지만 조부 함선지, 부친 함근욱 2대가 누린 68평의 한옥 기와집의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다.
옥상에서 보니 기다란 경인선 철도길이 한눈에 들어 왔다. 그는 이른 새벽 화평철교를 털컹거리며 지나는 철마 소리에 잠을 깨고 수문통에서 묻어나온 바다 특유의 내음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화평동의 바람과 냄새는 그의 작품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골목, 화평동 37번지에서는 우리나라 미술계를 대표하는 또다른 ‘거목’과 마주친다. 1919년 이곳에서 태어난 석남 이경성 선생(2009년 작고)은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이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무엇보다 인천시립박물관 시절 6·25 전쟁 난리통 속에서도 귀중한 문화재를 몸으로 지켜냈다. 그는 우리나라 미술비평 1세대로 미술행정가와 평론가, 화가로 일생을 살았으며, <한국미술사(1962)><한국근대미술연구(1975)><한국근대회화(1980)> 등의 저술을 남겼다.
수채화 그리는 할머니
냉면 골목 중간쯤, 주위 분위기와 동떨어진 4층짜리 건물이 있다. 입구에는 ‘평안수채화의 집’이란 나무 간판이 걸려 있다. 수채화가 박정희(88) 할머니가 거주하며 이웃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집이다. 박 할머니는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만든 송암 박두성 선생의 딸이다. 송암 선생과 율목동에 살다가 결혼해서 1949년부터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 목조 건물이었던 것을 의사 남편 유영호 박사(작고)가 콘크리트 건물로 짓고 ‘평안의원’이란 간판을 걸었다.
“당시에는 이 건물이 제일 높았겠네요” “지금도 제일 큰데… 내가 이 동네 터줏대감이여.”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제2공립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근무했고 이후 30년 동안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서른 살 때부터 그림을 가르치다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그가 키워 낸 제자는 200여 명이 된다. 붕어빵 파는 아주머니, 공장 노동자, 주부, 학생 등 지위의 고하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이 안에선 모두 평안한 예술가였다.
박 할머니는 아직도 현역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일년에 50점 정도를 그린다. 전시회를 통해 마련한 그림값은 시각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기꺼이 내놓는다. 수채화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그가 정작 주위와 나누고 싶었던 건 그림이 아니라 사랑인 듯 했다.
변두리의 중심가 인천극장
지금은 동인천역이 북쪽으로도 출입구가 나있지만 예전에는 인현동 쪽으로만 나있었다. 중심가와 가깝지만 사람들의 동선(動線)과 심리적 거리감으로 인해 화평동은 변두리로 치부되었다. 이런 화평동에도 한때 인천극장이란 영화관이 있었다. 동인천 주변의 개봉영화관과는 달리 서울에서 이미 개봉이 끝나 스크린에서 내려버린 영화 두 편씩을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화수동, 만석동, 전동의 꼭지점 역할을 했던 극장 주변은 바로 앞에 화수시장까지 자리잡고 있어서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건달들도 등장했다. 가끔 인천극장 앞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지역 신문을 장식하곤 했다. 지금은 마트, 헬스센터 등 복합상가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그 극장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극장에서 냉면골목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황인의원이 나온다. 병원간판에는 좀처럼 쓰지 않는 ‘Since 1958’ 이란 표식이 있다. 병원 개원이 ‘58년 개띠’로 인천에서는 연조 있는 병원임을 은근히 내세운 것이다. 지금은 동네병원 격이지만 굳굳이 지역을 고수하며 대를 이어 산재를 당한 주변 노동자와 주민들에게 의술을 펼치고 있다.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