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 (1)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 (1)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1-07-02 10:41:47
仁川아 너는 엇더한 都市? (一)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 (일))
먼저 畧歷부터
古史를 溯考하면 三韓時代에는 馬韓의 영역으로서 高句麗 東明王의 長子 沸流王이 따로이 南下 定都하얏다든 彌鄒忽(一名 買召縣)이 곳 이 지방이라 하얏다. 其後 新羅, 高麗, 李朝의 王朝가 累變함을 따라서 郡名도 邵城, 慶源, 仁州, 仁川으로 여러 번 곳치어지는 동안에 혹은 특정의 郡縣으로 혹은 他郡의 屬領으로 혹은 都護府 이러케 廢合이 無常하야 오다가 距今 41년 전 癸未 開港 以來 通商事務衙門, 觀察府, 監理署, 仁川府 등의 開廢를 거듭하야 今日에 이르엇다.
누구의 福地?
近畿 중 이 仁川港은 經亂 만은 특수지방이다. 高麗 때부터 倭寇累年來侵云云의 古事 연구는 그만 두고라도 가장 갓가이 目睹한 바 지나간 丙子年에 江華島에서 砲擊을 당한 雲揚號 사건으로 所謂 日韓修好條約 체결의 결과 이 仁川港이 元山港과 同時 開港地로 결정된 일이며 日公使 花房義質派가 壬午軍亂의 지독한 불을 밧고 간신이 亡命 귀국하얏다가 再次 大兵을 이끌고 와서 이곳에서 濟物浦條約을 체결한 일이며 또 公使 竹添進一郞派는 甲申變의 助*軍 노릇을 하다가 失勢되야 이곳에 떠러저서 다시 一轉하야 漢城條約 체결의 動機를 지엇고 其後 日淸, 日露의 兩大 戰役이 모다 이곳을 것치어 시작하얏다. 이로써 보면 이곳이야말로 무엇이라 함보다도 저 日本族으로 하야금 세계적 立脚点을 발견한 곳이 곳 이곳이라 하야도 過言이 안일가 하노라.
滄桑의 今日
본래 이 仁港으로 말하면 開港 이전에는 茫茫한 해변에 蘆花만 가득하든 一小漁村으로서 萬石洞으로부터 北城浦 기타 數箇 地点에 一点 二点 石鼎의 炊烟이 일어남을 보앗슬 뿐 이엇스나 次次 物換星移 甲午 甲辰의 大變局은 급격히 이 항구의 번창을 極케 하야 인구 朝鮮人 28,083, 日本人 11,228, 外國人 1,701, 貿易額 一躍 1억만원의 레코-트를 돌파한 今日을 마츰내 구경하게 되얏슴은 이것이 뉘의 福力일가?<126>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前에 업든 名勝
濟物浦에서는 開港 이래 20년 전까지도 별로이 볼만한 名所를 구경도 못하다가 오늘날 하나 두을 전에 업든 무엇 무엇이란 것이 눈가에 것치이는 것은 조금 섯트러 뵈인다. 이제 그 箇所를 말하면 總 자본금 30만원을 運用하야 여관, 貸別莊, 간이식당, 매점, 해수욕장, 生簀貸船 등의 영업을 爲主하는 月尾島 遊園株式會社, 滿鐵의 경영으로 총공사비 30여 만원의 月尾島 해수욕장, 夏季 휴가 중 300명 아동을 收容하는 臨海學校, 天照皇大神 及 明治天皇神을 合祀하는 東公園(八坂公園) 이 밧게 西公園(萬國公園), 月尾島公設運動場 등이다. 이러케 생산화, 낙원화 하야 오는 이것을 보고는 웃는 사람도 잇고 아니 눈물짓는 사람도 만타. 風光이 제 아모리 絶佳하단덜 구경은 口敬이다. 아마도 其中에 웃는 사람들은 배불니 먹고 뒤짐지고 八字거름으로 그니는 그네들이 아니고 누구이랴.
南村市街의 極盛
光武 67년경까지는 지금 寺町이라는 畓洞으로부터 東으로 京城通路는 그만 두고라도 一小山에 불과하든 日本 公園地帶에도 겨우 東本願寺, 소학교, 居留民役所의 役舍, 第一銀行 舍宅이 건축되얏슬 뿐임으로 純 日本市街는 아조 滿目蕭條하든 것이 意外 행운을 맛난 그네들이라 혹은 官力 혹은 富力으로 日進月盛 鮮人의 遊興村이든 花開洞 全幅을 점령하기 시작하야 現今의 海岸町, 濱町, 萬石町의 埋立市街를 縱橫擴大하야 온 이래 順調的인 발전의 경로는 着着 築港이 완성되고 海運이 왕성하야 電氣會社, 燐寸會社, 醬油會社, 精米工場공장 등의 一時 勃興함을 따라서 金融機關 及 大商店이 逐日 증가하야 이러케 所向無敵 內外商戰의 勝勢 장차 어느 정도까지 强進할는지 알 수 업슬 뿐이다.
沒落된 北村의 慘狀
從來 朝鮮人들은 각국 居留地의 東坼浦, 畓沓洞, 龍洞, 花開洞, 花島洞(新花水里), 平洞(花平里), 萬石洞 等地에 散在하다가 그나마 日人 居留地의 팽창으로 坼浦, 畓洞 등의<127> 市街地를 여지업시 내여노코는 엇지 하는 수 업시 허위허위 東山을 넘어 典圜局 所在地(今 高等女學校 所在地)의 방면 及 花平里 근방으로 올마버렷다. 이로부터 京城街道는 물론 新花水里 及 花平里의 一帶는 數年도 못 되야서 數百戶나 증가되고 다시 각지 농촌으로부터 소작권을 빼앗긴다. 각 도시로부터 日人에게는 商權을 被奪, 中國人에게는 노동권을 상실 이러케 생존권을 扶持할 수 업서서 男負女戴 八方돌이를 하는 동무들은 가다가 떠러지고 오다가 머물고 하야 표면상 남 보기에는 제법 北部 一帶도 繁盛하야오는 것 가티 뵈이는 지금의 松峴里, 松林里 등의 新設部落, 凹凸不一한 산비탈, 게딱지갓튼 속으로 기어나고 기어들어가는 그들의 窮狀을 보아라. 人情이 잇스면 눈물이 잇슬 것이요 눈물이 잇다하면 피땀이 업슬소냐?
엄청나는 築港德
仁港은 西海岸의 중심을 점거하야 背後에는 物資의 大集散地인 京城을 지고 압흐로는 黃海를 隔하야 바로 中國大陸과 對峙하고 中國, 日本, 歐米의 각 항로를 통하야 매년 千隻에 近한 75만噸 이상의 汽船을 收容한다. 다시 陸上交通으로는 24哩, 매일 왕복 13回의 京仁鐵道의 편과 18哩 短距里 永登浦에서 연락되는 京釜線 龍山에서 접속되는 京義 京元의 兩線을 이용한다.
원래 이 항구는 港內가 넓고도 물이 깁흔 데다가 嚴冬에도 依然한 不良港이다. 그러나 32尺이나 오르는 東洋無比의 潮汐干滿의 差는 大船의 荷役을 3海里 중에서 하게 되는 극심한 불편을 生케 함으로 드듸어 明治 44년 辛亥 以降 10개년의 사업으로 공사비 5,664,000여圓을 더지어 改修에 착수하야 閘門船渠 及 기타의 완성을 告하얏다.
築港의 최초에는 장래 출입화물 60만噸을 목표로 하얏든<128> 것이 一朝 歐洲大戰의 영향을 밧은 이 港의 무역도 예상 이상으로 증진되야 大正8년에는 32,000噸, 同10년에는 746,452噸, 同12년까지에는 760,916噸, 이것의 가격 1억198만여원 이러케 天井을 모르고 躍騰하는 이 港의 발전의 現狀은 맛츰내 선박의 출입, 화물하역 등 諸般 장애를 초래하야 이 仁川府民은 또다시 築港 擴張 필요의 소리가 놉하저서 작년 1월부터 總督府에 請願運動을 개시하얏다. 아아 築港의 공덕? 牙山이 깨지거나 平澤이 문어지거나 꿩 먹고 알 먹는 무리는 따로 잇지 안으냐!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머리를 숙으린 貿易
開港 당시는 겨우 57만원 내외에 불과하든 것이 一朝 저들이 韓半島로 國權을 伸張한 후부터 임의 對中貿易에 대하야 全鮮 貿易額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야 中國 商人을 압도하고 차차 歐米貿易의 중추가 되야 맛츰내 1억만원을 上下하는 數字를 엇게 되얏섯다 만은 運이 가면 雷轟이다. 歐洲戰亂이 終熄되자 財界 恐慌이 일어나고 關東의 天災가 雪上加霜 꼭두를 눌너서 지금은 겨우 現勢 유지에도 허덕어리는 꼴이다. 이것이야말로 꼿밧에 불이 아니냐. 그래도 그들에게는 活路가 잇슴인가. 모처럼 寄港된 客船에 몃푼어치 못 되는 물품을 담아 보내면서도 염치를 무릅쓰고 上海直通航路 문제를 련방 끌어내느니 從來 2천만원이나 넘든 沿岸貿易에 대하야도 日本 각지에 剩餘한 船腹을 이곳으로 集注하야 上海通의 연락을 원활케 하느니 米人의 排日에 대한 反抗策을 講究하느니 한다. 아아 이러케 떠드는 것으로 숙으렷든 머리가 번쩍 들니어질 것일가?
이제 仁港 무역에 대한 작년 중 입항 무역 선박數 及 輸移出入의 중요품 槪況을 摘記하면 이러타.
入港貿易船舶數
<129>
輸移出 輸移入
貿易을 따라가는 金融
仁港의 금융기관으로는 6개 은행의 지점을 위시하야 신탁회사, 금융조합, 無盡會社, 상호금융사라는 것이 각 一社가 잇고 日本人의 賴母子講이 163組, 朝鮮人의 稧가 322組가 잇는 외에 中國人의 免滙業者가 12處나 된다.
재작년 末까지는 內外 經濟界의 動搖에 자극되야 일반 상공업자가 서로 어지간이 견실한 방침을 취하야 족음 平穩裡에서 越年하얏스나 마츰내 客春 이래 株式 及 正期 米沈靜, 日本 內地로부터 中國 각 방면으로 수출하든 綿絲布의 頓挫로 하야 不得己 針席의 불안을 늣기든 즈음에 意外 大震災로 急轉하는 악영향은 경제의 大混沌을 거듭하얏다. 그러나 정부의 응급과 當業者 간의 노력은 旱天의 一滴이 되야 晩秋 이래 日本 內地의 入注가 만어저서 그 동안 零替하든 수요가 차차 머리를 들어 족음식 繁盛期를 挽回하야오는 것 갓다 한다.
이제 각 箇所의 작년 중 성적을 알아보면
生産機關다운 精米工場
仁港은 곡물의 集散地로 一次 日鮮 兩地間 關稅가 撤廢된 이래 각종 생산품 수입의 利便과 水力電氣事業의 진전으로 運輸 及 교통의 便을 이용하는 大小工業이 旭日昇天의 기세로 一時 勃興된 결과 작년 중 生産高만 하야도 26,918,712원이나 된다. 其中에서도 籾摺業, 精米業, 製鹽業, 釀造業이 가장 旺盛하얏다.<130>
精米은 仁港의 운명을 좌우하는 移出品의 大宗이다. 작년 중 全 朝鮮의 移出 390만여石 중에 仁港의 積出이 805,580石 內 精米는 604,096石 즉 全 積出 數의 7割 强을 當한다. 目下 港 內에는 1일(12시간) 3,020石 1개년 100만석의 舂精 능력을 가진 精米業者 12명 중 日本人은 1人도 업스나 그와 반대로 籾摺業者 23명 중 日本人은 1명이 석끼어 잇슬 뿐이다. 齋藤, 力武, 加藤, 奧田 등의 大공장에는 각각 100여명의 朝鮮 女工들이 득실 득실한다.
民業製鹽成績
再製鹽工場 3개소
釜數 44개
製鹽高 14,369,227斤
價格 295,529圓
三分一도 못 남은 市街地
日俄戰役 이후 怒潮가티 모라 건너오는 日本人은 다시 時來風送日韓合倂의 호박이 떠러지는 때올 타서 약은 者는 金權으로 억쎈 者는 주먹바람으로 急轉直下 猝富되는 판에 이 仁川府 內의 시가지도 발서 총면적 363町步餘에서 241町步 이상은 이들의 소유물이 되고 36町步 이상은 西人과 中人의 차지가 되고 남어지 86町步 强이라는 것이 겨우 朝鮮人의 손에 걸니어 잇다. 알지 못거라. 요것도 債鬼의 손속에서 숨낄이 급해진 慘狀이라 한다. 이것이 웬일이냐. 이 數字이야말로 우리 민족적 경제의 破産宣言이 안이냐. 이 알뜰한 덩어리를 버리고라도 이만 못한 돌각땀에 엇부터 멩이풀(*島産 草名)일 망정 먹고 지낼 수만 잇다면 그만이리라 만은 首陽도 남의 版圖라 제 아모리 애를 써도 들어가는 그 곳은 막달은 골목이다. 그러면 엇더케 하란 말이냐? 아아 남은 도야지라거니 개라거니 憚할 것이 무엇이랴. 우리는 自由戰線에선 先鋒이다. 우물고누첫수로 在此一刻 도라서는 것이 두수 업는 復活의 길이요<131> 新生의 날일 듯!
港內 各國人 所有 市街地 面積 比較(작년말까지)
너의만 사람이드냐
言必稱 一視同仁之下에 무엇이 엇덧타 무엇이 엇더타 하면서도 言行이 不同한 일이 하도 만타만은 그런 중에도 朝鮮 現下의 二色진 교육제도는 볼사록 긔가 맥힌다. 자아 이 지방교육의 現狀을 보자. 배경 조흔 저 사람들에게는 매년 평균 18만원의 經費로써 紀念幼稚園으로부터 尋常小學校, 尋常高等小學敎, 南商業學校, 商業補習學校, 高等女學校에 이르기까지 2,300여명을 수용하는 각종 공립학교가 잇서 一段 二段 꼭꼭 순서대로 계급을 밟아 國民敎養의 터전이 넉넉한데 우리에게는 더부살이 노름판과 비슷한 日鮮人 其 學制의 遞信局 海員 養成所 及 公立商業學校와 朝鮮人 特殊敎育機關이란 商業補習學校, 公立普通學校 등 4개소가 잇는 외에 天主敎會 管理下에 잇는 私立博文學校와 耶蘇敎會에서 경영하야 오던 私立永化學校, 永化女學校 등의 3校가 겨우 一寸의 縷命을 鋒頭에 걸어 노코 惡戰苦鬪 중에 잇슬 뿐이다. 一方의 募集難과 一方의 收容難을 조화할 성의가 업서 그러하냐. 우리에게는 의무교육의 실력이 업는 죄이냐. 時勢가 尙早하냐. 民度가 未及하야 그리하냐. 그러탄들 3만 인구의 1개 공립보통학교란 말은 너무나 섭섭하다. 그나아 남의 德으로 된 3개의 私立 그것까지 업섯더면 큰일날 뻔하얏구나. 아서라 남의 말, 남의 글로써 강제적 同化 속으로 끌리어 들어가는 二重敎育의 今日이라도 사람인즉 남만 못하지 안은 분명한 사람이란다.
이제 각 학교의 작년 말까지의 아동 수 及 經費를 累別하면 이러탄다. <132>
神佛맛으로 살아가는 人間
가는 곳마다 所謂 宗敎 名色의 간판 구경도 許多하다 만은 지금의 仁川이 지방처럼 싸구려판은 生前 처음인 듯하다. 그것도 1개소의 天道敎와 기타 西人이 관리하는 3,4개소의 基督敎를 除하고는 전부 日本人 관리의 社寺와 교회들이다. 이제 그 箇所를 말하자면 仁川神社는 宮町에 東本願寺, 西本願寺, 明照寺, 妙覺寺, 天理敎仁川宣敎所, 金光敎仁川敎會所 등은 모다 寺町에 뿌리를 박고 日本 메소지쓰도仁川敎會는 山手町에, 華嚴寺는 花町, 高野山 遍照寺은 宮町, 天理敎邵城宣敎所는 海岸町, 天理敎京仁宣敎所는 龍岡町, 기타 組合基督敎會 등 이런 것이 각각 四面八方으로 팔을 뽑내이어 隱然히 自族의 永住的 기반을 단단케 한다. 이와 동시에 婦人會, 慈善會, 報德會, 少年會, 公勵會, 悲田院, 免囚救護院 등의 사회적 사업 가튼 일도 設行하야 자기네들끼리는 서로서로 도아주는 힘도 무던한 모양이다.
會社數
左記 5題는 紙面의 제한으로 하야 不得己 來號에 連載하게 됨니다.
空殼만 남은 物産消費組合
피 빨아들이는 惡魔窟
三大組合의 長短得失
中心을 일어버린 勞働界
雜同散異의 形形色色
甲子 5月上澣邵城에서 乙人 <133>
<126-133> 개벽 48 호 1924년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