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2))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2))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1-07-02 10:44:07
仁川아 너는 엇더한 都市?(2)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2))
피 빠라들이는 惡魔窟
이것은 仁川 米豆 取引所를 두고 하는 말이다. 米豆의 품질과 가격의 표준을 일정하야 내외무역의 편리를 준다고 떠드는 당면의 强辯은 그만두고라도 이것으로 하야 仁川 주민이 생계를 엇고 따라서 全港의 번영거리가 된다는 일부 賞讚도 잇다만은 그것도 어느 시기까지는 남의 풍락에나마 춤추어 본 적도 잇섯슬 것이다. 엇잿든지 조선인으로서 朝鮮人에게 이해되는 것을 경계치도 못하고 한갓 우물속에서 함부루 짓거리는 깨고리의 소리야 憚해서 무엇하랴.
보아라. 一時는 賣買高 七千六十六萬三千六百石, 주주이익 배당금 년 6할 至 7할 5분이라는 수자를 뵈이든 ´ 取引所의 성적은 과연 仁川개항 14년 되든 해로부터 28개년이나 되는 동안에 朝鮮人으로서 그 이윤을 입은 자는 멧멧이며 그 해독을 밧은 정도는 얼마나 되는가.
처음 近畿 좌우에 손을 대이기 시작하야 점차 3南 각지의 쌀을 글거들이는 판에 엇지다가 한번 천행으로 장님낙시(無鱗釣)에 물니는 고기와 가티 恒河沙의 一粒만치라도 먹엇다 하면 아아 잇때가 一攫千金할 千載一時라 하야 농부는 꽹이를 던지고 商買는 壽板을 버리고 어부는 낙대(釣竿)를 꺽고 나도나도 들어덤비다가 밋천(本錢)까지 잘니게 된 결과는 典當질로 典當질은 영원 放賣로 맛츰내 귀신도 모르게 선조의 신주까지 들어먹고 형제처자가 이산하야도 어느 뉘가 말 한마듸 불상타고 안는 것이 이 米豆쟁이의 노름이다. 이러케 京畿以南의 피를 흡진한 毒牙는 다시 西北으로 옴기어 적다 만타 할 것 업시 닥치면 닥치는 대로 막 먹어 들어간다. 이 그몰이 天羅가 아니요. 地網도 아니언만은 제 아모리 벽창 牛가튼 자도 한번 걸니어 들기만 하면 利를 보거니 해를 보거나 최후의 사명을 내기하야 속담에 물귀신처럼<56> 끌고 들어가서 하나가 망하면 둘셋이 뒤를 대서고 한 명이 利를 먹는다면 100명이나 쏠니어저서 朝鮮人의 생활난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장차 朝鮮人 公私경제의 파멸이 이로부터 다 닥칠 날이 멀지 안타. 그리하야 남들은 이것을 가르처 滅亡童의 양성소이니 허영의 지옥이라고 명언치 안는 이가 업다. 그리면서도 저 모질은 딸각발이 兒孩들은 言必稱 朝鮮사람들은 取引所를 일개 도박장으로만 알고 당국자의 본의에 버서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너무나 愚惡하다고 한다.
아서라. 남의 시비는 식은죽 먹기보담도 쉽다고 하얏다. 첫째 이따위 시장을 공설한 자는 누구이며 旣爲공설한 바이거든 중매점 18개소에서 朝鮮人에게는 겨우 4명에 한하야 허가함은 무슨 塞責이며 동일한 권리를 정유한다면서 회사와 중매점뿐만의 전횡적 노름판이 되는 중매점 대 고객간 수여하는 手數科의 불공평은 그것이 무슨 亡兆이며 다시 9할 이상이나 넘치는 朝鮮人 손님에 대하야 시설에나 대우로나 무엇에나 할 것 업시 모다 주객전도의 차별은 뉘의 행사라 하겟스며 명명백백한 取引定欸의 조문을 무시하고 중매점 지점 又는 출장소와 유사한 소위 80여개소의 米俱樂部를 공인하야 京城府내에다가 林林葱葱이 떠버려 노코 於左於右對方의 관심만 사서 돈만 휘모라 들이면 그만으로 알고 머리 惡을 쓰는 꼴은 볼사록 기괴천만이다. 만일 이처럼 毗盧絶頂을 모르고 나아간다면 第2荒木의 범행은 그만두고 그 이상 무엇무엇은 두려울 것이 잇스랴.
다시 仁川과 이 取引所와의 이해관계는 엇더한가. 挽近以來 釜山, 大邱 群山각지에 米穀現物取引場이 鼎足과 가티 對峙하야 고객의 쟁탈전이 白熟한 데다가 이상 소위 米俱樂部 濫設의 악영향을 먼저 밧는 곳은 어듸인가. 곳 住民의 생계와 전시의 繁榮이 엇더라는 인천항이 다 이것으로 하야 현하 仁川의 旅館업자는 朝聚暮散하는 손님 한분도 挽留해 볼 수가 업느니 생겨도 한 卓, 일코도 한 卓 주야장천 돈벼락 맛든 龍河藝妓는 싸구려 물건이 되어 버렷느니 敷島町 遊廓에서는 한달 설흔날 밤을 새여 가면서도 점잔은 米豆軍 양반 한 분을 못되서 보는 것이 恨事하고 한다. 그러고야 米豆市勢가 제 아모리 조타한들 仁川주민의 생계에나 仁川府의 번영에 무엇이 도움이 되며 무슨 관계가 잇스랴 한다. 이러고 보니 目下이 取引所는 적어도 仁川일부에서까지 정 떠러진 寃府가 되고 말엇다. 이러케 회사자체로서는 발서 朝鮮人의 장래를 豫判한지 오랫다만은 아아 이것을 恍然覺破한<57> 朝鮮人된 자-幾何?
中心을 일어버린 노동계
仁港이 열닌 후 거금 28년 전 丁亥에 花島 鎭別將 겸 仁川경찰관으로 재임하얏든 金宏臣은 當港에 무역이 나날이 왕성함을 따라 船場募軍의 蝟集함을 보고 徐應道, 金德弘 2인에게 等牌의 任을 주어 日本人 各組의 *募軍을 모도와 京畿廳과 嶺南廳을 設하야 京畿廳에서는 下陸業을 맛고 嶺南廳은 斗量業을 맛하 以來관청의 監督을 밧아 오다가 다시 23년 전 壬寅秋에 兩廳을 합하야 廳信廳으로 개칭한 후 現永信祖長 金貞坤씨가 그때부터 廳權을 잡고 잇다가 一朝에 日露風雲의 급조를 타서 수천의 役夫를 지휘하야 日本 군사행동에 편리를 힘써 준 殊功으로 6등의 榮動까지 밧앗다 한다. 이러케 남달니 動賞을 밧은 금일의 金씨로서는 이만한 肩書거리가 과히 남븟그럽지 안을 듯도 하다만은 오랫동안을 두고 無虎洞 중에서 자만에 배부른 永信의 四園사정은 일반적으로 용납지 못하게 되야 一呼百金의 高跳하는 임금을 저하케 하며 따라서 그들의 頑强한 기세를 꺽거버리랴고 떠들어 내인 결과는 맛츰내 15년전 庚戌 秋에 이 단체가 각각 3파로 노니어 元 金貞坤 일파는 永信組로 변하고 다시 金鳳儀, 方永三은 嶺南파를 잇끌어 仁信組를 세우고 廳外人 李寅善 등은 일시 保弊金 관계의 感情 문제로 하야 永信으로부터 脫退한 募軍을 提携하야 日信組의 간판을 븟치게 되얏다. 이밧게도 東西漂迫하는 支械軍들의 臨時 會所인 소위 分房(푼빵)이란 것이 海岸 부근에 5,6개소가 잇서 일꺼리 잇슬 적마다 多則數千少則數百이 日本人에게 엇부터서 擔負役에 종사하야 온다고 한다.
다시 20년전부터 서인 땀손이(人名) 방아깐이 생긴 이래 근년에는 日本人 상공업의 번영을 따라 鮮人의 직공의 수도 激增되야 목하 인쇄, 철공, 洋燭, 飛陋, 製鹽, 釀造, 燐寸, 染色, 籾摺(매갈이) 정미 등 각 공장만 하야도 約 2,000여명이나 되고 더구나 각 정미소에 노니어 노역하는 천여의 여공이 잇슴은 이곳에서 처음 보앗다. 매일 아츰 저녁으로 花平, 新花水里, 松林, 松峴 등 各里의 토옥으로 들고 나는 백의군은 전부가 각 공장에서 활동하는 勞作隊이다.
지금의 募軍단체는 3개조를 통하야 斗量統은 전폐되고 다만 港內 각객주의 소관된 곡물의 下陸 及 운반과 日本人 각조의 소관된 상선물품의 적재 及 운반에 從務하는 일 뿐인대 이런 일은 모다 永信, 仁信의 兩組에서<58> 독점하고 客主업측을 떠난 日信의 船募軍은 다만 선창 及 철도역에서 노역할 뿐이라 한다.
다시 각조의 노력을 비견하면 日信은 4,50의 船募軍을 거늘이고 남의 집에서 구차한 살님사리를 해오다가 요사이에야 겨우 약간의 借金을 어더 가지고 組房을 新築하는 중이라 하고 목하 仁信은 100여의 조원이 잇다 하나 이전 組房에는 간판도 떼여 버리고 다만 조장 方永三 개인의 명패만 두렷시 부터 잇슴은 볼 적마다 怪疑가 적지 안타 그래도 야심가이니 못된 놈이니 죽일 놈이니 무엇이니 하야도 개중의 永信은 중첩한 파란속에서 百折不屈 舊廳舍를 굿건이 직히어 金組長의 명령이라면 300여 조원이 허리를 못펴고 出入進退하는 서슬은 그야말로 큰집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 갓다...만은 요맛 것으로 엊지 쾌하다 하며 자족타 하랴.
세계는 발서 국국한 영리만을 떠나서 개성의 신성을 길으지 아니치 못하게 되얏다. 이러하야 勞働勞働 天下가 떠드는 바람에 두눈이 번쩍 뜨인 仁川의 無産級도 한목을 參禮해보랴고 癸亥 4월을 期會하야 邵城勞働會가 제기하야 남과 가티 제법 勞資문제를 축켜들고 한편으론 資本級의 횡포를 膺懲하며 한편으론 외래 勞農의 침탈을 防渴하야 자체의 충실에 힘써 오다가 다시 大勢에 순응하야 노동 총동맹으로 豹變한 후 현하 1,000의 동무가 손을 잡고 活舞臺를 지어 보랴고 가일층 대동단결의 旗幟를 선명케 한다 함은 그야말로 실태은 엇더튼지 말만 들어도 나남할 것 업시 환희의 넘침을 금할 수 업다.
그러나 매월 山東의 對岸으로부터 2千,2千 구름때가티 모라 건너오는 청바지의 고력은 뉘목숨을 빼아서 가는가 이것의 대책을 강구해 보기는 고사하고 전자 2,3의 영리단체는 아즉도 선천적 인습을 타파치 못함인지 輕燥浮薄한 현 사회의 행동을 咀呪함인지 이러케만 하는 것이 穩健分子의 일인지 그까지는 알 것 업스나 엇더튼지 그냥 資閥의 턱밋헤서 卬頭屈從하는 소수 蠻性兒들의 軋轢은 각조의 통일을 결하야 資本跋扈의 기세를 조장할 뿐 아니라 더구나 신생을 맛보랴는 무산급 다수의 전로에는 暗礁가 거듭하야 간혹 이것을 항소하고 개성의 자유를 볼으짓는 자도 잇스나 그 반면에는 꿈쩍하면 당장 밥줄이 끈어질가 기우하는 졸장부도 적지 안은 데다가 따라서 萬里同風, 四海一室의 大襟을 披瀝하야 각조의 기반을 움즉여야 할 중책을 질머진 총동맹은 그들의 활동력이 미미한 데야 엇지 하랴. 아아 중심을 못찻고 헤매이는 仁川1萬의 무산자-장차 어듸로<59> 귀의할고!
空殼만 남은 物産消費組合
『내것은 내가 차자야 한다』는 己未運動의 만세소리도 어지간 하얏다만은 「내 살림 내것으로」 사라보자는 朝鮮物産獎勵를 불으짓든 소리도 무엇보담 못하지 안엇다. 이러는 바람에 자라 보고 놀낸 놈이 솟뚜껑보고 놀내는 세음으로 이것이 中國이나 印度에서 구경하든 「뽀이코드」나 「비폭력 무저항주의」나 안인가 하야 一時는 一邊의 신경을 過敏케 하든 것이 엇지 엇지하다가 흐지부지 쥐도새도 모르게 제물에 살짝 녹아버렷는지 어제까지 불덩이가티 뜨겁든 가슴은 어느덧 어름짱이 되야 요사이는 아조 숨소리도 들어볼 수가 업게 되얏다. 그리하야 이 아해 작난가튼 꼴을 방관하든 그네들은 『이놈들아 너이가 석달을 담배를 끈으면 우리는 3년을 밥을 안먹겟다』하야 처음에는 두눈이 휘둥그러지든 자들로서 이제는 도리어 큰 소리로 嘲笑千萬이다.
그러나 仁川이야 설마 그러랴... 하얏든 것이 설마가 사람을 속임인가. 토산애용 제창의 急先鋒이라는 소위 仁川 유지 722명은 客年 3월에 朝鮮物産 消費組合을 발기하야 總股數 3,000股, 자본금 30,000원으로 사업에 착수하얏섯다. 놀내지 마러라. 달이 가고 해가 거듭함도 불구하고 발서 棄權者가 617명이 생기어 불입금 3640원은 영업비의 절반에 불과하야 결국 약 1개년간의 성적은 당기 순익금 1,507원 53전, 당기 總損金 4830원 81전 差引殘高 3323원 28전이 당기의 순손실이라 한다.
그리고 참말 귀맥히고 요절할 일이 잇다. 유권 股主 105인 중에는 艱難의 주림을 참고 참아 다만 義憤적으로 赤誠을 기우린 부녀가 적지 안타. 귀염 못 밧는 기다른 간판만 질머지고 오라는 데 업시 이집 저집으로 도라단니는 이 조합의 慘狀은 설상가상으로 이 娘子軍의 돌격을 밧아 목하 조합의 간부들은 하로 두번 꽁문이가 빠질 지경이다만은 이것에 턱 끗만한 동정은 고사하고 도리어 물건너 편일가티 仇讎視하는 자도 만타고 한다.
이것이 仁川有志들의 할 일이냐? 이것이 살길을 찻는다는 최선의 행위이냐? 나날이 줄어들어가는 乃祖乃父의 遺傳庄土는 뉘의 차지가 되며 殘喘을 한울에 븟치고 嗷嗷하는 涸轍의 魚子가 그대들의 자식임을 아느냐? 모르느냐? 눈물이 업고 피땀도 업는 목석이 아니어든 정녕코 一番 추풍에 悔心이 생길 날이 잇스리라!!!<60>
1門內에서 활동하는 六組合
物産客主組合
港町 中央에 웃뚝 소슨 宏傑한 건물의 門楣에는 金光이 혁혁한 간판이 인접하얏다.
그 개중의 하나 되는 이 조합은 仁港내 물산매매 及 수탁업자를 지도 又는 감독하는 유일의 기관이다. 距今 29년전 丙戌로부터 庚戌까지 전후 14년간은 紳商協會의 일홈으로 객주업은 물론 일반 상공업자의 諮問에 응하는 상업회의소와 다름 업섯고 따라서 全府民의 여론을 좌우하든 중심단체가 되얏섯다 한다. 그러나 변천되야 오는 시세는 이 기관의 改新을 촉진하야 純然한 객주업자의 공익기관인 客主團合所로 조직을 변하얏다가 다시 距今 7년전부터 금일까지 現조직하에서 제조사 及 통계, 조합원간 取引上 紛議의 중재, 勞資協同의 幹旋 등 업무가 적지 안타 한다.
米商組合
이 조합은 仁港내에서 正租로써 현미를 만드는 朝鮮人 籾摺 업자들의 紏合된 단체이다. 창립 이래 10년동안에 內로는 동업자간의 친선을 힘쓰고 外로는 상대되는 단체와 대립하야 조합원 각자의 영업상 향상발전에 노력한 결과 매년 造米의 성적은 수십만石에 달하얏다 한다. 재작년에는 224680叺, 작년에는 35399叺, 이러케 전진적인 호황을 보게 됨은 실로 이 조합의 증진된 공동의 福利라고 讚賞치 아니치 못하겟다.
消費組合
이 조합은 朝鮮物産消費組合과 판이한 籾摺土臼 제조판매의 영업을 목적으로 한 조합이다. 종래 仁港內의 籾摺업자 전부의 사용하든 籾摺土臼 及 부속기구는 日本人의 제조품을 전용하얏다. 품질이 저열하거나 가격이 高騰하거나 무엇이 엇더커나 도모지 容喙할 여지가 업시 그냥 사 쓰는 것만 유일의 길로 알고 눈뜬 장님의 행세를 하야 오든 것을 一朝이 조합의 설립됨으로부터는 一手제조판매의 專權을 장악하고 이제는 自作自給의 途程을 지나서 一轉하야 역수출의 신기운을 촉진한다. 목하 柳町공장에는 11인의 작업자가 잇서서 년 5,000여개의 土臼를 제조하야 판매고가 적어도 20,000여원에 달한다 함은 仁川의 復活 아니 전 朝鮮부활의 전조임을 확증함이다.
勤業所
이 기관은 곡물조합 及 객주조합을 통하야 수요와 공급의 便을 도아주는 중개업을 위주하는 團合所이다. 本所는 栗木里에 출장소는 港町에 두고 업무를 확장하야 所員 일반의 협동을 장려하며 각지로부터 모여드는 구직자를 위하야 社會奉仕적 성의를 曲盡함은 누구나<61> 鳴謝할 일이다.
穀物協會
이 협회는 距今 16년전에 창설된 日本人의 단체이다. 최초 이 단체가 생겨난 동기는 朝鮮人側은 오래전부터 紳商협회가 잇서 仁川 穀物取引界의 中樞가 되얏스나 日本人측으로는 각개의 取引으로 하야 시세의 불통일은 물론 그 受渡上에도 서로 紛議가 백출하야 朝鮮商人의 세력 대 항상 불리함을 깨달은 결과라 한다. 爾來 37명의 유력자가 손을 잡아 일반 朝鮮人 穀商을 상대로 하야 항상 買方의 지위에 처하는 일방으론 鮮內각지로부터 산떰이 가티 廻着하는 米穀을 日本 大阪등지에 수출하는 등 그들의 활동기세는 매우 맹렬하다.
精米業組合
이 조합은 日本人의 정백미 제조정업자들의 조합된 단체로 목하 12명의 유력한 조합원이 잇다. 조합원 사이의 친목과 이익을 力圖함은 물론 日本의 大阪미곡회를 대치하야 일단 彼方으로부터 不利를 가할 時는 일치단결하야 대항한다 하는 것이 그들의 組合是라 한다. 정백미 1日 5,500石의 제조능력을 발휘하는 이 조합의 활동이야말로 侮視키 어렵다. 昨年中全鮮産米의 實收高15,213,000石內에서 이들의 손을 것치어 輸移出된 정백미의 수량은 663,668石이나 된다.
天下가 환영하는 三成靴
세계가 엇더케 되야 가는 셈판도 알기 전에 물질문명에만 중독되야 오냐 드려라 먹자, 쓰자, 함부루 冠帶 벳낌을 하는 바람에 洋靴가 乾油鞋를 모라내고 고무화가 木履草鞋를 파멸하야 이러케 急潮로 가장 먼저 경제의 파괴를 당하는 것은 朝鮮履物이 다 일즉이 이것을 痛切이 늣긴 李盛園군은 勤勤孜孜 이것의 대책을 강구하기에 고심한 결과 距今 19년전에 비로소 경제화를 발명한 이래 경제화로부터 耐久靴 耐久靴로부터 三成靴 참말로 着着 질서잇는 정력적 개량을 거듭하야 도처의 열광적 환영을 밧아 왓다.
종래 각종 화에 비하야 이 三成靴의 특수한 점은 첫재 靴底縫目의 破綻을 방지하는 堅緻한 ㄷ字形의 釘鐵을 사용하고, 둘재는 靴底와 靴의 전후에 强柔竝用의 輕便한 고무 심판을 접착하야 아모리 濫用할지라도 躡挫의 弊와 兩濕의 苦를 밧을 기우가 업다. 이가티 품질이 견실한 이상 더구나 破天荒의 廉價임은 도리여 買方의 경이를 산다.
그리햐야 한번 이 三成靴를 구경한 고객은 너나할 것 업시 「우리는 靴界에 李군가튼 명성이 몃분이나 되는가」하야 서로 닷토아 敬賀치 안는 이가 업다.
雜同散異의 形形色色<62>
仁川은 惡川?
군자는 반다시 仁里를 택하야 居한다는데 仁川은 이와 반대로 연애소설이나 유행잡가한 卷도 사볼 만한 冊肆 한 곳이 업고, 돈이라면 목숨을 내기하야 玉이야 金이야 하든 제 자식까지 倭油桶에 오좀을 싸게 하는 守錢奴, 이 골목 저 골목 백주대로에서 산 사람의 눈깔이라도 뽑아 먹을 수만 잇스면 들어덤비어 보랴고 껄떡껄떡하는 고리대금의 아귀쟁이들의 跋扈하는 꼴을 보고는 참말 大學目藥을 찻기에 겨를이 업슬 모양이다.
今日 忠淸 明日 慶尙
한번 仁港으로 차자 들어오는 사람이면 십상 8,9나 걸풋하면 「제발 발꿈치에 헌듸만 나지 마라든만 벌면 달아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러지 개항이래 개정한 생활로 본사를 守護하야 제법 남과 가티 살아보아야 하겟다는 고물도 얼마가 못되야 보임은 물론 소위 여관업자 조합장의 경영으로 정문압헤 其同便所를 지노코틴 염치업시 영업광고를 대행하는 仁川 1의 OO여관은 그야말로 「앗다. 이것이 이 따위 仁川서 집팡막대집고 해먹을 노름이냐」하는 것처럼 늣기게 한다.
壯士無顔色
한쪽으로 피를 빨니고 한쪽으로 骨湯을 먹어 가면서도 사는 날까지 힘써 보자는 피끌는 결심으로써 다 破傷되야 가는 교육기관을 븟들어 보자 기타 사회사업도 우리가 아니면 뉘가 해보랴 하야 무엇에나 조곰 도음이 잇슬가 하고 뽈조아를 차자 간다. 그러나 압문에서 붙으면 뒷문으로 빠저 36계를 부르는 變, 학질쟁이는 아니언만은 三伏炎蒸에도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똥구먹으로 숨을 쉬는 그들의 꼴은 참말 **白痴라도 抱腹絶倒케 한다. 그래도 이 압헤서는 하는 수 업시 머리를 숙으리고 一拜二拜 그들의 아니꺼운 성미를 맛추어 최후까지 애쓰는 무산 청년들은 상면할 적마다 뜨거운 同情淚를 거들 수 업다. 그리고 엇던 木枕 가튼 뿔조아는 5分銅을 吝惜하야 문전 乞兒더러 「야, 나는 너보담 더 죽을 지경이다」하더라.
멕국먹은 殖産社
仁川 殖産社라면 고리대금업의 한목을 톡톡이 보든 기관으로 지나간 5월 28일 돌연 해산을 선언하얏다. 남이야 고리대금을 하든지 말든지 본래 그 자체가 무슨 짓을 하야서라도 돈모아야 한다는 것이 목적인 바에야 두말 할 필요가 업다... 만은 적어도 仁川의 有數하다는 200여명의 집단으로서 幾개인의 일시적 感情의 충돌로 燎原의 火를 일으키어 존립기의 반풍상을 격거온 역사를 가진 저축기관요만 것이나마 속점업시 매장하야 버린다. 이것이 朝鮮人된 우리의 할 일인가? 아아. 손톱 곰긴 즐만 아는 인간을 저주하는 今日!<63> 개벽 50호 1924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