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동- 시간의 닻을 내린 무네미
화수동- 시간의 닻을 내린 무네미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0-08-09 14:50:13
시간의 닻을 내린 무네미
사람만 표정이 있는 게 아니다. 도시도 표정이 있다. 동구 화수동은 느린 것을 부끄럽고 쓸모없는 것으로 조롱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아날로그식 표정을 짓고 있는 동네다. 바닷물이 넘어 들어 왔다고 해서 무네미라고 불렸던 이곳은 한때 바다에서 건져 올린 온갖 생물로 인천에 젖을 물렸다. 인천의 미래 조감도와 청사진에서도 비껴나 있는 덕분에 어느 때 가도 냄새와 소리로 인천인의 몸속에 체득된 강렬한 추억을 이끌어내는 몇 남지 않은 곳이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구라 같은 이야기, 민들레국수집
요즘 화수동이 뜨고 있다. 국수집 하나가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화수동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민들레 국수집’은 국수 맛 때문에 뜬 집이 아니다. 그곳은 주리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하늘창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천상의 식탁을 차려낸다.
2003년 만우절(4월1일)에 문을 연 ‘민들레 국수집’은 거짓말 같은 공간이다. 거짓말 같이 문을 열어, 공갈처럼 많은 사랑이 모여들어, 구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믿기지 않게 7년을 버텨오고 있다. 이곳 주인장은 서영남 씨다. 그는 25년 동안 가톨릭 수사(修士)로 지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기 위해 수사복을 벗어 던졌다.
“이곳에서는 줄을 서지 않습니다. 무조건 가장 많이 굶은 사람이 먼저 먹습니다.” 노숙인이나 배고픈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줄서기 경쟁에서 밀려난 꼴찌들이다. 이곳에서나마 줄서기와 눈칫밥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서 씨의 깊은 배려가 깔려 있다.
식탁 하나 3평짜리로 시작한 가게는 24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을 만큼 18평으로 넓어졌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찾아오는 손님은 400명에서 500명 정도. 하루 짓는 쌀만 20㎏짜리 예닐곱 포대를 풀어야 한다. 그날 이집의 식단은 계란말이, 마늘장아찌, 열무김치, 어묵조림, 미역국 등이고 후식은 수박화채다.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민들레 국수집’에는 ‘국수’가 없다. 초기 식단은 국수였지만, 밀가루로는 ‘손님’들의 허기를 달랠 수 없어 메뉴를 변경했다.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배고프지 않는 그날, 간식으로 국수를 내놓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며 가게 이름도 바꾸지 않고 있다. 이곳은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집배원, 회사원, 주부 등 뜻을 함께하는 순수 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을 한다. 식당안의 식자재 창고에는 전국 각지의 발송지가 적힌 쌀, 고추장, 채소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중년의 남자 한 명이 검은 봉투 하나를 식탁에 슬쩍 놓고 간다.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겨져 있다. “저분, 기장님이세요” “기장님이요?” “예, 대한항공 조종사예요” 서울 등촌동에 사는 윤종원 씨는 비행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곳에 와서 봉사를 한다. 5년 동안 계란말이를 만들어 이제는 계란말이의 달인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벽에는 8월 7일부터 11일까지의 여름휴가가 공지돼 있다. “형무소만큼 냉기 돌고 썰렁한 데가 어디 있습니까? 또 한바퀴 돌고 와야죠” 그는 부인 베로니카와 함께 사형수, 무기수 등 장기 수형자를 만나기 위해 진주, 순천 등을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15년 동안 해 온 일이다.
국수집에서 150m쯤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민들레 홀씨가 떨어졌다. 아이들을 위한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이 최근에 문을 열었다. 형편이 어려운 동네 아이들은 물론 맞벌이 등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어울려 쉬며 밥과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36㎡의 1층에는 식당이, 비슷한 넓이의 3층에는 공부방이 자리 잡고 있다.
민들레 씨앗은 바람에 날려 멀리 멀리 날아가고 있다. 노숙인 공동체 ‘민들레의 집’과 ‘민들레 희망지원센터’의 문도 열었다. 화수동에서 날아 간 홀씨 하나가 인천을 점점 민들레 밭으로 만드는 작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183번지에 떨어진 민주화 밀알 한톨
우리는 이제 동구 화수동 ‘183번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곳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태동한 곳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한국의 산업화 과정 속에 노동 운동과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의 불씨를 키워온 곳이다. 선교회는 1961년 4월 동일방직과 한국기계공업에서 산업전도를 시작하면서 탄생하였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선교회 측은 ‘인천산선’이라고 부름)는 산업사회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한 화해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활동해 왔다. 회원들은 ‘위장 취업’을 통해 직접 현장에 들어가 이른바 ‘노동자 의식화’ 사업을 펼쳤다. 인천산선은 김근태 등 유력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화수동 주변에는 동일방직, 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 이천전기, 한국유리 등 큰 공장들이 많이 있었다. 한때 도시산업선교회는 ‘도산’이라 불리었고 ‘도시산업선교회가 기업에 침투하면 그 기업은 도산한다’며 산선을 ‘빨갱이’ ‘공산당’이라고 몰아세우며 끊임없는 감시와 무차별 탄압을 펼쳤다.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화수동으로 출근해 하루 종일 산선이 있던 골목에 진을 치곤했다.
산선의 노동자교회 자리는 이제 ‘일꾼교회’와 ‘사회복지선교회’로 바뀌었다. 교회 현관 입구에는 70년대까지 15평짜리 초가지붕 건물이었던 인천산선 회관의 흑백사진과 선교회를 돕던 조지 오글 목사가 미국으로 추방되는 모습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현재 이 교회에는 집회 사진과 보고문서 등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자료가 30여 박스 가량 보관돼 있고 동일방직 여공들이 피신해 있던 지하방 등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당시에는 교회 밖 노동의 현장, 가난의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일꾼교회 담임 김도진 목사는 이제 동구푸드마켓 운영과 장애인 및 저소득층 자녀교육 등 사회복지선교회로서의 소명을 이어가고 있다.
이양선을 노려보던 화도진
꽝! 꽝! 꽈앙 - 고종 19년(1882) 4월 6일(양력 5월 22일), 천지를 뒤흔드는 대포소리가 인천 앞바다에서 들려왔다. 바다에 떠 있던 미국 스와타라함에서 21발의 축포를 쏘아댔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조금 떨어져 있던 청국 군함에서도 15발의 대포를 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된 것을 알리는 대포였다. 조약체결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도진 언덕에서 이뤄졌다.
외국함대와 상선 등 이양선(異樣船)이 인천 앞바다에 자주 출몰하자 조선정부는 고종 16년(1879)에 강화도에서 캐 온 돌을 이용해 화도진(花島鎭)을 구축했다. 화도진은 묘도(괭이부리)북변포대, 호구(논현동)포대 등 인천 해안선을 빙 둘러싼 포대들을 예하부대로 둔 야전사령부 같은 역할을 했다. 1894년 10월 말경에 폐쇄됐고 해방 전에 인근지역이 매립되면서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가 지난 1988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화도진도’를 토대로 복원됐다. 복원 공사를 할 당시 진지 터에는 피난민과 도시 빈민의 허름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100여 년 전 이곳은 소나무 숲으로 뒤덮였고 바닷물이 진지 바로 밑까지 밀려들어왔으며 제물포(현 도심지)로 통하는 한줄기 오솔길이 화도고개를 넘어갔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진 정문 옆에 약 20여 채의 민가가 있으며 간혹 말을 탄 병사가 총 혹은 창을 비켜들고 왕래했고 어쩌다 가마를 탄 양반들이 드나들곤 했다고 한다.
과 조약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된 것이다. 그런데 조약 체결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 중구 항동 옛 영국영사관 자리인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조약이 체결됐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시는 이곳에도 표석을 세웠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화도진 언덕에 올라서면 영종도와 작약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고층 아파트와 공장들로 시야가 가려지지만 사이로 어렴풋이 바다가 보인다. 오늘도 화도진은 100년 질곡의 역사를 품은 채 앞바다에 떠있는 ‘이양선’들을 그렇게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화도진 병사들도 길어다 먹은 쌍우물
화도진 뒤쪽 동네로 내려오면 우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우물이야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 모든 마을의 식수를 역할을 했기 때문에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이곳에는 쌍우물이 있었다.
인천 향토지에 조차 이 우물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고 다만 화도진도에 우물정(井)자(字)가 표기된 정도다. 화수동의 옛 이름인 무네미에 있는 쌍우물은 맑고 시원해서 화도진 병사들도 길어다 마셨을 것이라는 얘기가 지역에 간혹 전해져 왔다. 두 개의 우물 중 하나는 건너편에 민가가 생기면서 없어져 버려 지금은 하나만 남은 외로운 신세가 됐다.
“물맛은 좀 짰어. 그래도 물이 잘 나와서 만석동, 송현동에서도 물지게 지고 와서 하루종일 줄 서서 퍼갔지.” 19세 때 이 동네로 시집와서 50년 넘게 이곳에 살고 있는 한 할머니가 우물의 활약상을 전한다. 지금은 우물의 입구가 굳게 닫혀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우물통에 수도꼭지를 달아 놨다. 가끔 그 꼭지를 통해 물을 빼버릴 정도로 우물은 여전히 원기왕성하다. 매년 10월이 되면 살아있는 이 우물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쌍우물축제가 열린다.
더 이상 비린내 나지 않는 부두
화수동을 화수동답게 했던 것은 화수부두다. 화수부두는 1960, 70년대 연평도 조기잡이 배를 비롯해 옹진, 강화, 충청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가득 실은 배들이 드나들던 우리나라 3대 어항이었다. 선박의 주소지는 덕적도, 연평도 등 섬이었지만 생선을 판매하는 곳은 화수부두였고 선주들은 인근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1960년대에 벌써 자가용을 부릴 정도로 자산가였다.
화수부두에는 수협공판장, 얼음공장, 어구상점, 식당 등이 즐비했고 새우젓 배들이 입항하는 날이면 큰길까지 비릿한 난장이 서곤 했다. 여름날 아이들은 얼음공장에서 선박으로 나르는 공중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얼음조각을 주워 먹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이제 화수부두는 도시의 오지(奧地)가 되었다. 문명도, 유행도, 세인의 관심도 모두 비껴 간 안쓰러운 부두가 되었다. 옛날의 화려한 모습은 오간데 없고 고달픈 삶의 흔적만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는 부두로 가는 입구조차 쉽게 찾을 수 없다. 두산인프라코아 뒤편에 겨우 매달려 있는 그곳은 공장과 북항 개발로 포구로서의 여백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선착장에는 낡고 녹슨 어선들이 갯벌에 반쯤 파묻혀 있고 부둣가에는 빛바랜 어망들과 어구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다. 언제 쓰일지 모를 녹슨 닻을 쌓아놓은 닻공장도 기계소리가 멈춰져 있다. 출항도 가뭄에 콩 나듯 하는지 경찰마크 뜯긴 선박출입통제소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그나마 부두 안쪽에는 ‘서울식당’이라는 횟집이 50년 넘게 망부석처럼 화수부두를 끝까지 지키고 있다. 이 집의 복요리는 아직도 인천에 부임해 오는 기관장들이 꼭 들러 맛볼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어 화수부두의 존재감을 가끔 드러낸다.
공장의 거대한 옹벽 뒤로 숨어 버린 어촌 마을에는 부두와 함께 늙어간 사람들이 힘겹게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의 인기척이 그나마 부두를 지키고 있는 듯 했다. “다 옛날 얘기여. 이젠 비린내 맡기도 힘들어. 그냥 이렇게 가는 거지 뭐.” 아직도 먹을 것이 있는지 착각하고 길을 잃은 갈매기를 벗 삼아 바람을 쐬고 있는 노인은 바튼 기침과 함께 느릿한 한마디 내뱉는다.
그림자 길어진 시간, 할머니 젓가슴처럼 쪼그라든 부두를 빠져 나오는데 어디선가 추억이 스며있는 비린내와 뱃고동이 바람에 실려 왔다.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