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옛모습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안 창남

형과니 2023. 6. 20. 00:12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안 창남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1-07-02 11:07:13

 

空中에서 본 京城仁川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安昌男

 

 

京城의 한울! 京城의 한울!

내가 어떠케 몹시 그리워 햇는지 모르는 京城의 한울! 이 한울에 내 몸을 날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엇습니다.

 

京城이 아모리 작은 市街라 합시다. 아모리 보잘 것 업는 도시라 합시다. 그러나 내 고국의 서울이 아닙니까. 우리의 도시가 아니입니까.

 

장차 크게 넓게 할 수 잇는 우리의 도시, 또 그리할 사람이 움즉이고 자라고 잇는 이 京城 그 한울에 비행기가 나르기는 결코 1,2차가 아니엇슬 것이나 그 비행은 우리에게 대한 어떤 의미로의 侮辱, 아니면 어떤 는 일종 위협의 의미까지를 뛴 것이엇섯습니다.

 

그랫더니 이번에 잘하나 못하나 우리끼리가 깃버하고 우리끼리가 반가워하는 중에 우리끼리의 한몸으로 내가 날을 수 잇게 된 것을 나는 더할 수 업시 유쾌히 생각하엿습니다.

 

참으로 일본서 비행할 때마다 機頭西天으로 향하고 보이지도 안는 이 京城을 바라보고 오고 십흔 마음에 가슴을 뛰노이면서 몃번이나 눈물을 지웟는지 아지 못합니다.

 

아아, 京城의 한울! 어느 때고 내 몸을 따뜻이 안어줄 내 京城의 한울! 그립고 그립든 京城의 한울에 내 몸을 날리울 때의 깃븐과 감격은 일생을 두고 니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이번 仁川의 방문을 무사히 마추게까지 만히 주선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여러분의 후하신 정을 영구히 니치지 못하겟습니다.

 

京城 방문의 , 1210일은 의외에 日氣가 차서 이번의 불완전한 (防寒의 준비도 업는) 비행기로는 도저히 비행할 수 업는 일이엇스나 그래도 날라본다고 南大門 위를 넘어 光化門 위까지는 왓스나 北岳山에서 나리질리는 바람에 비행기가 으로 으로 흘르면서 기계는 얼어 프로페라가 돌지를 아니하게 되어 기체는 중심을 닐코 좌우로 기웃둥 기웃둥 흔들리면서 그냥 낙하될 듯한 위험한 형세임으로 어찌하는 수 업시 급히 京城市街西半1하고 곳 如意島로 돌아왓습니다.

 

2, 13일은 전날밤에 늣게야 여관에 돌아와 피곤히 자다가 이날 일기가 저윽이 눅어젓단 말을 듯고 곳 일어나 이날 오후에 京城 방문과 仁川 방문을 하기로 결정하엿습니다.

 

오후 세 시에 如意島를 떠날 예정이엇스나 기계고장으로 한 시간 이상이나 느저서 京城을 향하고 비행장을 이륙하기는 410분이엇습니다.

 

비행장에서 1,100 米突 이상을 놉직히 뜨니까 벌서 京城은 들여다 보엿습니다. 뒤미처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南大門이엇습니다. 아모때 보아도 南大門은 서울의 출입구 가타서 반가운 정이 소사나지마는 비행기 위에서는 아믈아믈한 시가 중에 제일 먼저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東大門南大門이라 南大門이 눈에 보일 때 나는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아들을 대문 열어노코 기다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 가티 오오 京城!하고 소래치고 십게까지 반가웟습니다.

 

비행기 위에서 깃븜에 뛰노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쓰면서 나는 먼저 龍山 停車場南大門 停車場의 사이를 비슷이 지나 萬里()를 넘어 孔德里麻浦 방면을 한발 휘휘 돌앗습니다.

 

漢江의 물줄기는 땅에서 보든 몃갑절이나 푸르게 보여 위에서 넓다라케 내려다 보기에는 그야말로 빗고흔 남색의 비단 허리띄를 내던저 노흔 것 갓고 그 갓으로91西江岸 孔德里에 니르기까지에 군데군데 노혀 잇는 초가집은 겨을에 말른() 잔듸가티 보여서 (미안한 말슴이나 사실대로 숨기지 말고 쓰라면) 마치 떼 말른 무덤(墳塚)이 도둑도둑 노허 잇는 것 가티 보엿습니다. 우리의 주택이 墳塚가티 보인다는 것은 말하기에도 滋味롭지 못한 일이나 몹시 급한 속력으로 지나가면서 흘깃 나려다 보기에는 언뜻 그러케 보일밧게 업섯습니다.

 

그리고 孔德里 우를 지날 때에는 멀리 獨立門 舞鶴峴 넘어 洪濟院 시내(의 모래밧까지 보이는데 그곳은 내가 普通學校에 다닐 때에 운동연습으로 또는 遠足會로 자조 갓든 곳이라 마음에 그윽히 반가웟섯습니다.

 

거긔서 京義線 철로의 중간을 끈코 새문 밧 金華山 부근의 한울에서 나 어릴 때의 세월을 보내던 渼洞普通學校의 불타고 업서진 넷 터나마 살피려 하엿스나 그 부근에 신건축이 만흔 탓인지 얼른 차즐 수 업섯습니다. 여긔서 바로 또렷이 보이는 것은 慕華舘 舞鶴재 고개와 그 압헤 서 잇는 獨立門이엇습니다. 獨立門은 몹시도 쓸쓸해 보엿고 舞鶴재 고개에는 흰옷 입은 사람이 꼬믈꼬믈 올라가고 잇는것까지 보엿습니다.

 

그냥 지나가기가 섭섭하야 비행기의 머리를 족음 틀어 獨立門의 위까지 떠가서 한발 휘휘 돌앗습니다. 獨立門 위에 떳슬 때 西大門 감옥에서도 자기네 머리 우에 뜬 것으로 보엿슬 것이지마는 가처 잇는 형제의 몃사람이나 거긔까지 차저간 내 뜻과 내 몸을 보아주엇슬는지... 붉은 놉흔 담 밧게서 보기에는 두렵고 흉하기만 한 이 감옥이 공중에서 나려다 보기에는 붉은 담에 에워싸힌 빗누른 마당에 햇빗만 혼자 비추고 잇는 것이 어떠케 형용할 수 업시 한업시 쓸쓸하여 보일 뿐이엇습니다. 어떠케나 지내십니까.하고 공중에서라도 소리치고 십헛스나 어떠케 하는 수 업시 그냥 돌아섯습니다.

 

돌아서면서 거긔는 平洞, 冷洞, 監營 네 거리의 一版이 벌어저 잇는데 監營 네거리에 흰옷 닙은 한 떼의 사람이 몰켜 서 잇는 것을 보앗고 석냥갑(燐寸匣) 가튼 전차가 병난 작난감 가티 느리게 땅바닥에 배를 다이고 기여가는 것이 흘깃 보이더니 그 전차길 엽 개와집웅에 에워싸힌 목판가튼 마당에 울긋불긋 깜을깜을 하는 것은 아마도 京城女子普通學校와 또 그 한집에 잇는 내 모교 渼洞普通學校인가 보다 하엿습니다.

 

渼洞學校는 어적게 저녁에 내가 그 마당에 초대바다 가서 지금 눈에 나려다보이는 저 학생들과 이않이 하든 곳이요 그 엽헤 平洞은 내 출생지이라 아지못할 친한 정과 반가운 마음이 샘솟듯 하야 이 一版의 상공에서 才操를 두 번 훌훌 넘엇습니다. 여긔서 才操 넘은 것도 보이기는 京城市街 전체에서 모다 보엿슬 것입니다.

 

 

이러케 하야 내 출생지인 새밧게 거주하시는 여러분과 또 나를 길려준 내 모교에 경의와 정을 표하고 곳 興化門 夜珠峴, 唐珠洞을 살가티 지나 景福宮 넷 대궐을 나려다 보앗습니다. 검으테테한 北岳山 미테 입口字처럼 둘러싼 담 안의 넓기나 넓은 넷 대궐은 우거진 잡초에 덥혀버린 집 가티 사람 하나도 보이지 안코 몹시도 한산하고 쓸쓸하여 보엿습니다.

 

거긔서 바로 昌德宮을 향하고 安洞 네거리 별궁 위 東亞日報社 부근의 공중을 스쳐 모로 노힌 ㄱ字 形으로 보이는 천도교당과 徽文義塾을 지나 검푸른 樹林 속에 집웅만 보이는 昌德宮의 위에서 한발 휘휘 돌아 공중에서 경의를 표하엿습니다. 京城 시민 여러븐에게 들인 인사의 종히는 바람에 불려서 남으로 불려갈 생각을 하고 이 북을 오는 동안에 다섯 번인가 여섯 번에 별려서 내리털엿스나 만히 집어 읽으실 수 잇섯는지 모르겟습니다.

 

 

昌德宮 방문을 마치고 나는 곳 宗廟의 깁흔 樹林을 엽흐로 엿보면서 니어 昌慶苑(동물원)樹林總督府病院을 엽흐로 보고 東小門 밧게 눈싸힌 遠山까지 내려다 보면서 東大門 위로 지나 淸凉里 줄버들과 安巖洞, 牛耳洞 가는 되넘이 고개까지 往十里의 거리까지 그 넘어 漢江 뚝섬인 듯한 것까지 보면서 기체는 東大門에서 光熙門으로 지나 다시 꺽기어 黃金町通으로 곳게 南大門을 향하고 돌진하엿습니다. 黃金町街路 위를 지나도 진고개에서 보기에는 자기 머리위를 지나간 것으로 보앗슬 것입니다.

 

東洋拓殖會社 집을 보앗슬 때 新文舘 위가 여긔엇슬 것을 알앗고 이름만 남은 德壽宮每日申報 회색집을 엽흐로 보면서 南大門 위를 돌앗습니다.

 

 

南大門에서 다시 자리 우으로 새문 밧글 돌아 다시 光化門 압흐로 돌아 鍾路 네거리의 공중으로 왓습니다. 여긔가 얼른 말하면 京城 시가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잇는 곳인 까닭이엇습니다. , 東大門, 南大門, 典洞길이 모다 이 복판으로 모여와 잇서서 석냥갑 가튼 전차 여러 개가 긔어가는 것이 보엿습니다. 光熙門通黃金町, 南大門에서 光化門까지의 길, 校洞, 昌德宮 압길, 동물원길, 彰義門길 거의 어느길 아니 보이는 곳이 업섯고 어느 큰 집이나 어느 작은 집이나 아니 보이는 집이 업섯습니다.

 

여긔서 나려다 보이기에는 南村日人村이라고는 진고개길 좌우엽 뿐인 것 가티 보엿고 京城 전체의 形容은 얼른 보기에 鍾路通黃金町通의 시컴한 개와집 큰 이 몸이 되고 갓으로 南北村으로 쭉쭉 버든 가옥의 줄기가 마치 무슨 큰 검의(蛛蜘)의 발 달닌 것 가티 보엿습니다. 그런가 하고 北門(彰義門)쪽의 거리를 보면 무슨 짐승의 꼬리 가티도 보엿습니다.

여긔가 鍾路 鍾閣의 위이고 京城의 복판인가고 생각한 나는 여긔서 재조를 두 번이나 넘고 거듭처 제일 어려운 橫轉曲乘을 두 차레나 하엿습니다. 여긔서 넘은 才操京城 시내의 대개의 집에서는 자기 각각 자기집웅 위에서 才操를 넘은 것으로 보엿슬 것입니다.

 

鍾路 위에서 이러케 여러분께 경의와 정을 표하고 나서 나는 곳 다시 昌德宮 압흐로 돌아 東大門으로 가다가 중간에서 才操를 두 번 넘고 뒤니어 송곳질(송굿 부비듯 뱅뱅 돌면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曲乘飛行을 하엿습니다. 이것은 東大門 부근(內外)의 여러분이 자세 못 보신 이가 계실 듯이 생각된 까닭이엇습니다.

 

이러케 하얏스면 이제 京城訪問 비행의 뜻은 니루엇스리라 생각하고 나는 곳 거긔서 黃金町으로 鍾路光化門으로 昌德宮으로 크게 원을 그리어 빙그를 돌고는 西大門 밧그로 나가서 南大門 밧그로 如意島로 돌아왓습니다.

거긔서는 모든 사람이 치위에 떨면서 걱정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주고 잇섯습니다.

 

여긔까지 읽어오신 독자께서는 그間 麻浦孔德里獨立門으로 들러 京城市中3,4회나 휘도는 동안이 퍽 시간이 오래엿슬줄 짐작하실 것이나 실상은 이상 기록대로의 비행에 걸린 시간은 겨우 11이엇습니다.

 

仁川行!

仁川을 가야겟는데 시간이 넘우 느저서 해는 저믈기 시작하고 일기는 점점 차오고 곤란이 거듭처 와서 불안이 적지 아니하엿스나 일전에 못가게 되어 어쩌지 못할 일기의 탓이라고는 하나 仁川의 시민 여러분미안하기 그지업서 밤이 되드래도 갓다오겟노라 하고 424분에 다시 如意島 마당을 떠나서 떨어지는 해를 쪼츨 듯이 西便으로 西便으로 갓습니다.

 

부끄러운 말슴이나 나는 이제껏 仁川을 가본 일이 업섯습니다. 비행기로 못갓슬 뿐 라 기차로도 보행으로도 가본 일이 업섯습니다. 京釜線 京義線 방면으로만 몃 곳 가본 일이 잇슬 뿐이엇습니다.

 

하는 수 업시 나침도 업시 그냥 지도만으로 방향을 대강 짐작하고 西으로 西으로만 갓습니다.

공중에서 두리번 두리번 하면서 차저가는 중에원래 족으마하나마 시가가 잇는 곳에는 반듯이 그 공중에 연기 갓기도 하고 안개 갓기도 한 것이 뽀야케 떠서 시가를 덥고 잇는 것이라. 나는 그냥 그것이 눈에 뜨이기만 기다리면서 갈 뿐이엇습니다.

 

그러나 십수분이면 넉넉히 갈 곳인데 15분이 되도록 아는 수가 업서서 적지 아니한 불안한 마음이 생기게 되자 언뜻 그것을 발견할 때에 어떠케도 나는 반가웟는지 아지 못합니다.

 

仁川!비행기 위에서 혼자 소리치면서 그야말로 뛰는 중에도 뛰여갈 듯이 달려갓습니다.

처음 보는 시가이니까 洞名도 무엇도 자세히 알 수 업스나 測候所 넘어 공설운동장에 모어 잇겟스니 거긔서 저공비행을 하여 달라는 말슴을 일전에 들엇섯는 고로 그럴듯한 마당을 차저 나려다 보니까 별로 만히 모여 잇지도 아니한 모양이라. 짐작컨대 일전에도 온다 하엿다가 못 왓섯고 오늘도 온다고만 하고 오기가 느즌 고로 또 낙망하고 헤여지신 것 가태서 어도 몹시 미안하엿는지 아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긔서는 몹시 더할 수 업시 얏게 떠서 저공비행으로 仁川의 시가를 바다 위까지 휘돌아 두 번을 휘돌앗습니다.

 

仁川서는 200米突의 저공비행을 하엿슴으로 시가 길거리에 모여 서서 처다보고 손벽을 치는 모양까지 자세히 보엿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온 것을 알고 공설운동장에 니르는 세 갈래 신작로로 다름박질하면서 모여드는 것까지 보여서 나는 그것을 보고 반갑고 깃거운 미소를 금치 못하엿습니다.

 

해는 바다 저 편으로 기울어지기를 시작하는데 돌아갈 길이 급한 것도 니저버리고 나는 거긔서 高等飛行術을 여러가지로 하야 仁川 여러분이 되도록 만족히 보시게 하고 나서 다시 시가의 위를 두 번 돌면서 가지고 간 종히를 뿌려 경의를 다하야 인사를 들리고 돌아서서 如義島로 돌아와 착륙할 때는 저윽이 날이 저믄 때엿습니다.

가기에 17분 쯤, 오기에는 14, 전부에 35분 쯤 쓴 것이엇습니다.

 

다행히 이러케 京城仁川의 비행은 무사히 마첫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쓰기는 공중에서는 京城이나 仁川이 어떠케 보이는지 그것을 쓰려 하엿스나 그것은 허사인 것 갓습니다. 누구든지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최초의 비행시에는 물론 알에가 잘 자세 보이지 아니하고 그냥 아믈아믈할 뿐이어서 어대가 어댄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이 보는 바 京城仁川은 더 滋味잇게 별스럽게 보엿슬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번 타기를 거듭하야 비행이 익숙하여 갈스록 점점 놉히 뜬대도 그다지 별스럽게 보이지 아니하고 시가의 형편을 잘 알 수 잇게 되는 것입니다.

 

나 역시 여러번 타노하서 京城이나 仁川이나 어느 시가나 바다나 광야나 그리 알아보기 어렵지도 아니하고 별스럽게 보이지도 아니합니다. 그래서 이것도 바라시는 바와 가티 그러케 별스럽거나 滋味잇게는 되지 못하엿습니다.

 

다만 알아들으시기 쉽게 한말슴으로 하자면 京城이나 仁川의 시가가 마치 어느 박람회나 共進會出品으로 모형을 떠노흔 것을 보는 것 가틀 뿐입니다.

 

그리고 京城은 일본 東京보다 좁기는 하나마 몹시도 깨끗하고 어여뻐 보엿습니다.

 

하여튼가 京仁訪問飛行을 무사히 마추기까지 가지가지로 주선하시고 도와주신 여러분과 또 더할 수 업시 따뜻한 정으로 나를 안어주시다십히 성원해주신 두 곳 시민 여러분 어른께 마음을 다하야 감사한 말슴을 들입니다.

 

또 여러 어른이 그처럼 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시는 것을 속깁히 간직하야 바다 내 일생에 내 힘과 내 몸이 다하기까지 이 사업에 노력할 일을 盟誓합니다.

 

최후에 平壤大邱와 기타 여러 곳에서 기다려주시든 형제께 미안미안한 말슴을 올닙이다. 비록 人力으로 奈何치 못할 天氣의 관계로 인함이나마 가려든 곳 기다려주시는 여러분께 가서 뵈옵지 못하고 가는 것이 어떠케나 섭섭한지 아지 못합니다.

 

마음대로 하랴면 방방곡곡이 다니면서 한곳에라도 더 형제를 차즈려 하엿스나 비행장 관계로 그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큰 유감이엇섯든 터에 平壤이나 大邱天氣危險으로가 아니라 비행기만 조코 방한구만 잇스면 갈 수 잇는 것을 한낫 비행기가 불완전하야 가지 못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기다려주시든 여러분보다도 내가 어떠케 痛憤한지 아지 못합니다.

 

하는 수 업습니다. 비행기만 조흔 것을 어들 수 잇스면 오는 봄에는 東京서부터 비행하야 義州까지 다녀 갈 수 잇는 보람을 말슴해 두고 뛰ㅅ날을 기약하고 나는 돌아갑니다. 떨어지기 실흔 고국을 또 떠나서 나는 갑니다. 다시 맛나 뵈올 때까지 內地에 계신 여러 어른의 건강을 빌면서 나는 갑니다. 개벽 3119231

 

 

비행사 안창남/인천이야기

 

[인천] 인천이야기 / 비행사 안창남

 

어린 시절 내용도 모르고 불렀던 노래에 이런 것이 있었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보아라, 엄복동 자전차-' 2줄의 민요조 가락이었는데,

그 노래의 참뜻은 커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게 꿈만 같던 때에,

그것도 일본인보다 월등한 실력으로 조선 최초의 비행사가 된 안창남(安昌男)

문자 그대로 '국민 영웅'이었다.

 

소학교 때 외국인들의 시범 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휘문고보 중퇴 후,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당당하게 비행사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1922년 그의 노고를 기리고자 '안창남 군 고국 방문 후원회'가 비행회를 개최했다.

그해 122, 요코하마에서 보낸 비행기 '금강호'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안창남은 이를 여의도 항공대로 옮겨 며칠 동안 조립에 착수했다.

 

조립을 끝낸 5일 이후, 각급 사회 단체가 연일 열렬한 환영식을 마련했다.

8일 서울 시범 비행에 이어 9일에는 인천 방문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불어 10일 예정이던 비행은 중지되었다.

 

13일 오후 423분 경, 마침내 안창남은 역사적인 인천행 비행에 나섰다.

443분 인천에 도착해 저공 비행을 하며

'공중에서 인천 시민에게 고한다.'라고 적힌 오색 선전지 수천 장을 뿌렸다.

 

그는 1923'개벽' 지에 실린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이란 글에서 이렇게 전했다.

"- 인천!, 비행기 위에서 혼자 소리치면서 나는 그야말로 뛰는 중에도 뛰어갈 듯 달려갔습니다...

길거리에서 모여 서서 비행기를 쳐다보고 손뼉을 치는 모양과...

공설운동장으로 난 세 갈래 신작로를 달음질하면서 모여드는 것까지 보여서

반갑고 기꺼운 미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나는 고등 비행술 여러 가지를 하여 인천 여러분이 되도록 만족히 보시게 했습니다.

다시 시가 위를 두 번 돌면서 가지고 간 종이(선전지)를 뿌려 경의를 다하여

인사를 올리고 돌아서서 여의도에 착륙할 때는 날이 저문 때였습니다."

 

폭죽을 터뜨려 환영의 뜻을 표했던 부민들에게는 큰 긍지와 감명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안창남은 1925년 중국 망명 후,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 등

항일 투쟁에 나섰으나 19304월 불의의 사고로 추락해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오늘 저 세상 하늘에서 인천국제공항의 웅자를 내려보신다면,

그 상전벽해를 크게 기꺼워하실 것만 같다.

 

( 조우성 광성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