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옛모습

충달공 김옥균 선생

형과니 2023. 6. 20. 08:43

충달공 김옥균 선생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1-07-02 12:11:05

 

忠達公 金玉均 先生 (충달공 김옥균 선생)

 

 

개인주의와 떼모크라시가 盛傳하는 근일에 하야 영웅 운운의 소리는 끈칠만도 하다. 그러니 그런 것 갓지도 안이하며 영웅(이하 위인이라 개칭함)을 요구하는 四面에서 더욱 하는 듯 하도다. 위인이란 암만 하야도 아조 제외할 수는 업는 이다. 盖偉人이란 인생의 首領으로 일반민중의 필경에는 필히 , 혹은 도달할 무엇을 제시하는 우리오 模型儀表更言하면 일종의 創造家함이니 或國家或民族質量은 그의 有無로 인하야 重輕되며 尙一般人衆은 그에 하며 함으로 하야 靈感하며 光明하나니 或民族으로서 自家歷史 중에 그리할만한 偉人이 업다 하며 又有하다 할지라도 그 민족 스스로가 매장하고 발견치 안이하면 그 얼마나 슯흐고 嘶膓할 일이리오. 금일의 우리는 위인의 출현을 심히 요구하도다. 影子라도 대하얏스면 하도다. 그러나 일반은 아즉 그를 발견치 못하얏도다. 세간의 보통 위인이 함은 안이나 그네로써 우리의 慕仰의 표적을 삼기에는 넘우 섭섭하도다. 우리 동포 중에 특히 금일 우리의 懿範이 되기에 족한 或偉人을 발견한다 하면 그 다행히 果如何할가 이제 우리 일부가 욕하고 씻고 처뭇고 스스로 이즌 쳬 하던 조선근대의 最大産物ㅡ 안이 세계적 위인ㅡ 金玉均 선생을 감히 소개하노니 完全不完全은 기자가 그 을 자부하려니와 형제들이어 爲先 각자의 거룩한 침묵과 뜨거운 느낌으로써 선생의 聖跡偉格沈思熱想함이 할지어다.

 

김옥균 초상

 

先生出生과 그 官歷

 

距金 69년전 辛亥 正月 23忠淸南道 天安 安東金門某家呱呱一馨香兒하얏스니 그 -그의 眉目가티 淸秀함을 하야 玉均이라41賜名하얏더라. 可言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2세에 능히 하며 3세에 능히 부모의 對話者가 되어 일가의 총애는 혀 그의 集注하엿스며 6,7세가 되어 隣家兒와 교류를 함에 하야는 그 어린의 일이나 同侔에 대한 사랑의 정이 하며 웃으운 말 한 마대라도 퍽 滋味잇게 정답게 하야 그 부근의 幼少年은 그를 떠이다 십히 하야 그의 門前에는 항상 하얏다 한다. 待人接物에 대한 천재는 幼時부터 발휘되엇더라.

 

何年인지 할 수는 업스나(10內外時인 듯) 선생은 天安鄕第하야 京城 花開洞 前郡守 金炳基氏家의 양자가 되며 京城이 되엇스니 現洞開京城高等普通學校基地는 당년 선생의 주택 所在處이라 한다. 京城에 이주한 선생은 양친의 지도하에 古漢學하얏는데 그의 英勃才氣觸處에 발휘되어 修學末幾에 곳 을 능히 하며 또 하야 見者聞者皆呆然而已이엇스며 年纔弱冠試果에 응하야 龍門第一天하얏스며 하야 玉堂榮冠하매 그의 文名當世驚動하야 선생은 花開洞中凡夫가 안이엇다. 桃李開處蹊逕自成이오 現龍在田雲雨必施라 선생의 거룩이엇지 그에 뿐 하리요. 當世偉傑 大院翁한 바 되어 일약 吏曹叅議의 요직에 하니 當年이 실로 19세ㅡ비록 1인의 애증으로 인하야 或一人龍猪하는 당시의 이라 할지라도 과연 可驚가 안인가. 선생은 그 후 累進하야 吏曹叅判하야 26세의 戶曹判書印綬하얏더라.

 

朝鮮政界混沌先生奮起

 

世間社會에는 언제던지 무슨 조류가 하는 것이니 그 조류의 추이를 明察하며 그에 순응하야 가히 하는 하며 할 것이오. 그러치 못하는 하며 망할 것이라. 窃唯컨대 19세기 하반기에 한 구미 세력의 向東決潰는 동양인에게 대한 一大潮流ㅡ 안이 一大荒流이엇나니 試思하라. 此荒流로 인하야 하고 민족이 한 자ㅡ 실로 幾何인가. 히 일본이 此流하야 維新鴻業을 완성하얏스며 支那躕躇末決하야 國恥民辱하고 판도가 하얏스며 불행 우리 조선은 혀 그 조류에 치 못하야 필경 하야 일본과 병합함에 하얏도다. 讀者諸兄이어 특히 기자의 간청이니 설혹 지리한 감이 할지라도 去甲子 이래 당시 당국자의 그 조류에 대한 處策을 약술하야 金玉均 선생의 偉行함이 케 하라.42

 

처음 哲宗하고 無嗣하매 距今 57년전 癸亥興宣君*를 옹립하야 왕위에 케 하니 時年12임으로 興宣君大院君이 되어 庶政하게 되엇다. 大院君意氣하고 決行하야 실로 영웅의 소질을 하얏스나 可惜 식견이란 것이 그에 치 못하야 그의 집권은 頑兒利刀함과 하얏다.

 

그의 頑腦는 제일로 쇄국주의를 고집하야 先着手로 천주교도를 학살하고 丙寅에는 佛國 선교사를 하야 佛艦 7척이 江華島를 진격하매 를 격퇴하얏스며 庚午米國商船大同江하매 선원을 擊殺하얏슴으로 그 후 米軍艦 5척이 漢江으로 진군하매 격퇴하얏다.

 

당시 소위 佛米軍이라 함은 問責 혹은 통상을 목적하야 함이오 결코 전투를 위하야 함이 안인 동시에 그 군인수와 무기의 준비가 如何些微하얏슬 것은 이나 推知할 것이니 를 칭하야 丙寅洋亂 운운하야 전국이 騷動함과 함은 실로 可笑이라. 를 격퇴한 大院君米佛全國兵이나 격퇴한 듯이 意氣自揚하야 外人輕侮하기 日甚하얏다.

 

하야 일본으로서 戊辰 9(明治元年)對馬島守吏 宗重正遣來하야 왕정의 復舊를 고하고 국교의 修好를 청하얏는데 그 국서 중에 大日本皇帝한 것이 함을 하고 오즉 중국이 帝號할 뿐이어늘 일본이 焉敢用此乎하야 接受하고 하야 東萊 釜山 兩地日韓官吏接見을 철폐하매 日庭에서는 征韓論까지 하얏스며 그 후 乙亥日艦 雲揚號가 우리의 沿岸及支那牛莊 를 측량하고저 仁川 月尾島할새 江華灣下泊하고 小艇으로 漢江하는 중 永宗城砲臺는 돌연 에 포격을 하매 雲揚號가 응전하야 永宗城東京하니 於是乎(翌年 2) 일본의 黑田淸隆全權大使來京하야 先年의 국서거절과 군함포격의 무례를 책하며 修好條約의 체결을 요구하매 大院君의 반대가 여전하야 廷議紛紜하얏스나 此時右大臣 朴圭壽 이하 7,8인이 群議하고 開國의 이익을 역설하야 韓日修好條約을 체결하니 소위 江華條約이라. 此條約으로 인하야 조선은 獨立自主邦으로 일본과 평등의 함을 하야 종래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하고 元山 仁川 2通商埠하기로 하며 (元山庚辰年仁川庚寅年하다) 半島沿海는 일본인의 자유측량에 일임하다.

 

此江華條約의 성립은 실로 당시 朝鮮政海一爆彈한 셈이엇도다. 開國의 이익을 주창한 朴圭壽 측의 승리는43斥洋斥倭로 쇄국주의를 고집하던 大院君 편의 세력소실을 의미함인 바 조선과 중국이 한 외에 他國함을 不知하며 鎖國弄權의 정책 외에 他事함을 不知하던 당시 정국에 향하야 조선 중국이 한 외에 히 일본 기타 외국이 하며 쇄국주의 이외에 문호개방 新政樹立急務함을 奄覺하얏스며 조선의 자주국임을 하고 일본과 평등의 함을 한다는 一條昨日까지 正朔하던 중국과의 문제가 발발하야 잘하나 못하나 제멋대로 놀던 漢城政局은 점차 일본 중국 양세력의 각축지가 되엇도다.

 

그런데 右江華條約 체결되던 시 선생의 26으로 戶曹判書의 현직에 하얏다. 如許한 시국을 당하야 하고 한 자이면 이나 自安치 못하겟거던 而況無形하고 無聲하는 如神機智한 선생ㅡ 多年 宦海亂流하야 탐관오리의 추행과 人心世道傷敗慨然하야 그 심기가 장차 一轉코저 하던 그 의 선생이리요. 선생은 於是乎 翻然하며 躍如하야 新朝鮮의 건설의 第一人으로 자임하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爲先 개화하여야 할 것을 절규하며 그리함에는 5,000년의 鴻夢宿醉依然支那와 악수함보다 유신의 분주 중에 한 일본과 連袂하야 지식을 세계에 구함이 最得策이며 捷經이라 하야 右記江華事變할 시에는 朴圭壽씨와 開國의 이익을 주창하얏스며 江華條約의 체결과 大院君一派 守舊側의 세력이 漸微하매 선생은 此機可乘이라 하야 層一層 개화주의의 선전과 동지의 결합에 奮力하야 히 개화당의 칭호를 하게 되엇다.

 

辛巳春 距今 39년전 선생 31)이라. 선생은 2의 실현이 1일이라도 加急함을 하고 착수의 第一步로 당시 당국과 하야 遊覽朝士의 명의하에 徐光範 兪吉濬 朝野名士 십수인(개화주의자)히 일본에 하야 그 維新政策을 친히 시찰하고 하야 로히 진보주의를 高唱하며 是時 大院君今上廢立의 음모가 하얏다는 로 하야 守舊派를 배척하고 親政力圖할새 訓練院의 현 東大門小學校迹士官學校하고 일본인 堀本 육군중위를 新聘하야 新軍을 훈련하며 기타 各面으로 庶政維新하얏다.

 

是時大院君政界退隱을 당하야 快快不樂中에 국론이 일본으로 하는 하며 且同志退朝하고 閔族專政함을 忿하야 與黨을 규합하야 세력의 만회를 하던 중 翌年 壬午軍44(本誌 三十日間五千年이란 를 참조)하매 大院君亂兵을 종용하야 堀本 중위를 하고 공사관을 습격하며 一方 왕궁을 범하야 재상 李最應하고 스스로 정권을 하고 히 세력을 회복하얏스니 그 후 此事變으로 中日 양국 히 출병하야 善後策할새 中日 양국 국제의 交誼를 중히 하는 로 중국 李鴻章京城駐在 馬公使를 명하야 大院君하야 天津拘束케 하고 局面一變新空氣 중에 韓日修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고 하얏는데 此條約의 실행으로 同年 10월에 정부에서는 謝罪大使朴泳孝 金晩植을 일본에 파견할새 선생이 그 사절의 일행에 가입하야 재차 일본에 하얏다.

 

此行의 임무를 하고 朴泳孝, 金晩植 등은 히 귀국함에 不拘라고 선생은 일본에 잔류하야 일본 維新施政詳究하며 一面으로 본국에 잇 는 동지와 策應하야 국정의 혁신을 하기로 하고 日人 牛場卓造井上角五郞하야 정부의 顧問하며 동지를 규합하야 獨立黨을 조직케 하며 韓日 양국 친선의 조건으로 旣成條約의 실행과 유학생 파견의 을 본국정부에 제시하야 朝野의 찬성을 하야 공사관 호위로 日兵駐京하고 柳赫魯, 徐載弼, 兪星濬, 李圭完, 申應熙, 鄭蘭敎, 趙秉敎 등 수십인의 유학생이 東京에 출현되니 是卽 조선유학의 효시이엇섯다. 선생은 그 후 일본에 加留할 필요가 함으로 장래 사업의 예비로 다소 금전을 求處而歸하얏더라.

 

運命!! 運命!! 先生二日內閣

 

선생이 개화주의자를 규합하야 獨立黨을 조직하는 동시에 閔族을 중심으로 한 守舊側의 일파는 守舊黨을 조직하야 당시 2당의 분립을 하야 양당의 반목 여하는 不問可推할 것이다. 且壬午軍變 후로 중국정부는 선생을 중심으로 한 獨立黨의 일파가 일본에 함과 히 일본의 對朝鮮勢力日增함을 하고 亦內政에 간섭하기로 을 정하고 李鴻章商務總辦 陳樹棠 及 獨逸人 穆麟德하야 고문을 케 하고 袁世凱駐韓全權委員하야 2,000京城에 주둔케 한 바 은 당시 겨우 24세의 청년이나 그 智謀手腕하야 능히 각국공사를 농락하고 守舊派를 조종하야 세력을 히 조정에 扶植하고 백방으로 獨立黨의 경영을 沮戱하매 그러틋 機智한 선생으로도 할 여지가 하얏다.

 

그런데 此時(甲申) 중국이 安南事件으로 法國*하야 佛艦隊東航하게 되매 조선문제에 대한 주의가 함과45히 일본 당국의 조선에 대한 방침도 忽變하야 開化黨을 원조할 하얏스며 且駐京公使 竹添進一郞獨立黨에 가담할 하매 선생도 此機不可失이라 하야 히 실행준비에 착수하니 그 준비는 즉 이러하얏다. 그때 마츰 京城郵政局이 준공되어 124일 오후 9시에 성대한 落成宴을 거행하게 되엇다. 當夜에는 各黨大官은 물론이오 각국 공사까지도 來會할 터인 바 此機當夜叅席 又在家守舊側 일파의 大官을 일거 박멸하되 그 계획은 *10개를 하야 木屑하야 別宮正殿 내에 積置하고 석유를 하야 점화케 하며 또 로히 폭발약을 그 근방에 배치하야 火勢蔓延가 폭발하면 그 음향을 軍號壯士를 명하야ㅡ 이리이리하기로 하슖.

 

124! 선생의 일생 운명을 할 안이 新朝鮮의 건립여부를 124일은 하얏다. 선생의 약속한 비밀 그대로 하얏다. 신축된 郵政局大廣間에는 각국 사신이며 閔泳翊하야 守舊黨員 일파도 원만히 출석하얏다. 宴至將半하야 주객의 담소가 할만한 시 선생은 암호를 하야 별궁에 장치한 폭발약에 수차 점화하얏스나 何故인지 아모 소식이 업는지라 부득이 인가에 방화케 하니 燄燄火光郵政局의 유리창을 亂射하매 戶外에서는 宮城出火하얏다.

 

大聲疾呼하는지라 列席하얏던 일동은 정신업시 戶外驅出할새 그 중 閔泳翊啞然失色하고 선두로 奔出하매 豫待하던 자객은 히 그를 邀擊하얏스나 하게도 적중치 못하매 局內遁入하고 자객은 姿하얏다. 此時 局內에서는 혹 呼泣 發狂 혹 도주하야 히 수라장을 現出하얏다.

 

先是하야 예약이 竹添公使하고 宮城을 호위한 바 선생은 朴泳孝히 왕궁에 奔叅하야 暴兵作亂이라 秦達하고 긴급 왕명으로 守舊黨의 일파 後營大將 尹泰駿 吏曹判書 趙寧夏 前營大將 韓圭稷 左衛大將 李祖淵 及 閔泳穆 閔台鎬 등을 궁중으로 하야 도중에서 擊殺하니 於是乎 守舊黨히 제거되어 開化黨의 천하가 되엇다.

 

翌日 新內閣을 조직할새 선생과 洪英植하야 開化黨袖領은 대개 入閣하야 만반의 政務一新할새 大詔하야 庶政一新布告한 후 썩어진 관리를 도태하며 문벌을 폐하며 환관의 하며 朝貢의 예를 하며 조세를 하며 기타 문명의 新制布施하기로 하야 선생 多年風志로써 실현의 第一矢하얏다.

 

如斯한 보조로 長驅而進하면 不出期年半島山河46면목이 一新하며 百度 更張하야 조선의 유신을 期成하얏슬 것이라. 오호라. 新內閣의 수립이 昨日인데 宮城束方의 총성 은은이 是何不幸2倖免閔泳翊 일족은 袁世凱의 구호를 청한 바 2,000大兵하고 宮城來圍하얏다.

 

竹添公使와 응전하얏스나 중과부적으로 패배의 先現하매 선생은 扶腋하고 宮北門을 향하고 林間으로 하야 布毛御座하고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를 痛哭伏秦하여 爲先 對時局策으로 仁川까지 避御하야 後計力請하얏스나 閔后閔族軍中하고 且日本의 세력이 不可恃함을 은 선생의 秦請不納하고 袁世凱 營中으로 私避하매 竹添公使兵員寡少 중에 히 왕궁호위의 하야 退京의 부득이에 하얏다.

 

에 선생은 日兵의 옹호 하에 히 공사관까지 하야 친히 그 快斷하야 난로 중에 하고 日服한 후 竹添公使히 인천으로 망명하야 즉시 下關向 汽船하야 悲憤慷慨 중에 인천을 出錨하니 당시의 동행은 선생과 一大事同謀朴泳孝, 徐光範, 徐在弼 등이엇스며 선생을 축출한 漢城政略守舊黨의 천하가 되어 沈潤澤이 재상이 되어 洪英植 기타 開化黨員在京者는 그 가족까지 전부 박멸하얏더라.

 

日本으로 가는 亡命辛酸한 그 生活

 

선생은 그 險亂 그 패배의 중에도 捲土重來하고 下關으로 東京하얏다. 당시 일본정부에서는 竹添公使輕擧하며 태도가 忽變하야 선생에 대한 신상의 대우도 심히 냉혹하며 井上外務大臣은 누차 往訪하나 一席의 면회까지 불응한 바 선생은 일본의 배신을 분개한 1,2가 안이엇슬 것이다.

 

그리고 朴泳孝, 徐光範, 徐載弼 3인은 渡日 히 미국에 更赴하고 선생이 獨留하던 중 未幾東京으로 하야 선생과 同居함에 守舊黨으로 한 조정에서는 金朴再謀事하야 乙酉徐相雨 穆麟德이 국서를 하고 謝罪大使로 일본에 하는 동시에 선생과 기타 일파의 을 조선에 귀환케 할 를 요구하얏스나 일본정부에서는 한일간에 罪人交換條約하고 又 國事犯은 국제법에 교환치 안는 예가 하다.

 

항거하매 翌年 丙戌守舊黨에서는 히 자객 池運永히 일본에 送遣하야 선생을 암살하기로 하매 히 본국인 중 를 선생에게 密報한 자가 함으로 선생의 知友를 일본정부에 한 바47정부에서는 駐京日公使에게 명하야 일본은 國境外退出케 할 터이니 자객을 撤回하라.하매 守舊側亦 此에 응하야 池運永을 소환하얏다.

 

其時 朴日人 大井憲太郞 小林樟雄 등과 공모하야 본국정부를 전복코저 하다가 謀洩하매 守舊側益益 불안을 하야 히 선생일파의 退出하매 일본정부는 필경 선생을 小笠原島하니 此島絶海一孤島人煙은 희소하며 瘴癘別酷하야 선생이 到此不出幾月에 건강을 大損하야 그 초췌의 형용으로 島邊에 신음하는 見者聞者 皆熱淚치 안으리 업섯다.

 

其後 日廷當局의 양해를 하야 東京으로 暫歸하얏스나 무슨 사정이 하얏는지 선생은 北海島에 퇴거하라는 명령을 하얏다. 간신히 病軀하야 同島하얏스나 言語習俗하고 기후까지 懸殊한 만리이역이엇지 선생의 堪居이엇스리요. 더욱 일본정부로서 호의 지불하던 월 100원금의 생활비도 漸減되어 75원이 되며 다시 하야 5017원으로 되엇다가 乃終에는 그나마 지급을 중지하얏다.

 

在東京友人들이 심히 하야 선생에 대한 방면을 백방으로 운동하얏스나 하등 효과를 不遂하고 다만 약간의 을 친목회의 月損金가티 收送하야 히 선생의 조석을 하엿슬 뿐이엇다. 그 비참한 생활 중에 약 6년의 長歲月을 속태우고 辛卯年 東京으로 돌아온 선생은 오즉 안색이 초췌하고 단발뿐 蕭蕭하야 當年의 우아하던 그 풍채를 구경할 수가 업고 轗軻不遇이라도 하게 되엇다.

 

그러나 新朝鮮의 건설을 위하야 2천만 민족의 행복을 키 위하야 唯猛是進하는 일편단심은 小毫不弛하야 씨와 再起하얏다. 此機探窺守舊黨側으로서는 壬辰히 자객 李逸稙하야 선생과 2인을 암살코저 할새 는 상업으로 爲名하고 일본에 하야 선생을 하던 중 마츰 佛國으로 하는 洪鍾宇하야 그 辯說知慧히 이용할만함을 하고 利害로써 하고 恩賞으로써 함에 傾心하야 와 더블어 二心치 안이할 하고 의 소개로 선생과 밋 씨에게 면회를 하얏다.

 

奸誘로 인하야 선생을 하는 惡漢이 되엇스나 자못 대인의 氣宇가 잇고 且歐米漫遊하야 그 언행이 足劏할만 하며 時事痛論할 시는 經綸溢出하야 事業함을 是知하는 선생은 그를 점차 근접하게 하얏다. 그러나 그 후 未幾에 그의 행동이 頗異함을 간파하고 다소 회의가 不無하던 중 의 음모를 고하는 자 하야 十分 경계를 하면서도 대담한48선생은 그런 내색이 업시 여전히 그와 從遊하얏다.

 

그러나 은 일본은 도저 자기의 음모를 실현할 가 안임을 간파하고 본국의 守舊黨側과 교섭하야 선생을 如何히 하던지 타국으로 誘出하야 거사하기로 하고 1일은 선생을 하야 고국의 혁명은 선생의 獨力으로 능히 목적을 할 바가 안이라 가 중국에 留連한지 14년에 李鴻章男 李經芳과 더불어 친교가 잇스니 그의 소개를 하야 李鴻章과 더불어 大事하면 필히 그 목적을 하리라.역설한 바 선생은 히 반신반의하던 중 그 후 未數日燕京으로서 一書飛入하니 李經芳手札인 중 獻策異句同曲이라.

 

는 당시 駐京 袁世凱 李鴻章 간의 선생을 하는 奸策에서 한 것이라 선생은 다소 치 안음도 안이나 세월은 悾憁하고 기회는 漸遠하는데 희망도 보이지 안는 滄海一隅踽凉함과 함은 선생으로 忍爲할 바가 못 되며 且一面 李鴻章의 인격을 하고 斷然히 중국을 향하기로 결심하얏스니 즉 의 부자를 이용하야 扶桑에서 西楡에서 코저 함이다.

 

此機諸親友는 중국행의 위험ㅡ즉 의 간계에 할 것을 切言하야 그 행을 중지코저 하얏스나 선생은 李鴻章果偉人이면 齷齪하야 事功코저 함과 鄙行不爲할지며 설혹 此行이 그의 간계이라 할지라도 동양의 금일에 하야 일본에서 不如意하고 또 支那하면 何地이냐? 는 오즉 虎穴할 뿐이라... ..數言 하에 거절하고 甲午春 310일 선생은 京坂 지방 여행 爲名 하에 從者 일본인 和田延次郞하야 돌연히 東京을 출발하니 동행에 洪鍾宇 중국인 吳某하얏슬 뿐 大阪에서 무슨 준비로 幾日加留하고 23神戶發 西京丸으로 上海를 향하얏다.

 

혀 일본의 을 의하야 조선유신의 鴻業을 수립코저 하다가 一旦亡命의 객ㅡ 안이 流竄의 몸이 되어 혹은 小笠原孤島瘴氣中에서 혹은 北海島風雪 중에서 전후 10여년을 방랑하다가 不足與爲最後斷案하고 실망에 실망ㅡ 안이 실망의 일종 반동으로 扶桑國永別을 고하는 당시 선생의 情懷果何如하얏슬가 더욱 당시를 하기 26년 후 금일의 吾人으로써 하면...

 

嗚呼!! 上海埠頭慘血

 

舟中人은 총을 견우는 적국이것마는 海上天氣는 이상하게도 溫靜하야 神戶西京丸27일 오후 무사히 上海하얏다. 여관은 米租界한 일본인 경영49東和洋行으로 정하고 선생과 和田2층의 1호실, 2호실의 순서로 투숙하얏다. 28일은 오후 1시부터 居留地 구경차로 마차 3대를 구하야 오전은 각각 외출하얏다가 和田先歸하고 선생은 水陸長程히 피곤을 하야 脫上衣하고 침대에 하야 犬養木堂에게서 持來左傳을 탐독하얏다.

 

此際 외출하얏던 歸館하야 히 종래의 양복을 조선복으로 換着하고 선생의 거실을 배회하는 등 그 행동이 이상하얏다. 그러나 선생은 의연히 독서에 하다가 홀연 명함 1매를 和田에게 주며 그것을 松本西京丸長에게 전하라 하매 和田命敎에 의하야 門外하얏다.

 

和田跫音稍遠하야짐을 은 준비하얏던 六穴砲하야 선생을 하얏는데 그 第一發은 다행히 선생의 左頰을 범하매 선생은 蹶起하야 兇漢邀擊코저 하얏스나 空手이엇스며 第二丸은 선생의 복부를 범하얏다. 명함을 들고 2층으로 下去하던 和田砲聲連發함을 하고 곳 2층으로 하려 할 제에 喘息赤眼으로 急下한다. 何等兇變한 줄을 直覺하고 倉荒馳上한 즉 과연 선생이 門前昏倒되고 선혈이 신변에 淋漓하얏다.

 

和田은 그 昏倒한 선생을 일으켜 안고 선생님 선생님을 연방 哀號하얏스나 아모 氣跡이 업섯다. 아아!! 선생의 영령은 現世하얏도다. 아아 선생의 聲咳는 이 세간에서 영원히 침묵하얏도다. 年自弱冠으로 興國의 대업에 하고 동분서주로 그 九死하다가 그 未半한 중도ㅡ 이역의 孤銭하얏도다.

 

前途多艱을 선생이 히 예측치 안은 바 안일지오 偉人從古多慘劇을 우리가 모름이 안이나 선생의 최후가 이러케까지 비참할 줄이 잇스리요. 유신의 基柱가 끈허졋스니 새 집의 上樑에 구하며 迷津의 등대ㅡ그믈엇스니 鷄林의 형제 어대로 갈거나. 東和樓上海風尙寒한데 피다르고 말 갓지 안이한 和田의 어린 서생 한 사람뿐이다. 다 식은 선생을 정신업시 끌어안고 痛哭罔措할 뿐ㅡ 오호 甲午 328일 오후!! 是時 선생의 춘추는 겨우 44세이며 距今二十有六年前.선생 遭亂中外發布되매 세인의 분개와 동정은 恰然하얏다.

 

특히 일본 諸新聞紙는 논조가 非常히 격렬하야 를 호외로 천하에 告知하며 선생 생전의 내외국 知友들은 善後策키 위하야 金氏友人會를 조직하고 爲先 遺骸收拾次齋藤新一郞 岡本柳之助上海에 파견하얏다. 兇漢 洪은 사건 발생의 翌日 米國警官에게 체포되며 上海列國領事在北京列國公使50하야 支那總理衙門을 향하야 을 상당한 죄형에 처하고 한국정부와 교섭하야 선생의 시체를 능욕치 못할 조건하에 한국으로 송환하라고 요구하얏스나 선생 암살을 慫憊李鴻章此要求不採할 뿐 안이라 上海道臺某에게 訓電하야 洪鍾宇十分 보호하야 의 시체와 히 군함으로 한국에 送歸하라 內命하얏다.

 

선생의 遺骸를 수습키 위하야 東京友人會로서 諸氏西京丸長과 교섭하야 郵船으로 遺骸를 일본에 移奉하기로 하고 幾日某日 朝靈柩를 부두에까지 하얏는데 홀연 居留地官憲으로부터 靈柩出航不許함으로 그 관헌과 히 영사관에 하야 그 이유를 하고 한즉 靈柩去處하얏다. 일동 특히 和田放聲痛哭하얏스나 靈柩支那官憲하야 히 군함으로써 仁川搭送하얏다. 事旣至此岡本 등도 如何히 할 수 하고 東京으로 空歸하매 友人會에서는 靈牌하야써 靑山하야 애도의 를 표하얏더라.

 

선생의 遺骸仁川으로 京城하매 李鴻章은 조정에 향하야 長文祝電發來하얏스며 守舊一派의 희열은 극에 달하야 洪鍾宇하얏다. 京城駐在 각국 公使히 조정에 향하야 선생 遺軆에 능욕을 가함이 不可함을 累勸하얏스나 그것은 聽而不聞하고 414京城40許漢江岸 楊花津頭에서51大逆不道의 죄명으로 八裂의 참형을 追行하야 京城裊示하고 四肢各道廻示하고 軀軆漢江하얏다 하며 혹은 그대로 放乘하고 그의 收拾을 엄금하야 蠅犬吸噬하얏다 한다.

 

오호라 千古國士의 신상에 大逆不道하며 하야 그의 가족을 하고 하야 그를 총살이 오히려 부족하야 死後의 능욕을 추가하얏도다. 兇惡果如何한가. 是時 甲斐軍治라는 일본인이 히 선생의 遺髮屍衣盜取하야 東京本鄕眞淨寺에 매장하얏더라.(수년전에 현 保寧郡守로 잇는 선생의 양자 金英鎭씨로부터 東京의 선생 遺髮하야 牙山에 안장하얏더라.

 

多方面으로 先生性格

 

선생의 實蹟을 간단히 적엇도다. 이제 선생을 다시금 추모하는 정을 不堪하야 히 선생의 성격 기타에 하야 탐문한 대로 적고자 한다.(선생을 하야 해외에서 다년 고초를 한 모씨의 말슴에 의함)

 

선생은 제일 이엇다. 그는 사람이나 을 대할 시는 히 그 본체 그 진수에 하야 그 순수를 발견할 뿐이오 그 표면에 노출하는 그 무엇이라 함과 한 관념은 眼中初無하얏다. 선생의 심중에는 大人하고 小兒하얏스며 인습이 하고 惰力하얏스며 그저 사람이 하고 진실이 하얏슬 뿐이엇다. 누구이나 하여라 내 손목 여긔 잇노라함은 그의 待人第一主義이엇다.

 

그래 自幼時同侔들과 從遊할 시에도 溫情하야 鄕黨幼少年혀 그를 하얏다 하며 京城養家하야 현 高等普通學校 跡에 잇슬 시는 그 前家金弘集이 거주하야 朝暮相遊하얏는데 弘集家貧하야 식사가 함을 한 어린선생은 이것이 심중에 불안하야 자기 食床하면 하야 庭垣 우흐로 弘集에게 보내엇다 하며 그의 仁風은 성장함과 益濃하야 東京에 체류할 시에는 日訪하는 서생들에게 滿幅同情을 표하야 혹 100원 혹 10원 그리하다가 금전이 혹 하면 히 자기의 旅具하야 그의 인정에 하얏스며 선생의 최후를 和田小笠原謫居할 시 우연히 알게 되어(和田의 그 때 9) 를 극히 애무하야 或養或敎에 애무을 극히 한 바 그는 그 恩愛하야 최후까지 선생의 함이라 하며 선생은 일즉 儒敎를 형식의 라 하야 철알기부터 를 배척하고 佛敎篤信하야 선생의 수양과 박식은 에서 하얏스며 오즉 형식을 하고 사람을 사람 그대로 대하는 선생은 우정이 하야 魚允中 徐光範 등 동지 십수인의 선생에게 心腹한 것은 물론이오 東京52망명한 시 일본 幾多名士相從할새 一次面對하면 곳 知友가 되얊憂樂共分한 중 福澤諭吉, 頭山滿, 犬養毅 등과는 로 막역의 간이엇다 한다.

 

그리고 선생은 溫厚暢達이엇다. 小事에는 당초에 시비를 不爭하며 자기의 私事關係로 인하야 疾言遽色함과 追逐者 何人이라도 발견치 못하얏다 한다. 詩書에 탐하며 풍류를 하고 且圍碁하야 일본에 할 시는 當地棋士來訪이 빈번하얏는데 선생은 對手側如何에게 대하야도 을 취하는 하며 최후까지 담소 중에 勝負相半케 하얏다. 傍人이 그 이유를 하면 圍碁라 함은 遊具이니 최종까지 원만히 하얏스면 그의 최선을 한 것이라 거긔에 何特勝負하야 적게나마 對手側의 감정을 케 할 필요가 何有한가 하야 선생은 타인의 감정을 그대로 살림을 最喜하얏스며 恒曰 자기의 운명에 무관한 凡凡小事에 자타의 감정을 상함과 함은 의 본성의 不許하는 바라 하얏스며 且金錢의 관념은 염두에 初無하야 一自甲申事變 이후 全家滅盡되고 일본으로 망명하야 東京할 당시 隻分이 수중에 할 리가 한지라. 그러나 능히 교제하고 능히 施慈하야 北海島謫居時한 외에는 少毫 금전의 하얏나니 는 물론 선생의 인격을 하는 諸知友喜贈에 인함이라. 모 상점 혹 요리관에 지불할 하면 문득 2매의 서신을 하니 若第一受信人에게 불행 所持金하면 第二受信人하라 함이다. 受信人이라고 선생에게 책무를 은 물론 안이며 오즉 선생의 知友가 될 뿐이다. 그러하나 선생의 그 2매 서신은 小切手以上하얏다 함과 함은 족히 선생의 用錢法할 것이다.

 

선생은 실로 무쌍한 천재이엇다. 제일 총명이 超逸하야 能詩能書하며 일본에 망명한지 불과 3개월에 일본어를 정통하얏다. 이런 말이 잇다. 엇던 날 所看事하야 犬養鐵道會社長 小野某를 방문하얏는데 禮畢에 선생은 예의 유창한 口調一場談論하고 犬養時時 此對辯할 뿐인 바 선생의 하매 주인된 小野犬養을 향하야 일본어의 교묘를 嘆賞하며 足下의 일본어는 언제 그리 연구한 것인가試問하매 滿場大笑하얏다 하며 또 연회석에 회원이 如何히 다수일지라도 한번 인사를 하면 그 후 何時이라도 그의 共記하며 선생은 如何에게 하는 修書라도 閣筆再考하는 絶無하다. 그런데 선생의 42세 시(壬辰)北遊問題53李鴻章에게 修書할새 그래도 이오 내용이 중대함으로 書畢再見하얏는데 不幸一字함이 한지라. 선생이 喟然在傍友人에게 余亦衰하얏도다하얏다 한다.

 

그리고 선생은 더 말할 수 업는 改革兒이엇스며 創造兒이엇다. 외부에 浮上虛僞함에 치 안이하고 聖髓하는 한 선생으로는 자연히 그러치 안인치 못하얏다. 이러한지라 혹 事爲加工하야 完美함과 함은 선생의 長能이 안이라 朴泳孝씨와 함은 당시 선생과 萬事同謀하얏스되 그 長能은 선생과 정반대로 창조보다 或事修成하얏나니 요컨대 兩璧相須하야 조선의 維新함이다.

 

선생은 和平悅樂으로 하야 幾年을 동거한 으로도 선생의 無聊臥床不見하얏다 한다. 무시로 書繪하며 혹은 고인의 시가를 하며 혹은 隣居幼少年談美作樂하며 그러치 안으면 교외에 하는 등 일시라도 無聊度過하는 하며 且人委訪함과 하고 으로 하야곰 자기를 하게 하며 그리하되 선생의 所過處에는 항상 하얏스며 한 선생은 自奉함은 스스로 不許하야 至近親友이라도 그의 생일이 何日인지를 不知하얏다. 험악한 운명을 목전에 하고 支那코저 하던 甲午春에 선생이 1일은 同留 柳赫魯 기타 2,3인을 향하야 一夜宴樂을 청함으로 應從하얏는데 上海慘禍한 후에 생각하면 그 날이 즉 선생의 생일이엇다 함은 當夜에 참석하얏던 현존 某 知友의 눈물지우며 하는 말이다. 耶穌基督이 십자가에 當夜에 제자들을 하고 橄欖山한 고사와 異調同曲이라고 할가나.

 

寬厚暢達의 선생은 꽤 戱謔에도 하얏다. 망명으로 처음 東京하얏슬 시는 인력거를 하면 近遠을 불문하고 1, 10, 100원 손에 쥐이는 그대로 하야 혹 狂人이 안인가 하는 하얏스며 언제는 伊藤博文修禪寺 溫泉場하야 大川旅舘하얏다. 翌朝同舘할 새 茶代伊藤500원을 함으로 선생은 일약 1,000원을 하야 지금까지 當地의 일화가 되엇다는 말도 잇다.

 

世機한 선생은 평상 例語 중에도 도 무슨 예언가티 된 말도 적지 안이하다. 강원도의 金剛山ㅡ 하면 지금은 세계적 名地가 되어 내외국인의 遊賞接踵하나 사오십년 전의 당시는 오즉 金剛뿐이엇다. 선생은 戱語가티54조선에서 외국인의 할 것은 오즉 金剛이라. 金剛不出 20년에 조선의 金江이 되리라 하얏스며 又曰 京城은 적어도 漢江京城全市하는 시에 로 신생활의 서막이 하리라 하얏다. 금일에 하야 하면 皆適中한 듯 하며 又曰 조선의 首府平安 이북으로 치 안이하면 조선의 大成하며 그리고 위대한 민족성을 치 못하리라 하얏다 하는 바 此亦 우연한 말슴이 안인 듯 하다. 此外에도 선생의 남긴 逸事逸話할 것이나 探知한 점도 하며 且現에 전하는 것이라도 근거가 不確함으로 逸話는 이만 하고

 

結辭가티 한마디

 

선생은 서구 풍조가 막 드리밀리고 동양의 長眼이 겨우 깨고저 하는 19세기 말엽에 不幸其生多艱多頑한 조선반도에 하야 귀신가튼 明見과 하해가튼 理想夙懷하고 斷斷 其盟으로 如何히 하면 이천만의 민족을 黑洞 洞中에서 引出하며 如何히 하면 삼천리 조선을 세계적 沈淪으로부터 拯濟할가 하야 頑冥無覺守舊黨과 도전하며 1일의 한 일본과 하야 着着巨手漢城 一隅하던 중 計左力弱하야 소기의 만일을 不達하고 異域風霜萍蓬의 몸이 되어 전후 10년은 落日出月에 전후 피끌코 속태이다가 최후 一縷의 희망을 支那하고 憔顇한 그 形軀上海埠頭에 옴기자마자 흉악한 자객의 일격 하에 萬里孤魂하고 하얏도다. 鞠躬盡瘁되어 死而後乃已이라 하면 선생의 경우에 庶幾할는지? 아아 하매 感淚自先하야 무엇이라 形喩할 길이 업도다. 로 그리우는 선생의 성격에나 대하야 數行加記하고 느낌만흔 이 기록을 마치자.

 

선생은 至仁至誠 多才多智 毅魄大膽 寬和暢達의 세계적 위인(기자의 懇願이오니 히 선생을 과찬하는 형용이라 생각지 마시오)이다. 襟懷에는 언제던지 光風霽月宿하며 그의 胸底에는 자유 위대의 심장이 하얏고 그 일상의 언어에는 일종 특유의 어조를 하야 高邁醇眞한 중에도 明快靈活詩風著色하야 處處異彩하는 바 이나 하면 히 위대ㅡ 우애에 임을 感知하며 선생의 幼少年에 대한 히 그 心底一切愛情의 간단한 縮圖이엇는 듯. 아아 一方에는 可恐의 도전이 하고 他方으로는 如此至愛流不絶! 是偉人兩極이라고 할가나!55世間一切의 웅대ㅡ 此間하얏도다. 이뿐만 안이라 에 임하야 明辨不急하며 을 대하되 純實無僞함은 輕裝小艇多島海間縫出하는 듯 하며 滾滾淸泉岩穴로부터 유출함과 하얏도다. 一言으로 하노니 吾人은 사업의 에서뿐 안이라 인격의 에서 선생을 조선 근대의 大産物ㅡ 안이 세계적 위인이라면 그리 못한 것이 업다 하노라. 로서나 으로서나 로서나 으로서나 으로서나 悉皆大, , 吾人最尊敬, 最愛慕할 인물의 一人은 오즉 선생 뿐이라 한다. 과연하다. 이야말로 한 층 두 층 置重하야 方尖塔가 안이오 白頭山上上峰히 전혀 强期치 안이하고 자연히 한 것이며 그 이야말로 一草一木하야 庭園公園이 안이오 대지의 雨露에 스스로 鴨祿邊 大森林이라 彼其大하고 其醇하야 양의 가죽쓰고 세간에 俗偉人과는 실로 天壤하도다 그 경우!!

 

아아 선생의 그 偉績 그 성격 今世來世萬萬世 우리 형제 안이 천하 億兆蒼生의 느낌, 생명되기에 족하리로다.

선생을 愛慕함이 한 마음으로 唐突이 이 글을 하얏스나 참고가 완전치 못하고 인쇄시일도 頗急하야 杜撰이 만흘 것이웨다. 추후 발견하는대로 考訂且補記키로 하오며 삼가 우리의 머리 우에 洋洋히 임하신 선생님과 밋 여러 애독 형제에게 사의를 표하나이다.(기자) 개벽31920 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