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월동-그날의 대포, 속을 뒤집어놓다
송월동-그날의 대포, 속을 뒤집어놓다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1-01-12 00:35:24
그날의 대포, 속을 뒤집어놓다
중구 송월동은 자유공원을 품고 있는 응봉산의 뒷편에 있다. 산 뒤편에서 조용히 인천 앞바다를 바라다보고 있는 송월동은 어머니 품과 같은 동네다. 긴 항해를 마친 뱃사람들과 수십리를 달려 온 철마가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공포(空砲)와 공포(恐怖)
자유공원은 사생(寫生)대회의 단골 장소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바다 쪽을 향해 앉아 월미도를 배경으로 인천항 풍경을 그렸다. 간혹 그들과 반대로 앉아 그림을 그리는 학생도 있었다. 그들의 화폭에는 응봉산 산꼭대기에 서 있는 독특한 건물이 그려졌다. 인천기상대다.
북위 37.28˚ 동경 126.38˚ 좌표에 둥지를 튼 인천기상대는 독특한 외관 덕에 한동안 인천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높게 솟은 철탑과 원통형의 하얀 건물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도로에서 떨어져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을 수 있는 굳게 닫힌 육중한 철문도 그런 느낌을 갖는 데 한몫 했다. 오랫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기상대는 이제 출입이 자유롭다. 제물포고와 담 하나로 이웃하고 있는 기상대에 오르는 길에는 가을을 마무리하는 낙엽들이 뒹굴고 있었다.
인천기상대가 문을 연 지 100년이 넘었다. 일제가 1905년 1월 1일 응봉산 정상에 관측장비를 갖춘 인천측우소 청사를 세웠다. 초대 소장으로 일본의 중앙기상대장을 지낸 기상학의 권위자 와다 박사가 부임했다. 그만큼 인천측우소의 위상은 막강했다. 당시 인천관측소는 국내 13개 도시에 있는 측우소는 물론 만주지방의 관측소까지 통괄했다. 일본 기상대,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 기상정보를 주고받을 만큼 보유기술도 뛰어났다.
‘꽝’, ‘꽈앙~’ 100년 전 응봉산에서 쏜 대포굉음이 매일 인천시내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학생들은 책보따리에서 도시락을 꺼내들고 노동자들은 기계를 멈추고 식당으로 향했다. 대포소리가 난 시간은 정각 12시. 바로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해방 전 만해도 시계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관측소에서는 매일 정오에 대포로 공포를 쏘았다. 당시로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정오에 대포를 쏜다해서 흔히 응봉산을 오포산(午砲山)이라고 불렀다.
대포 소리에 맞춰 밥은 먹었겠지만 속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시각을 알려준다는 명분 아래 오포를 쏘았다고 하지만,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경기(驚氣)가 날 정도로 심한 소음이었을 것이다. 짜증스러운 스트레스의 차원을 넘어서 식민지 민초들에게 가하는 무언의 으름장이었다.
한국 최초 지진관측 시발점
기상대 건물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몇 차례의 증축 등을 거쳐 모습이 바뀌었다. 눈길을 끄는 건물은 본관 옆에 있는 작은 빨간 벽돌집이다. 현재는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언뜻 봐도 100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1960년대에 세워진 건물로 알고 있어요. 한동안 방으로 쓴 것 같은데 불탄 흔적도 있어요.” 기상대 이성출 팀장의 설명이다. 눈썰미와 설명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있다. 올 2월 인천기상대에서 발행한 ‘인천기상대 역사를 찾아서’라는 자료집을 보면 1923년 4월에 준공된 창고 건물로 적혀 있다. 거의 90년이 된 고건축물이다. 일각에서 이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기상대 측은 청사 증축을 위해 이 건물 철거문제로 고민에 빠져있다.
벽돌집 옆에 ‘인천교통방송’ 간판이 붙어 있는 작은 부스가 있다. 교통방송의 날씨정보 리포터가 근무한다. 2시 55분이 되자 박윤선씨가 헤드폰을 낀 채 잠시 적막. “네, 날씨 정보입니다. 인천지방 현재 맑은 가운데 기온은 영상 15도이며…” 1분가량의 예보가 막힘없다. 한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에서 전하는 날씨 정보가 주파수를 타고 육지로 바다로 멀리 퍼져 나간다. 인천교통방송의 날씨 정보는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매시간 계속된다.
인천기상대에는 현재 20명이 근무한다. 지난 5월에 조직개편으로 수원과 문산 기상대 업무까지 총괄하게 되었다. 바다로는 서해중부 앞바다 까지가 관할 지역이다. 덕적도를 경계로 해서 그 너머는 먼바다 그 안쪽은 앞바다다. 올 겨울 인천지방의 기상이 궁금했다. 기온은 평년(-6~8℃)과 비슷하겠고, 대륙 고기압과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기온의 변동폭이 크겠다. 찬 대륙고기압이 확장되면서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질 때가 있겠다고 예보한다.
기상대를 막 나서는데 정문 옆의 ‘세계지진관측망 인천관측소’라는 작은 푯말에 눈길이 갔다. 이곳이 바로 한국최초 지진관측 시발점이다. 1905년 3월24일 인천관측소 안의 작은 방공호에 기계식 지진계가 설치되었다. 세월이 흘러 1995년에 노후화된 장비는 모두 최첨단 디지털 장비로 교체되었다. 이 관측소는 지난 3월 천안함 사건으로 뉴스에 보도되면서 시선을 끌었다. 그날 이 관측기에 백령도 앞바다의 수중음파가 기록된 것이다.
애경그룹이 시작된 곳
기상대 정문 앞으로 내려가면 건너편에 자유 유치원이 있다. 산 끝자락 가파른 곳에 서 있어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원래 이 자리는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의 주택이 있었다. 우아한 서양식 2층 석조 건축물로 러일전쟁 직후인 1906, 7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고토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만큼 좋은 위치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과 국군이 번갈아 사용하다가 인천상륙작전 때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고 1955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이 자리에 송월초등학교가 신축되었는데 후에 건너편으로 이전하였고, 이 자리에 북성초교가 다시 개교했다가 곧 폐교한 후 인천교육과학연구원이 들어섰다가 유치원에 자리를 내줬다.
구한말 인근에 외국인들이 살고 있어서 송월동은 신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동네다. 그 중의 하나가 비누다. 인천서 비누를 처음 만든 것은 1895년경이지만 본격적인 비누공장이 세워진 것은 1912년 일본인 ‘오다’가 송월동에 ‘애경사(愛敬社)’를 설립하면서 부터다. 1954년 채몽인 씨가 이 공장을 인수해 ‘애경유지공업(주)’를 창립해 종업원 50명과 함께 비누사업을 시작했다.
‘애경’은 바로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미향’이란 브랜드의 비누만 한 달에 100만개를 팔아 당시 경인국도를 달리는 차량 대부분이 애경유지 트럭이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이것이 오늘날 애경그룹의 모태이다. 앞서 언급한 채몽인씨는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의 남편이다.
우물 많은 동네
지금도 송월동에는 일본식 주택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송월교회 밑으로 모양이 비슷한 일본식 주택이 눈에 많이 띤다. 동일방직과 이천전기 사택으로 사용되었던 집들이다. 비탈에 집을 짓고 곳곳에 계단을 만들어서 골목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졌다. 교회 내리막길 옆에 철조망으로 둘러친 우물이 있다. 앞에는 녹슨 펌프도 있다. 길 가던 주민에게 물으니 오래전에 폐쇄되었다는 말과 함께 밑에도 우물이 하나 더 있다는 정보를 준다. 밑의 우물은 뚜껑이 열쇠로 잠겨 있지만 얼마 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있다.
이 동네에서 60년 가까이 살아 온 오익환(86) 할아버지는 송월동의 변천사를 어느 정도 꿰차고 있다. 그는 천안에서 철도 관련 일을 하다 해방 직후에 인천역 근처로 전근 오게 되었다. “인천역 근처에 부두가 있었을 때는 이 동네에 배를 부리는 선주(船主)들이 많이 살았지. 저 우물들 앞에 오징어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씻었던 게 엇그제 같은데… 암튼 이 동네는 산 밑이라 그런지 물이 좋아. 아무데를 파도 물이 나왔지.”
송월초등학교 밑으로 가면 인천에서는 이제 보기 드문 기와집 골목이 나온다. 1950년대 중반에 조성된 도시형 한옥촌이다. 건립된 지 반세기가 넘다보니 곳곳이 낡았지만 골목에는 기와집의 우아한 자태와 기풍이 여전히 흐른다.
만석동 쪽으로 언덕을 내려오면 경인전철 변에 닿는다. 기찻길 옆에 송월시장이 있다. 1937년 2월 송월공설시장으로 개설되었는데 가축시장의 기능을 하고 있어 흔히 ‘돼지장터’라고 불렀다. 만석동과 이어진 건널목에 육교가 생겼고 철로변에 높은 담이 쳐지면서 시장은 점점 퇴락했다.
기차여행의 추억 장소
인천역은 송월동 동선 안에 있다. 지금부터 꼭 111년 전 이곳에서 기적이 울렸다. 이 땅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경인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이곳을 인천사람들은 ‘하인천역’이라고 부른다. 동인천역이 한때 상인천역이라 불린 것에 대한 댓구다. 지금의 역사(驛舍)는 1960년 9월 17일에 건립된 이후 특별한 ‘성형’을 하지 않은 그대로다. 경인선 중에 이만한 순수함을 지닌 역사는 없다. 덕분에 얼마 전에 인기 드라마 ‘대물’의 촬영장소로 헌팅돼 고현정이 인천역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인천역’이란 간판을 가리운 채.
현재 하루 296회 상·하행선이 운행된다. 하루 이용객은 7천명에 달한다. 첫차는 오전 5시에 떠나고 막차는 밤 12시 39분에 들어온다. 매일 밤 막차에는 여지없이 제 역을 지나친 취객들이 적지 않다. 인천역을 출발한 열차는 이제 서울을 지나 경기도의 소요산역 까지 내처 달린다. 장장 2시간 30분이 걸리는 긴 여행길이다. 먼 길을 달려온 경인선 기차는 엄마 품 같은 인천역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출발 신호음과 함께 어김없이 다시 길을 나선다.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