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정동-희망의 두레박질은 계속된다
십정동-희망의 두레박질은 계속된다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0-10-14 14:39:43
그곳은 게토(ghetto)다.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했던 게토처럼 그곳은 도시의 유민들을 가둬놓고 있다. 비록 ‘오래된 미래’지만 그들은 한시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저버린 적은 없다. 십정동에는 한때 한센병자들이 돼지를 기르고 닭을 치며 고단한 삶을 영위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들은 죽어서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우는 파랑새가 되었으리라.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산동네와 달동네
요즘은 십정동보다 ‘열우물’이란 이름이 더 가깝게 온다. 동네 이름 풀이를 하다보면 맥이 좀 풀릴 때가 있다. 십정동도 예외는 아니다. 흔히 10개의 우물이 있어 십정동(十井洞)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설과 추운 겨울에도 따뜻해서 얼지 않는 ‘열(熱)이 나는 우물’이 있어서 ‘열우물’이란 설 그리고 산줄기가 십자형으로 교차한 형국(十丁) 인데 이게 ‘十井’으로 잘못 쓰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열우물은 인천에서 부평에 이르는 첫 마을이었다. 예전 인천 시내에서 부평을 거쳐 김포나 강화 길로 접어들려면 이곳을 거쳐야 했다. 배 밭과 염전이 있던 한적한 이 마을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이르서다. 동구 만석동과 주안 그리고 멀리 서울에서 철거민이 그곳으로 떼밀려 왔다.
아랫동네부터 무허가 집짓기가 시작되었다. 앞집의 어깨를 집고 다른 집이 올라섰다. 집을 나누는 담은 없다. 담을 칠 공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담이 곧 집벽이 된다. 산 모양을 따라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오를 수 있는 곳 까지 집들이 들어섰다. 그렇게 산동네가 되었다.
동네를 벗어나는 길도 따로 없다. 다니다 보니 그게 골목이요 길이 되었다. 갯골이 가깝게 있던 아랫동네는 비만 오면 바다가 되었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 살 수 없는’ 동네가 되었다. 집값이 싸다 보니 인근의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날품을 파는 도시 빈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달동네가 되었다.
초상 치르지 않는 장의사
몇 년 전 십정동에서는 수많은 집들을 긁어내고 한쪽에 거대한 아파트를 세웠다. 그 아파트들은 마치 겁먹고 움츠린 꼬마를 무릎 꿇게 하고 윽박지르는 ‘어깨’의 모습이다. 이제 이런 모습도 머지않은 듯하다. 본격적인 재개발 바람으로 이 동네에는 곧 덩치 큰 어깨들만 꽉 찰 전망이다.
언뜻 보아도 한때 열우물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 같은 곳에 섰다. 이 길은 산동네에서 아랫동네로 통하는 길이다. 길 양쪽으로 허름한 2층 상가가 뻗어있다. 대부분 문이 닫혀있지만 비디오 가게, 양장점 등이 여전히 빛바랜 간판을 달고 있다. 고추를 빻기 위해 할머니 두 분이 방앗간 앞 평상에 앉아 있다.
“할머니, 여기가 예전에 시장이었나 봐요. 시장 이름이 뭐예요” “여기가 (구)시장이여. 옛날엔 저녁때만 되면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던 곳이야. 약국도 있었고 정육점, 술집도 있었지” 인근의 주안 수출 5, 6 공단 덕분에 동네 경기가 좋았던 시절에 상권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이제는 신시장에 상권이 빼앗기고 퇴락한 시장이 되었다.
동네 어귀에 장의사 간판이 보였다. 동네마다 장의사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태어나고 죽는 곳은 집이 아니라 병원이다. 동네에 장의사가 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안에 들어가 보니 초상집 문을 밝히는 등불과 병풍, 천막 등 장례식에 필요한 비품들이 보였다.
“늙어 죽을 사람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죽어서 이제 이 동네는 초상도 나지 않아. 그나마 이제는 죽으면 병원 영안실로 다 가잖아. 여긴 그냥 간판 내리기 뭐해서 놔 둔거야.” 이 장의사의 실제 사장은 시내 모 병원 영안실 운영을 하고 있단다. 옆집에 사는 김금옥(82) 할머니가 대신 집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는 남편과 아들을 차례대로 이 장의사에서 초상을 치렀다.
열우물, 오래된 미래를 꿈꾸다
열우물에는 계단이 많다. 마치 빗질을 한 것처럼 모두 아래를 향해 있다. 비탈진 골목길에는 시멘트가 부어져 계단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가면서 시멘트는 쪼개지고 울퉁불퉁한 흉물이 되었다. 몇년 전부터 이 동네에 젊은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열우물길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그들은 붓을 들고 계단과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붓만 든 것이 아니다. 2002년도에 시작된 이 일에는 교육과 문화도 뒤따랐다. 그들은 맞벌이나 결손 상태로 자칫 방치되기 쉬운 아이들의 형과 누나가 되어 주고 산동네 마을의 옛 마을공동체문화를 다시금 되살리고 있다. 올해는 이 프로젝트에 ‘동네 수리점’이 하나 더 추가됐다. 성한 곳이 별로 없는 계단이나 골목길 곳곳에 그들의 손길이 미치면서 열우물은 ‘오래된 미래’를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벽화 그림 한 점으로 잃었던 희망이 되살아날까마는 그곳에 한 사람이라도 사는 날까지 그들은 주민과 함께 열우물에서 희망의 두레박질을 계속할 것이다.
아, 천형의 땅이여
열우물에는 또 다른 눈물이 배어있다. 천형(天刑)이라 불리는 한센병을 앓던 사람들이 십정동 한켠에서 세상의 천대 속에 모진 삶을 이어갔다. 동암역과 백운역 사이 경인철도 변에 있는 신동아아파트 터는 당시 나환자들이 개간해서 일군 십정농장이었다. 아직도 철도 건너편에는 영세 공장으로 그 잔재가 남아있다.
부평지역에 한센병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 성계원이란 집단 나환자촌이 형성되면서부터다. 성계원은 지금의 가족공원(부평공동묘지) 위쪽 산속에 자리잡은 일종의 국립 요양원이었다. 이곳에는 1947년에 ‘동인요양소’라는 작은 나환자 단체가 있었는데 서울, 수원, 강원도 등에서 한센병자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1961년에 성계원은 양성과 음성을 구분해 양성환자는 성계원에 그대로 남게 하고 음성(치유)환자는 십정동과 청천동 등지로 이주시킨다. 가톨릭을 믿는 환자는 십정농장으로, 개신교 환자는 청천농장으로 분리된다. 그들은 사회에 냉대 속에서도 부지런히 양돈과 양계 사업에 종사하며 사회에 완전히 정착했다. 한때 인천 대부분의 계란은 그들 손에서 공급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 속에 한하운(韓何雲)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문둥병 시인’으로 알려져 당시 그의 시 ‘파랑새’, ‘보리피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한하운은 나병의 한(恨)을 시로 승화시키면서 사회와 소통하려 했던 예술가이자 사회사업가였다. 그는 한센병자들의 자식들을 위해 1952년 십정동에 신명보육원을 창설했다.
당시 보사부는 성계원에 거주하는 나환자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금지했고 아이가 있으면 부모와 서로 만날 수 없도록 격리해 수용했다. 성계원과 신명보육원 사이에는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어 아이가 보고 싶은 부모와 부모가 그리운 아이들이 해가 지면 산을 돌아 넘어 몰래 만나곤 했다고 한다.
인근에 한 초등학교가 개교한 1965년대 무렵, 이 학교 학부모와 교직원들은 근처십정농장 아이들이 입학하는 것을 꺼려 농장 근처에 그들만의 분교를 두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지만 뜻을 관철시키진 못했다. 어렵사리 원래 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한센병자의 자식들은 교사와 같은 반 아이들의 멸시와 천대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런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정을 보냈다. 인천문화재단이 확보해 얼마 전 공개한 자료 중에 1971년 11월 20일자로 육영수 여사가 한하운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타자기로 작성된 이 편지에는 십정농장 주민들에게 격려의 말과 영농서적 한 상자를 십정농장에 보낸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염전벽해의 땅
십정동은 1970년대 초 까지 만해도 거대한 소금밭을 품고 있었다. 바닷물이 동네 어귀까지 드나들었다. 구한말 융희 원년(1907년)에 소금을 공급하기 위해 조정에서 현재의 홈플러스 간석점 부근인 십정1동 558-7 일원에 1정보(약 3천평) 규모의 우리나라 최초 천일염전 시험지를 조성했다.
이후 약 30만여 평에 달하는 거대한 염전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일대에 천일염을 정제하는 소금공장들도 들어섰다. 인천은 한 때 전국 소금 소비량의 절반을 충당할 정도로 풍부한 생산량을 자랑하기도 했다. 염전은 산업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1969년 수출 5·6공단과 인천기계공단으로 지정되면서 공장 터에 그 자리를 내주며 자취를 감추게 됐다.
염전벽해(鹽田碧海)의 흔적은 표지석 하나로 달랑 남아있다. 그 표지석 마저 눈에 거의 띄지 않게 공장 담벼락 한 구석에 옹색하게 서 있다. 지번 하나 갖고 그 표지석을 찾기 위해 주변을 서너번 돌았지만 찾을 수 없어 공장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표지석은 옛 서울제강 단지 내에 있는 (주)새천년환경 집하장 정문 옆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있었다.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