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달공 김옥균 선생
충달공 김옥균 선생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1-07-02 12:11:05
忠達公 金玉均 先生 (충달공 김옥균 선생)
개인주의와 떼모크라시가 盛傳하는 근일에 在하야 영웅 운운의 소리는 끈칠만도 하다. 그러니 그런 것 갓지도 안이하며 영웅(이하 위인이라 개칭함)을 요구하는 聲은 四面에서 더욱 高하는 듯 하도다. 위인이란 암만 하야도 아조 제외할 수는 업는 樣이다. 盖偉人이란 인생의 首領으로 일반민중의 필경에는 필히 成할, 혹은 도달할 무엇을 제시하는 우리오 模型儀表ㅡ 更言하면 일종의 創造家를 云함이니 或國家或民族의 質量은 그의 有無로 인하야 重輕되며 尙一般人衆은 그에 近하며 仰함으로 由하야 靈感을 得하며 光明을 認하나니 或民族으로서 自家歷史 중에 그리할만한 偉人이 업다 하며 又有하다 할지라도 그 민족 스스로가 매장하고 발견치 안이하면 그 얼마나 슯흐고 嘶膓할 일이리오. 금일의 우리는 위인의 출현을 심히 요구하도다. 그 影子라도 대하얏스면 하도다. 그러나 일반은 아즉 그를 발견치 못하얏도다. 세간의 보통 위인이 無함은 안이나 그네로써 우리의 慕仰의 표적을 삼기에는 넘우 섭섭하도다. 우리 동포 중에 특히 금일 우리의 懿範이 되기에 족한 或偉人을 발견한다 하면 그 다행히 果如何할가 이제 우리 일부가 욕하고 씻고 처뭇고 스스로 이즌 쳬 하던 조선근대의 最大産物ㅡ 안이 세계적 위인ㅡ 金玉均 선생을 감히 소개하노니 完全不完全은 기자가 그 責을 자부하려니와 형제들이어 爲先 각자의 거룩한 침묵과 뜨거운 느낌으로써 선생의 聖跡과 偉格을 沈思熱想함이 有할지어다.
김옥균 초상
先生의 出生과 그 官歷
距金 69년전 辛亥 正月 23일 忠淸南道 天安 安東金門의 某家에 呱呱의 聲을 出한 一馨香兒가 有하얏스니 그 父-그의 眉目이 玉가티 淸秀함을 愛하야 仍히 玉均이라<41> 賜名하얏더라. 可言할 處의 傳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2세에 능히 語를 解하며 3세에 능히 부모의 對話者가 되어 일가의 총애는 專혀 그의 身에 集注하엿스며 6,7세가 되어 隣家兒와 교류를 試함에 及하야는 그 어린兒의 일이나 同侔에 대한 사랑의 정이 別로 濃하며 웃으운 말 한 마대라도 퍽 滋味잇게 정답게 하야 그 부근의 幼少年은 그를 떠이다 십히 하야 그의 門前에는 항상 市를 成하얏다 한다. 待人接物에 대한 천재는 幼時부터 발휘되엇더라.
何年의 事인지 記할 수는 업스나(10세 內外時인 듯) 선생은 天安의 鄕第를 出하야 京城 花開洞 前郡守 金炳基氏家의 양자가 되며 仍히 京城의 人이 되엇스니 現洞開京城高等普通學校基地는 당년 선생의 주택 所在處이라 한다. 京城에 이주한 선생은 양친의 지도하에 古漢學을 修하얏는데 그의 英勃한 才氣는 觸處에 발휘되어 修學末幾에 곳 詩와 文을 능히 하며 또 書에 長하야 見者聞者ㅡ 皆呆然할 而已이엇스며 年纔弱冠에 直히 試果에 응하야 龍門의 第一天을 射하얏스며 連하야 玉堂의 榮冠을 慱하매 그의 文名은 當世를 驚動하야 선생은 旣히 花開洞中의 凡夫가 안이엇다. 桃李開處에 蹊逕自成이오 現龍在田에 雲雨必施라 선생의 거룩이엇지 그에 뿐 止하리요. 遂히 當世의 偉傑 大院翁의 知한 바 되어 일약 吏曹叅議의 요직에 就하니 當年이 실로 19세ㅡ비록 1인의 애증으로 인하야 或一人의 龍猪를 決하는 당시의 事이라 할지라도 과연 可驚할 事가 안인가. 선생은 그 후 累進하야 吏曹叅判을 經하야 26세의 時는 戶曹判書의 印綬를 佩하얏더라.
朝鮮政界의 混沌과 先生의 奮起
世間社會에는 언제던지 무슨 조류가 流하는 것이니 그 조류의 추이를 明察하며 그에 순응하야 가히 乘할 時에 乘하는 者는 榮하며 興할 것이오. 그러치 못하는 者는 枯하며 망할 것이라. 窃唯컨대 19세기 하반기에 在한 구미 세력의 向東決潰는 동양인에게 대한 一大潮流ㅡ 안이 一大荒流이엇나니 試思하라. 此荒流로 인하야 國이 漂하고 민족이 替한 자ㅡ 실로 幾何인가. 幸히 일본이 此流에 乘하야 維新의 鴻業을 완성하얏스며 支那가 躕躇末決하야 國恥民辱을 蒙하고 판도가 縮하얏스며 불행 우리 조선은 全혀 그 조류에 乘치 못하야 필경 國을 擧하야 일본과 병합함에 至하얏도다. 讀者諸兄이어 특히 기자의 간청이니 설혹 지리한 감이 有할지라도 去甲子 이래 당시 당국자의 그 조류에 대한 處策을 약술하야 金玉均 선생의 偉行에 及함이 有케 하라.<42>
처음 哲宗이 崩하고 無嗣하매 距今 57년전 癸亥에 興宣君의 子 *를 옹립하야 왕위에 就케 하니 時年이 12임으로 興宣君이 大院君이 되어 庶政을 攝하게 되엇다. 大院君은 意氣ㅡ 壯하고 決行에 長하야 실로 영웅의 소질을 有하얏스나 可惜 식견이란 것이 그에 添치 못하야 그의 집권은 正히 頑兒가 利刀를 執함과 如하얏다.
그의 頑腦는 제일로 쇄국주의를 고집하야 先着手로 천주교도를 학살하고 丙寅에는 佛國 선교사를 殺하야 佛艦 7척이 江華島를 진격하매 此를 격퇴하얏스며 庚午에 米國商船이 大同江을 溯하매 선원을 全혀 擊殺하얏슴으로 그 후 米軍艦 5척이 漢江으로 진군하매 亦 격퇴하얏다.
당시 소위 佛米軍이라 함은 單히 問責 혹은 통상을 목적하야 來함이오 결코 전투를 위하야 來함이 안인 동시에 그 군인수와 무기의 준비가 如何히 些微하얏슬 것은 誰이나 推知할 것이니 是를 칭하야 丙寅洋亂 운운하야 전국이 騷動함과 如함은 실로 可笑할 事이라. 此를 격퇴한 大院君은 米佛全國兵이나 격퇴한 듯이 意氣自揚하야 外人을 輕侮하기 日甚하얏다.
是에 先하야 일본으로서 戊辰 9월(明治元年)에 對馬島守吏 宗重正을 遣來하야 왕정의 復舊를 고하고 국교의 修好를 청하얏는데 그 국서 중에 大日本皇帝라 書한 것이 有함을 見하고 『오즉 중국이 帝號를 用할 뿐이어늘 일본이 焉敢用此乎아』하야 接受를 拒하고 繼하야 東萊 釜山 兩地에 在한 日韓官吏接見을 철폐하매 日庭에서는 遂히 征韓論까지 起하얏스며 그 후 乙亥에 日艦 雲揚號가 우리의 沿岸及支那牛莊 등 處를 측량하고저 仁川 月尾島를 過할새 江華灣에 下泊하고 小艇으로 漢江을 溯하는 중 永宗城의 砲臺는 돌연 此에 포격을 加하매 雲揚號가 응전하야 永宗城을 奪핊�고 東京에 報하니 於是乎(翌年 2월) 일본의 黑田淸隆이 全權大使로 來京하야 先年의 국서거절과 군함포격의 무례를 책하며 修好條約의 체결을 요구하매 大院君의 반대가 여전하야 廷議紛紜하얏스나 此時의 右大臣 朴圭壽 이하 7,8인이 群議를 排하고 開國의 이익을 역설하야 韓日修好條約을 체결하니 소위 江華條約이 是이라. 此條約으로 인하야 조선은 獨立自主邦으로 일본과 평등의 權이 有함을 認하야 종래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斷하고 元山 仁川 2港을 通商埠로 開하기로 하며 (元山은 庚辰年에 仁川은 庚寅年에 開하다) 半島沿海는 일본인의 자유측량에 일임하다.
此江華條約의 성립은 실로 당시 朝鮮政海에 一爆彈을 投한 셈이엇도다. 즉 開國의 이익을 주창한 朴圭壽 측의 승리는<43> 斥洋斥倭로 쇄국주의를 고집하던 大院君 편의 세력소실을 의미함인 바 조선과 중국이 有한 외에 更히 他國이 有함을 不知하며 鎖國弄權의 정책 외에 更히 他事가 有함을 不知하던 당시 정국에 향하야 조선 중국이 有한 외에 更히 일본 기타 외국이 有하며 쇄국주의 이외에 문호개방 新政樹立의 急務가 有함을 奄覺하얏스며 조선의 자주국임을 認하고 일본과 평등의 權이 有함을 認한다는 一條는 昨日까지 正朔을 奉하던 중국과의 문제가 발발하야 잘하나 못하나 제멋대로 놀던 漢城의 政局은 점차 일본 중국 양세력의 각축지가 되엇도다.
그런데 右江華條約 체결되던 시 선생의 年은 旣히 26으로 戶曹判書의 현직에 在하얏다. 如許한 시국을 당하야 苟히 眼이 有하고 耳가 有한 자이면 誰이나 自安치 못하겟거던 而況無形에 見하고 無聲에 聽하는 如神機智를 有한 선생ㅡ 多年 宦海의 亂流에 立하야 탐관오리의 추행과 人心世道의 傷敗에 慨然하야 그 심기가 장차 一轉을 告코저 하던 그 際의 선생이리요. 선생은 於是乎 翻然히 起하며 躍如히 出하야 新朝鮮의 건설의 第一人으로 자임하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爲先 개화하여야 할 것을 절규하며 그리함에는 5,000년의 鴻夢에 宿醉가 依然한 支那와 악수함보다 유신의 분주 중에 在한 일본과 連袂하야 지식을 세계에 구함이 最得策이며 捷經이라 하야 右記江華事變이 起할 시에는 朴圭壽씨와 共히 開國의 이익을 주창하얏스며 江華條約의 체결과 共히 大院君一派 즉 守舊側의 세력이 漸微하매 선생은 此機可乘이라 하야 層一層 개화주의의 선전과 동지의 결합에 奮力하야 旣히 개화당의 칭호를 得하게 되엇다.
辛巳春 距今 39년전 선생 年 31)이라. 선생은 2志의 실현이 1일이라도 加急함을 思하고 착수의 第一步로 당시 당국과 謀하야 遊覽朝士의 명의하에 徐光範 兪吉濬 등 朝野名士 십수인(개화주의자)과 共히 일본에 往하야 그 維新政策을 친히 시찰하고 歸하야 別로히 진보주의를 高唱하며 是時 大院君의 今上廢立의 음모가 有하얏다는 事를 機로 하야 大히 守舊派를 배척하고 親政을 力圖할새 訓練院의 현 東大門小學校迹에 士官學校를 設하고 일본인 堀本 육군중위를 新聘하야 新軍을 훈련하며 기타 各面으로 庶政의 維新을 策하얏다.
是時에 大院君은 政界로 退隱을 당하야 快快不樂中에 국론이 일본으로 傾하는 嫌이 有하며 且同志가 退朝하고 閔族의 專政함을 忿하야 窃히 與黨을 규합하야 세력의 만회를 策하던 중 翌年 壬午軍<44>(本誌 「三十日間의 五千年」이란 題를 참조)이 起하매 大院君은 亂兵을 종용하야 堀本 중위를 殺하고 공사관을 습격하며 一方 왕궁을 범하야 재상 李最應을 殺하고 스스로 정권을 收하고 仍히 세력을 회복하얏스니 그 후 此事變으로 中日 양국 共히 출병하야 善後策을 議할새 中日 양국 국제의 交誼를 중히 하는 意로 중국 李鴻章은 京城駐在 馬公使를 명하야 大院君을 捕하야 天津에 拘束케 하고 局面一變의 新空氣 중에 韓日의 修好로 濟物浦條約을 체결하고 局을 終하얏는데 此條約의 실행으로 同年 10월에 정부에서는 謝罪大使로 朴泳孝 金晩植을 일본에 파견할새 선생이 그 사절의 일행에 가입하야 재차 일본에 赴하얏다.
此行의 임무를 終하고 朴泳孝, 金晩植 등은 直히 귀국함에 不拘라고 선생은 일본에 잔류하야 일본 維新의 施政을 詳究하며 一面으로 본국에 잇 는 동지와 策應하야 국정의 혁신을 圖하기로 하고 日人 牛場卓造와 井上角五郞을 薦하야 정부의 顧問을 作하며 又 동지를 규합하야 獨立黨을 조직케 하며 更히 韓日 양국 친선의 조건으로 旣成條約의 실행과 유학생 파견의 案을 본국정부에 제시하야 遂히 朝野의 찬성을 得하야 공사관 호위로 日兵의 駐京이 始하고 柳赫魯, 徐載弼, 兪星濬, 李圭完, 申應熙, 鄭蘭敎, 趙秉敎 등 수십인의 유학생이 東京에 출현되니 是卽 조선유학의 효시이엇섯다. 선생은 그 후 일본에 加留할 필요가 無함으로 장래 사업의 예비로 다소 금전을 求處而歸하얏더라.
運命!! 運命!! 先生의 二日內閣
선생이 개화주의자를 규합하야 獨立黨을 조직하는 동시에 閔族을 중심으로 한 守舊側의 일파는 守舊黨을 조직하야 당시 2당의 분립을 見하야 양당의 반목 여하는 不問可推할 것이다. 且壬午軍變 후로 중국정부는 선생을 중심으로 한 獨立黨의 일파가 일본에 傾함과 共히 일본의 對朝鮮勢力의 日增함을 見하고 亦內政에 간섭하기로 策을 정하고 李鴻章은 商務總辦 陳樹棠 及 獨逸人 穆麟德을 遣하야 고문을 定케 하고 袁世凱로 駐韓全權委員을 拜하야 2,000의 兵과 共히 京城에 주둔케 한 바 袁은 당시 겨우 24세의 청년이나 그 智謀手腕이 遙히 人을 壓하야 능히 각국공사를 농락하고 巧히 守舊派를 조종하야 세력을 大히 조정에 扶植하고 백방으로 獨立黨의 경영을 沮戱하매 그러틋 機智에 明한 선생으로도 直히 手를 下할 여지가 無하얏다.
그런데 此時(甲申) 중국이 安南事件으로 法國과 起*하야 佛艦隊가 東航하게 되매 조선문제에 대한 주의가 弛함과<45>共히 일본 당국의 조선에 대한 방침도 忽變하야 開化黨을 원조할 意가 有하얏스며 且駐京公使 竹添進一郞은 別로 獨立黨에 가담할 意를 示하매 선생도 此機를 不可失이라 하야 仍히 실행준비에 착수하니 그 준비는 즉 이러하얏다. 그때 마츰 京城郵政局이 준공되어 12월 4일 오후 9시에 성대한 落成宴을 거행하게 되엇다. 當夜에는 各黨大官은 물론이오 각국 공사까지도 來會할 터인 바 此機에 當夜叅席 又는 在家한 守舊側 일파의 大官을 일거 박멸하되 그 계획은 布*數 10개를 作하야 此에 木屑을 盛하야 別宮正殿 내에 積置하고 석유를 注하야 점화케 하며 또 別로히 폭발약을 그 근방에 배치하야 火勢蔓延과 共히 此가 폭발하면 그 음향을 軍號로 壯士를 명하야ㅡ 이리이리하기로 하슖�다.
12월 4일! 선생의 일생 운명을 決할 안이 新朝鮮의 건립여부를 決할 12월 4일은 來하얏다. 선생의 약속한 비밀 그대로 來하얏다. 신축된 郵政局의 大廣間에는 각국 사신이며 閔泳翊을 始하야 守舊黨員 일파도 원만히 출석하얏다. 宴至將半하야 주객의 담소가 正히 濃할만한 시 선생은 암호를 用하야 별궁에 장치한 폭발약에 수차 점화하얏스나 何故인지 아모 소식이 업는지라 부득이 인가에 방화케 하니 燄燄한 火光이 郵政局의 유리창을 亂射하매 戶外에서는 宮城에 出火하얏다.
大聲疾呼하는지라 列席하얏던 일동은 정신업시 戶外로 驅出할새 그 중 閔泳翊은 啞然失色하고 선두로 奔出하매 豫待하던 자객은 快히 그를 邀擊하얏스나 巧하게도 적중치 못하매 閔은 局內로 遁入하고 자객은 更히 姿를 隱하얏다. 此時 局內에서는 혹 呼泣 혹 發狂 혹 도주하야 正히 수라장을 現出하얏다.
先是하야 예약이 有한 竹添公使는 兵을 率하고 宮城을 호위한 바 선생은 朴泳孝와 共히 왕궁에 奔叅하야 暴兵의 作亂이라 秦達하고 긴급 왕명으로 守舊黨의 일파 後營大將 尹泰駿 吏曹判書 趙寧夏 前營大將 韓圭稷 左衛大將 李祖淵 及 閔泳穆 閔台鎬 등을 궁중으로 召하야 도중에서 擊殺하니 於是乎 守舊黨은 殆히 제거되어 開化黨의 천하가 되엇다.
翌日 新內閣을 조직할새 선생과 朴씨 洪英植을 始하야 開化黨의 袖領은 대개 入閣하야 만반의 政務를 一新할새 先히 大詔를 發하야 庶政의 一新을 布告한 후 썩어진 관리를 도태하며 문벌을 폐하며 환관의 權을 奪하며 朝貢의 예를 止하며 조세를 整하며 기타 문명의 新制를 布施하기로 하야 선생 多年의 風志늊� 此로써 실현의 第一矢를 放하얏다.
如斯한 보조로 長驅而進하면 不出期年에 半島의 山河도<46> 면목이 一新하며 百度 更張하야 조선의 유신을 期成하얏슬 것이라. 오호라. 新內閣의 수립이 昨日인데 宮城束方의 총성 은은이 是何不幸가 2일 夜에 倖免한 閔泳翊 일족은 直히 袁世凱의 구호를 청한 바 袁은 2,000의 大兵을 率하고 宮城을 來圍하얏다.
竹添公使의 軍이 此와 응전하얏스나 중과부적으로 패배의 兆가 先現하매 선생은 王을 扶腋하고 宮北門을 향하고 林間으로 入하야 布毛로 御座를 設하고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를 痛哭伏秦하여 爲先 對時局策으로 仁川까지 避御하야 後計를 施할 事를 力請하얏스나 時에 閔后가 閔族과 共히 袁의 軍中에 在하고 且日本의 세력이 不可恃함을 知한 王은 선생의 秦請을 不納하고 袁世凱 營中으로 私避하매 竹添公使는 兵員寡少 중에 更히 왕궁호위의 實을 失하야 退京의 부득이에 至하얏다.
玆에 선생은 日兵의 옹호 하에 僅히 공사관까지 至하야 친히 그 髮을 快斷하야 난로 중에 入하고 日服을 着한 후 竹添公使와 共히 인천으로 망명하야 즉시 下關向 汽船에 登하야 悲憤慷慨 중에 인천을 出錨하니 당시의 동행은 선생과 一大事를 同謀한 朴泳孝, 徐光範, 徐在弼 등이엇스며 선생을 축출한 漢城의 政略은 旣히 守舊黨의 천하가 되어 沈潤澤이 재상이 되어 洪英植 기타 開化黨員의 在京者는 그 가족까지 전부 박멸하얏더라.
日本으로 가는 亡命ㅡ 辛酸한 그 生活
선생은 그 險亂 그 패배의 중에도 捲土重來의 志를 懷하고 下關으로 東京에 着하얏다. 당시 일본정부에서는 竹添公使의 輕擧를 責하며 태도가 忽變하야 선생에 대한 신상의 대우도 심히 냉혹하며 井上外務大臣과 如한 人은 누차 往訪하나 一席의 면회까지 불응한 바 선생은 일본의 배신을 분개한 事도 1,2가 안이엇슬 것이다.
그리고 朴泳孝, 徐光範, 徐載弼 3인은 渡日 후 直히 미국에 更赴하고 선생이 獨留하던 중 朴은 未幾에 更히 東京으로 歸하야 선생과 同居함에 此를 知한 守舊黨으로 成한 조정에서는 金朴의 再謀事를 慮하야 乙酉에 徐相雨 穆麟德이 국서를 奉하고 謝罪大使로 일본에 往하는 동시에 선생과 기타 일파의 人을 조선에 귀환케 할 事를 요구하얏스나 일본정부에서는 한일간에 罪人交換條約이 無하고 又 國事犯은 국제법에 교환치 안는 예가 有하다.
항거하매 翌年 丙戌에 守舊黨에서는 更히 자객 池運永을 窃히 일본에 送遣하야 선생을 암살하기로 하매 幸히 본국인 중 此를 선생에게 密報한 자가 有함으로 선생의 知友는 直히 此를 일본정부에 告한 바<47> 정부에서는 駐京日公使에게 명하야 『일본은 金을 國境外로 退出케 할 터이니 자객을 撤回하라.』하매 守舊側도 亦 此에 응하야 池運永을 소환하얏다.
其時 朴은 更히 日人 大井憲太郞 小林樟雄 등과 공모하야 본국정부를 전복코저 하다가 謀洩하매 守舊側은 益益 불안을 感하야 更히 선생일파의 退出을 迫하매 일본정부는 필경 선생을 小笠原島에 放하니 此島는 絶海의 一孤島로 人煙은 희소하며 瘴癘는 別酷하야 선생이 到此不出幾月에 건강을 大損하야 그 초췌의 형용으로 島邊에 신음하는 狀ㅡ見者聞者 皆熱淚능� 揮치 안으리 업섯다.
其後 日廷當局의 양해를 得하야 東京으로 暫歸하얏스나 무슨 사정이 有하얏는지 선생은 更히 北海島에 퇴거하라는 명령을 受하얏다. 간신히 病軀를 携하야 同島에 着하얏스나 言語習俗이 異하고 기후까지 懸殊한 만리이역이엇지 선생의 堪居할 處이엇스리요. 더욱 일본정부로서 호의 지불하던 월 100원금의 생활비도 漸減되어 75원이 되며 다시 減하야 50원 更히 17원으로 되엇다가 乃終에는 그나마 지급을 중지하얏다.
在東京의 友人들이 심히 此를 悲하야 선생에 대한 방면을 백방으로 운동하얏스나 하등 효과를 不遂하고 다만 약간의 金을 친목회의 月損金가티 收送하야 僅히 선생의 조석을 供하엿슬 뿐이엇다. 그 비참한 생활 중에 약 6년의 長歲月을 속태우고 辛卯年 경 僅히 東京으로 돌아온 선생은 오즉 안색이 초췌하고 단발뿐 蕭蕭하야 當年의 우아하던 그 풍채를 구경할 수가 업고 轗軻不遇의 態를 誰이라도 認하게 되엇다.
그러나 新朝鮮의 건설을 위하야 2천만 민족의 행복을 作키 위하야 唯猛是進하는 일편단심은 小毫不弛하야 朴씨와 共히 再起의 計를 策하얏다. 此機를 探窺한 守舊黨側으로서는 壬辰에 更히 자객 李逸稙을 遣하야 선생과 朴 2인을 암살코저 할새 李는 상업으로 爲名하고 일본에 渡하야 선생을 圖할 機를 待하던 중 마츰 佛國으로 歸하는 洪鍾宇를 遇하야 그 辯說知慧의 足히 이용할만함을 見하고 利害로써 威하고 恩賞으로써 誘함에 洪은 遂히 傾心하야 李와 더블어 二心치 안이할 事를 盟하고 巧히 李의 소개로 선생과 밋 朴씨에게 면회를 得하얏다.
洪은 李의 奸誘로 인하야 선생을 圖하는 惡漢이 되엇스나 자못 대인의 氣宇가 잇고 且歐米를 漫遊하야 그 언행이 足劏�할만 하며 時事를 痛論할 시는 經綸이 溢出하야 事業이 有함을 是知하는 선생은 그를 점차 근접하게 하얏다. 그러나 그 후 未幾에 그의 행동이 頗異함을 간파하고 다소 회의가 不無하던 중 洪의 음모를 고하는 자 有하야 十分 경계를 備하면서도 대담한<48> 선생은 그런 내색이 업시 여전히 그와 從遊하얏다.
그러나 洪은 일본은 도저 자기의 음모를 실현할 地가 안임을 간파하고 본국의 守舊黨側과 교섭하야 선생을 如何히 하던지 타국으로 誘出하야 거사하기로 하고 1일은 선생을 訪하야 『고국의 혁명은 선생의 獨力으로 능히 목적을 達할 바가 안이라 余가 중국에 留連한지 14년에 李鴻章의 男 李經芳과 더불어 친교가 잇스니 그의 소개를 得하야 李鴻章과 더불어 大事를 圖하면 필히 그 목적을 成하리라.』 역설한 바 선생은 正히 반신반의하던 중 그 후 未數日에 燕京으로서 一書가 飛入하니 李經芳의 手札인 중 洪의 獻策과 異句同曲이라.
是는 당시 駐京 즉 袁世凱 李鴻章 간의 선생을 誘하는 奸策에서 出한 것이라 선생은 다소 此를 量치 안음도 안이나 세월은 悾憁하고 기회는 漸遠하는데 희망도 보이지 안는 滄海一隅에 徒히 踽凉함과 如함은 선생으로 忍爲할 바가 못 되며 且一面 李鴻章의 인격을 信하고 斷然히 중국을 향하기로 결심하얏스니 즉 李의 부자를 이용하야 扶桑에서 失한 志를 西楡에서 得코저 함이다.
此機를 知한 諸親友는 중국행의 위험ㅡ즉 李의 간계에 陷할 것을 切言하야 그 행을 중지코저 하얏스나 선생은 『李鴻章이 果偉人이면 齷齪히 余를 殺하야 事功을 收코저 함과 如한 鄙行은 不爲할지며 설혹 此行이 그의 간계이라 할지라도 동양의 금일에 在하야 일본에서 旣히 不如意하고 또 支那를 疑하면 䊽�의 往할 處는 更히 何地이냐? 余는 오즉 虎穴에 入할 뿐이라... ..』는 數言 하에 거절하고 甲午春 3월 10일 선생은 京坂 지방 여행 爲名 하에 從者 일본인 和田延次郞을 伴하야 돌연히 東京을 출발하니 동행에 洪鍾宇 중국인 吳某가 有하얏슬 뿐 大阪에서 무슨 준비로 幾日을 加留하고 同 23일 神戶發 西京丸으로 上海를 향하얏다.
幸혀 일본의 力을 의하야 조선유신의 鴻業을 수립코저 하다가 一旦亡命의 객ㅡ 안이 流竄의 몸이 되어 혹은 小笠原孤의 島瘴氣中에서 혹은 北海島의 風雪 중에서 전후 10여년을 방랑하다가 「不足與爲」의 最後斷案을 得하고 실망에 실망ㅡ 안이 실망의 일종 반동으로 扶桑國과 永別을 고하는 당시 선생의 情懷가 果何如하얏슬가 더욱 당시를 距하기 26년 후 금일의 吾人으로써 見하면...
嗚呼!! 上海埠頭의 慘血
舟中人은 총을 견우는 적국이것마는 海上의 天氣는 이상하게도 溫靜하야 神戶를 發한 西京丸은 27일 오후 무사히 上海에 着하얏다. 여관은 米租界에 在한 일본인 경영<49> 東和洋行으로 정하고 선생과 和田은 2층의 1호실, 洪은 同 2호실의 순서로 투숙하얏다. 翌 28일은 오후 1시부터 居留地 구경차로 마차 3대를 구하야 오전은 각각 외출하얏다가 和田은 先歸하고 선생은 水陸長程에 頗히 피곤을 感하야 脫上衣하고 침대에 臥하야 犬養木堂에게서 持來한 左傳을 탐독하얏다.
此際 외출하얏던 洪도 歸館하야 直히 종래의 양복을 조선복으로 換着하고 선생의 거실을 배회하는 등 그 행동이 이상하얏다. 그러나 선생은 의연히 독서에 耽하다가 홀연 명함 1매를 和田에게 주며 그것을 松本西京丸長에게 전하라 하매 和田은 命敎에 의하야 門外로 出하얏다.
和田의 跫音이 稍遠하야짐을 察한 洪은 준비하얏던 六穴砲를 出하야 선생을 擊하얏는데 그 第一發은 다행히 선생의 左頰을 범하매 선생은 蹶起하야 兇漢을 邀擊코저 하얏스나 空手이엇스며 洪의 發한 第二丸은 선생의 복부를 범하얏다. 명함을 들고 2층으로 下去하던 和田은 砲聲이 連發함을 聞하고 곳 2층으로 上하려 할 제에 洪은 喘息赤眼으로 急下한다. 何等의 兇變이 生한 줄을 直覺하고 倉荒히 馳上한 즉 과연 선생이 門前에 昏倒되고 선혈이 신변에 淋漓하얏다.
和田은 그 昏倒한 선생을 일으켜 안고 『선생님 선생님』을 연방 哀號하얏스나 아모 氣跡이 업섯다. 아아!! 선생의 영령은 旣히 現世를 去하얏도다. 아아 선생의 聲咳는 이 세간에서 영원히 침묵하얏도다. 年自弱冠으로 志를 興國의 대업에 委하고 동분서주로 그 生을 九死의 路에 苦하다가 그 業이 未半한 중도ㅡ 이역의 孤銭�을 成하얏도다.
前途의 多艱을 선생이 旣히 예측치 안은 바 안일지오 偉人從古多慘劇을 우리가 모름이 안이나 선생의 최후가 이러케까지 비참할 줄이 잇스리요. 유신의 基柱가 끈허졋스니 새 집의 上樑을 何에 구하며 迷津의 등대ㅡ그믈엇스니 鷄林의 형제 어대로 갈거나. 東和樓上에 海風이 尙寒한데 피다르고 말 갓지 안이한 和田의 어린 서생 한 사람뿐이다. 다 식은 선생을 정신업시 끌어안고 痛哭罔措할 뿐ㅡ 오호 甲午 3월 28일 오후!! 是時 선생의 춘추는 겨우 44세이며 距今二十有六年前.선생 遭亂의 報가 中外에 發布되매 세인의 분개와 동정은 恰然히 此에 注하얏다.
특히 일본 諸新聞紙는 논조가 非常히 격렬하야 此를 호외로 천하에 告知하며 선생 생전의 내외국 知友들은 此의 善後策을 講키 위하야 金氏友人會를 조직하고 爲先 遺骸收拾次로 齋藤新一郞 岡本柳之助를 上海에 파견하얏다. 兇漢 洪은 사건 발생의 翌日 米國警官에게 체포되며 上海列國領事는 在北京列國公使를<50> 經하야 支那總理衙門을 향하야 『洪을 상당한 죄형에 처하고 한국정부와 교섭하야 선생의 시체를 능욕치 못할 조건하에 한국으로 송환하라』고 요구하얏스나 선생 암살을 慫憊한 李鴻章은 此要求를 不採할 뿐 안이라 反히 上海道臺某에게 訓電하야 洪鍾宇를 十分 보호하야 金의 시체와 共히 군함으로 한국에 送歸하라 內命하얏다.
선생의 遺骸를 수습키 위하야 東京友人會로서 來한 諸氏는 直히 西京丸長과 교섭하야 郵船으로 遺骸를 일본에 移奉하기로 하고 幾日을 經한 某日 朝靈柩를 부두에까지 移하얏는데 홀연 居留地官憲으로부터 靈柩의 出航을 不許함으로 그 관헌과 共히 영사관에 往하야 그 이유를 探하고 歸한즉 靈柩는 去處가 無하얏다. 일동 특히 和田은 放聲痛哭하얏스나 靈柩는 旣히 支那官憲의 手에 入하야 洪과 共히 군함으로써 仁川에 搭送하얏다. 事旣至此에 岡本 등도 如何히 할 수 無하고 東京으로 空歸하매 友人會에서는 靈牌를 設하야써 靑山에 埋하야 애도의 意를 표하얏더라.
선생의 遺骸가 仁川으로 京城에 入하매 李鴻章은 조정에 향하야 長文의 祝電을 發來하얏스며 守舊一派의 희열은 극에 달하야 大히 洪鍾宇의 功을 賞하얏다. 京城駐在 각국 公使는 更히 조정에 향하야 선생 遺軆에 능욕을 가함이 不可함을 累勸하얏스나 그것은 聽而不聞하고 4월 14일 京城의 南 약 40리 許漢江岸 楊花津頭에서<51> 大逆不道의 죄명으로 八裂의 참형을 追行하야 首는 京城에 裊示하고 四肢는 各道에 廻示하고 軀軆는 漢江에 投하얏다 하며 혹은 그대로 放乘하고 그의 收拾을 엄금하야 蠅犬의 吸噬에 委하얏다 한다.
오호라 千古國士의 신상에 大逆不道의 名을 加하며 先하야 그의 가족을 滅하고 後하야 그를 총살이 오히려 부족하야 死後의 능욕을 추가하얏도다. 그 兇惡이 果如何한가. 是時 甲斐軍治라는 일본인이 窃히 선생의 遺髮과 屍衣를 盜取하야 東京本鄕眞淨寺에 매장하얏더라.(수년전에 현 保寧郡守로 잇는 선생의 양자 金英鎭씨로부터 東京의 선생 遺髮을 移하야 牙山에 안장하얏더라.
多方面으로 見한 先生의 性格
선생의 實蹟을 간단히 적엇도다. 이제 선생을 다시금 추모하는 정을 不堪하야 專히 선생의 성격 기타에 就하야 탐문한 대로 적고자 한다.(선생을 隨하야 해외에서 다년 고초를 分한 모씨의 말슴에 의함)
선생은 제일 愛의 人이엇다. 그는 사람이나 物을 대할 시는 直히 그 본체 그 진수에 歸하야 그 순수를 발견할 뿐이오 그 표면에 노출하는 그 무엇이라 함과 如한 관념은 眼中에 初無하얏다. 선생의 심중에는 大人이 無하고 小兒가 無하얏스며 인습이 無하고 惰力이 無하얏스며 그저 사람이 有하고 진실이 有하얏슬 뿐이엇다. 『누구이나 來하여라 내 손목 여긔 잇노라』함은 그의 待人第一主義이엇다.
그래 自幼時로 同侔들과 從遊할 시에도 別로 溫情을 注하야 鄕黨幼少年이 全혀 그를 戴하얏다 하며 京城養家에 入하야 현 高等普通學校 跡에 잇슬 시는 그 前家에 金弘集이 거주하야 朝暮相遊하얏는데 弘集이 家貧하야 식사가 粗함을 見한 어린선생은 이것이 심중에 불안하야 자기 食床이 來하면 必히 此를 分하야 庭垣 우흐로 弘集에게 보내엇다 하며 그의 仁風은 성장함과 共히 益濃하야 東京에 체류할 시에는 日訪하는 서생들에게 滿幅의 同情을 표하야 혹 100원 혹 10원 그리하다가 금전이 혹 乏하면 窃히 자기의 旅具를 質하야 그의 인정에 售하얏스며 선생의 최후를 侍한 和田과 如한 人은 小笠原에 謫居할 시 우연히 알게 되어(和田의 그 때 9세) 此를 극히 애무하야 或養或敎에 애무을 극히 한 바 그는 그 恩愛에 感하야 최후까지 선생의 側을 侍함이라 하며 선생은 일즉 儒敎를 형식의 敎라 하야 철알기부터 此를 배척하고 佛敎를 篤信하야 선생의 수양과 박식은 多히 此에서 得하얏스며 오즉 형식을 忘하고 사람을 사람 그대로 대하는 선생은 우정이 別로 深하야 魚允中 徐光範 등 동지 십수인의 선생에게 心腹한 것은 물론이오 東京에<52> 망명한 시 일본 幾多名士와 相從할새 一次面對하면 곳 知友가 되얊� 憂樂을 共分한 중 福澤諭吉, 頭山滿, 犬養毅 등과는 別로 막역의 간이엇다 한다.
그리고 선생은 溫厚暢達의 人이엇다. 小事에는 당초에 시비를 不爭하며 자기의 私事關係로 인하야 疾言遽色을 發함과 如한 事는 追逐者 何人이라도 발견치 못하얏다 한다. 詩書에 탐하며 풍류를 好하고 且圍碁에 長하야 일본에 在할 시는 當地의 棋士의 來訪이 빈번하얏는데 선생은 對手側의 如何한 人에게 대하야도 勝을 취하는 事가 無하며 최후까지 담소 중에 勝負相半을 現케 하얏다. 傍人이 그 이유를 問하면 圍碁라 함은 遊具이니 최종까지 원만히 遊하얏스면 그의 최선을 盡한 것이라 거긔에 何特勝負를 出하야 적게나마 對手側의 감정을 亂케 할 필요가 何有한가 하야 선생은 타인의 감정을 그대로 살림을 最喜하얏스며 恒曰 자기의 운명에 무관한 凡凡小事에 자타의 감정을 상함과 如함은 余의 본성의 不許하는 바라 하얏스며 且金錢의 관념은 염두에 初無하야 一自甲申事變 이후 全家가 滅盡되고 일본으로 망명하야 東京에 留할 당시 隻分이 수중에 存할 리가 無한지라. 그러나 능히 교제하고 능히 施慈하야 北海島의 謫居時를 除한 외에는 少毫 금전의 累를 學한 事가 無하얏나니 是는 물론 선생의 인격을 慕하는 諸知友의 喜贈에 인함이라. 모 상점 혹 요리관에 지불할 額이 有하면 문득 2매의 서신을 出하니 若第一受信人에게 불행 所持金이 無하면 第二受信人을 訪하라 함이다. 그 受信人이라고 선생에게 책무를 負한 人은 물론 안이며 오즉 선생의 知友가 될 뿐이다. 그러하나 선생의 그 2매 서신은 小切手以上의 効가 有하얏다 함과 如함은 족히 선생의 用錢法을 窺할 것이다.
선생은 실로 무쌍한 천재이엇다. 제일 총명이 超逸하야 能詩能書하며 일본에 망명한지 불과 3개월에 일본어를 정통하얏다. 이런 말이 잇다. 엇던 날 所看事가 有하야 犬養과 共히 鐵道會社長 小野某를 방문하얏는데 禮畢에 선생은 예의 유창한 口調로 一場談論을 試하고 犬養은 時時 此에 對辯할 뿐인 바 선생의 談이 終하매 주인된 小野는 犬養을 향하야 일본어의 교묘를 嘆賞하며 『足下의 일본어는 언제 그리 연구한 것인가』 試問하매 滿場이 大笑하얏다 하며 또 연회석에 회원이 如何히 다수일지라도 한번 인사를 經하면 그 후 何時이라도 그의 顔과 名을 共記하며 且 선생은 如何한 人에게 發하는 修書라도 閣筆再考하는 事가 絶無하다. 그런데 선생의 42세 시(壬辰)例의 北遊問題로<53> 李鴻章에게 修書할새 그래도 李가 李이오 내용이 중대함으로 書畢에 此를 再見하얏는데 不幸一字를 落함이 有한지라. 선생이 喟然히 在傍友人에게 『余亦衰하얏도다』의 嘆을 漏하얏다 한다.
그리고 선생은 더 말할 수 업는 改革兒이엇스며 創造兒이엇다. 외부에 浮上한 虛僞를 見함에 止치 안이하고 必히 物의 聖髓에 觸하는 性을 有한 선생으로는 자연히 그러치 안인치 못하얏다. 이러한지라 혹 事爲에 加工하야 完美를 告함과 如함은 선생의 長能이 안이라 朴泳孝씨와 如함은 당시 선생과 萬事를 同謀하얏스되 그 長能은 선생과 정반대로 창조보다 或事의 修成에 在하얏나니 요컨대 兩璧이 相須하야 조선의 維新을 策함이다.
선생은 常히 和平과 悅樂으로 身을 持하야 幾年을 동거한 人으로도 선생의 無聊臥床을 不見하얏다 한다. 무시로 書繪를 鍊하며 혹은 고인의 시가를 吟하며 혹은 隣居의 幼少年라 談美作樂하며 그러치 안으면 교외에 策을 散하는 등 일시라도 無聊히 度過하는 事는 無하며 且人을 委訪함과 如한 事는 殆히 無하고 人으로 하야곰 자기를 訪하게 하며 그리하되 선생의 所過處에는 항상 市를 成하얏스며 志가 大에 在한 선생은 自奉과 如함은 스스로 不許하야 至近한 親友이라도 그의 생일이 何日인지를 不知하얏다. 험악한 운명을 목전에 控하고 支那로 向코저 하던 甲午春에 선생이 1일은 同留 柳赫魯 기타 2,3인을 향하야 一夜의 宴樂을 청함으로 應從한 事가 有하얏는데 上海慘禍가 有한 후에 생각하면 그 날이 즉 선생의 생일이엇다 함은 當夜에 참석하얏던 현존 某 知友의 눈물지우며 하는 말이다. 耶穌基督이 십자가에 就할 當夜에 제자들을 携하고 橄欖山에 登한 고사와 異調同曲이라고 할가나.
寬厚暢達의 선생은 꽤 戱謔에도 耽하얏다. 망명으로 처음 東京에 着하얏슬 시는 인력거를 乘하면 近遠을 불문하고 1원, 혹 10원, 혹 100원 손에 쥐이는 그대로 與하야 혹 狂人이 안인가 하는 評도 得하얏스며 언제는 伊藤博文과 共히 修禪寺 溫泉場에 往하야 大川旅舘에 入하얏다. 翌朝同舘을 發할 새 茶代로 伊藤이 500원을 出함으로 선생은 일약 1,000원을 出하야 지금까지 當地의 일화가 되엇다는 말도 잇다.
世機에 敏한 선생은 평상 例語 중에도 發한 語도 무슨 예언가티 된 말도 적지 안이하다. 강원도의 金剛山ㅡ 하면 지금은 세계적 名地가 되어 내외국인의 遊賞이 接踵하나 사오십년 전의 당시는 오즉 金剛의 名뿐이엇다. 선생은 戱語가티<54> 조선에서 외국인의 金을 奪할 것은 오즉 金剛이라. 金剛은 不出 20년에 조선의 金江이 되리라 하얏스며 又曰 京城은 적어도 漢江이 京城全市를 流하는 시에 始로 신생활의 서막이 開하리라 하얏다. 금일에 在하야 見하면 皆適中한 듯 하며 又曰 조선의 首府를 平安 이북으로 移치 안이하면 조선의 大成은 期키 難하며 그리고 위대한 민족성을 養치 못하리라 하얏다 하는 바 此亦 우연한 말슴이 안인 듯 하다. 此外에도 선생의 남긴 逸事逸話는 限이 無할 것이나 探知키 難한 점도 有하며 且現에 전하는 것이라도 근거가 不確한 嫌이 有함으로 逸話는 이만 畧하고
結辭가티 한마디
선생은 서구 풍조가 막 드리밀리고 동양의 長眼이 겨우 깨고저 하는 19세기 말엽에 幸가 不幸가 其生을 多艱多頑한 조선반도에 禀하야 귀신가튼 明見과 하해가튼 理想을 夙懷하고 斷斷 其盟으로 如何히 하면 이천만의 민족을 黑洞 洞中에서 引出하며 如何히 하면 삼천리 조선을 세계적 沈淪으로부터 拯濟할가 하야 內로 頑冥無覺한 守舊黨과 도전하며 外로 1일의 長을 有한 일본과 手를 握하야 着着히 巨手를 漢城 一隅에 下하던 중 計左力弱하야 소기의 만일을 不達하고 空히 異域風霜에 萍蓬의 몸이 되어 전후 10년은 落日出月에 전후 피끌코 속태이다가 최후 一縷의 희망을 支那에 繫하고 憔顇한 그 形軀를 上海埠頭에 옴기자마자 흉악한 자객의 일격 하에 萬里孤魂을 作하고 已하얏도다. 鞠躬盡瘁되어 死而後乃已이라 하면 선생의 경우에 庶幾할는지? 아아 念이 此에 至하매 感淚ㅡ自先하야 무엇이라 形喩할 길이 업도다. 別로 그리우는 선생의 성격에나 대하야 數行을 加記하고 느낌만흔 이 기록을 마치자.
선생은 至仁至誠 多才多智 毅魄大膽 寬和暢達의 세계적 위인(기자의 懇願이오니 徒히 선생을 과찬하는 형용이라 생각지 마시오)이다. 그 襟懷에는 언제던지 光風霽月이 宿하며 그의 胸底에는 자유 위대의 심장이 備하얏고 그 일상의 언어에는 일종 특유의 어조를 帶하야 高邁醇眞한 중에도 明快靈活ㅡ正히 詩風의 著色이 有하야 處處에 異彩를 放하는 바 誰이나 此에 接하면 直히 위대ㅡ 우애에 濃한 人임을 感知하며 선생의 幼少年에 대한 愛는 正히 그 心底에 藏한 一切愛情의 간단한 縮圖이엇는 듯. 아아 一方에는 可恐할 死의 도전이 有하고 他方으로는 如此한 至愛의 流不絶이 有함! 是偉人의 兩極이라고 할가나!<55> 世間一切의 웅대ㅡ 全혀 此間에 鍾하얏도다. 이뿐만 안이라 事에 임하야 明辨不急하며 人을 대하되 純實無僞함은 正히 輕裝小艇이 多島海間을 縫出하는 듯 하며 滾滾淸泉이 岩穴로부터 유출함과 如하얏도다. 一言으로 蔽하노니 吾人은 사업의 點에서뿐 안이라 亦 인격의 點에서 선생을 조선 근대의 大産物ㅡ 안이 세계적 위인이라면 그리 못한 것이 업다 하노라. 즉 智로서나 仁으로서나 才로서나 誠으로서나 勇으로서나 悉皆大의 大, 醇의 醇, 吾人의 最尊敬, 最愛慕할 인물의 一人은 오즉 선생 뿐이라 한다. 과연하다. 그 大이야말로 한 층 두 층 置重하야 成한 方尖塔의 大가 안이오 白頭山의 上上峰과 如히 전혀 大를 强期치 안이하고 자연히 大한 것이며 그 醇이야말로 一草에 一木을 加하야 致한 庭園公園의 醇이 안이오 대지의 雨露에 스스로 成한 鴨祿邊 大森林의 醇과 如한 醇이라 彼其大를 欲하고 其醇을 裝하야 양의 가죽쓰고 세간에 立한 俗偉人과는 실로 天壤의 判이 有하도다 그 경우!!
아아 선생의 그 偉績 그 성격 今世來世萬萬世 우리 형제 안이 천하 億兆蒼生의 느낌, 생명되기에 족하리로다.
선생을 愛慕함이 極한 마음으로 唐突이 이 글을 草하얏스나 참고가 완전치 못하고 인쇄시일도 頗急하야 杜撰이 만흘 것이웨다. 추후 발견하는대로 考訂且補記키로 하오며 삼가 우리의 머리 우에 洋洋히 임하신 선생님과 밋 여러 애독 형제에게 사의를 표하나이다.(기자) 개벽3호 1920 년 8월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