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배다리의 흔적을 찾아서
아련한 배다리의 흔적을 찾아서
仁川愛/인천이야기
2010-12-16 12:02:23
아련한 배다리의 흔적을 찾아서
[릴레이 칼럼 ⑨] 배성수 /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대학 새내기 시절, 같은 과 친구가 주선한 미팅에서 퍽 괜찮은 사람을 소개받은 적이 있다. 첫 인사를 나누고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중 어디 사느냐는 물음에 '배다리 근처'라는 간단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잘 알지 못하겠다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제야 문화극장이며, 헌책방거리며 알 만한 곳들을 곁들여가면서 꽤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덕분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풀어지기는 했지만, 사실 그이가 사는 곳이 궁금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이 집이 있다던 배다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이는 배다리 위치를 직접 확인시켜 주는 친절까지 베풀어주었다. "배다리에 배가 어디 있냐"며 농담을 던지기는 했지만, 그제야 "왜 하필 배다리일까?"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당시 이 궁금증에 대해 여기저기 물어보아도 '~하더라' 식 구전만 들을 뿐, 여지껏 명쾌한 답변을 들어본 적은 없다.
1929년 인천부 관내도
배다리는 하천이나 갯골을 건너기 위해 배를 이어 붙여 만든 임시 가교를 말한다. 강릉, 공주 등지의 지역에도 있었다고 전하며, 정조 임금이 화성행차를 위해 한강에 가설하였다는 역사 기록도 남아 있다. 배다리라는 마을이름도 꽤 흔해서 전국적으로 분포하는데, 대개 하천을 끼고 있거나 바닷가에 위치하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로 배를 이용해서 다리를 만들었던 곳에 붙여진 지명이리라.
인천의 배다리 역시 배를 이용한 다리가 있었던 곳일 터다. 그러나 언제부터 이곳을 배다리라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여러 지리지와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에도 배다리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배다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1915년 2월 14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설 준비로 분주한 시장의 모습을 묘사한 기사다. 당시 배다리에는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이 개설되었던 듯하며, 거래되는 품목도 꽤나 다양했던 것 같다. 1937년도 7월 7일자 '동아일보'에도 배다리와 관련한 기사가 있다. 소년 절도범으로 배다리 안팎의 인심이 흉흉하다는 내용이다. 재미 있는 것은 경동 일대를 '안'으로, 금곡동 일대를 '밖'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는 배다리 철교일 것이다. 어쨌거나 두 기사 모두 배다리 유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배다리 유래는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인데, 대개 두 가지 이야기로 모아진다. 신태범 박사는 큰 갯골이 통해 있어 만조 때면 바닷물이 들어왔고 배가 닿는 다리가 있어 배다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했다. 이에 비해 배가 다닌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다만 쪼개진 목선 조각으로 다리를 놓아 배다리라 불렀다는 게 고일 선생의 설명이다. '배가 닿는 다리'와 '배 또는 배의 조각으로 만든 다리' 중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이곳에 다리를 놓을 만한 갯골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동네의 모습에서 배다리를 놓았을 법한 갯골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역시 옛 지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터인데, 19세기 이전 고지도는 그 정밀도가 많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해방 이후 현대지도는 이미 지형이 많이 변해 있어 갯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일제강점기 지도를 뒤져보았다.
짐작대로 1917년에 만들어진 '인천동부 1/25,000 지형도'에 배다리 갯골의 흔적이 표시되어 있다. 송현동 수문통에서 시작되어 남진하던 검은 실선은 동인천역 위에서 동쪽으로 꺾여 배다리 철교 앞까지 표시되어 있다. 이 실선이 갯골을 표시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갯골이 더 선명하게 표시된 지도가 1929년 '인천부관내도'이다. 천연색으로 제작된 이 지도에서 갯골은 파란색으로 표시되는데, 수문통으로부터 두 갈래 갯골이 동인천역 위에서 합류하여 배다리의 공동세탁장까지 이어져 있다. 이 갯골은 1936년 송현동 일용품시장이 인천부에서 직영하는 공설시장으로 문을 열면서 배다리 쪽에서부터 점차 메워지기 시작했던 듯하다. 1980년대 말 수문통 일대가 마지막으로 복개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지도를 보면 배다리는 갯골 끝자락에 위치했을 것이다. 싸리재에서 갯골 건너 금곡동과 송림동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위해 배를 이어 다리를 만들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 다리를 배다리라 불렀던 것이리라.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고 지도에서 배다리가 놓였을 법한 갯골 수로도 확인했지만, '배다리'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헌데 그보다 더한 궁금증이 머리를 맴돈다. 나에게 배다리를 알려줬던 그이는 여전히 '배다리 근처'에 살고 있을까?
1917년 '인천동부 1/25,000 지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