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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슈퍼스타 감사용

형과니 2023. 6. 21. 13:03

21. 슈퍼스타 감사용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1-08-31 13:45:21

 

 

 

인천 연고 야구팀 소재 세상 향해 희망 던지다

[영화, 인천을 캐스팅하다] 21. 슈퍼스타 감사용

 

 

투수 감사용은 냉정히 따져보면 '슈퍼스타'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멤버였으니 슈퍼스타가 맞긴 하겠지만 성적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프로의 세계에서 '슈퍼스타'라는 칭호는 어불성설이다. 반어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스크린 속의 '슈퍼스타' 감사용이 아닌 필름 밖의 '삼미슈퍼스타즈' 감사용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170, 몸무게 70, 작은 손, 게다가 왼손잡이' 삼미슈퍼스타즈 투수 감사용은 애초부터 프로의 마운드에 설 수 있는 재목이 아니었다. 그가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한편의 '영화'.

 

감사용은 중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서 마산고와 인천체전을 거치며 투수로 뛰었지만 그런저런 선수였다. 대학문을 나섰지만 그를 불러주는 실업팀은 아무데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야구선수가 아닌 일반직으로 경남 창원시에 있는 한국특수강(삼미계열)에 취직했고 직장 동호회에 들어가 취미 삼아 공을 던졌다. 그래도 학교에서 투수한 가닥이 있어서 아마추어팀에서는 군계일학이었다. 그가 이끄는 팀은 창원지역 7개팀 토너먼트 대회에서 우승을 한다.

 

그러던 중 모기업인 심미그룹에서 프로구단을 창단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는 프로입단 테스트를 받게 되는데 마침 마산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OB베어스와의 연습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에이스 인호봉의 호투로 삼미는 2점을 먼저 따놓은 상태였다. 이어 테스트용으로 감사용을 5회부터 마운드에 올린다. 정식 엔트리에 끼지도 못한 그의 투구에 OB베어스 선수들은 연신 헛방질을 한다. 결과는 21 삼미 승.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어디서 나타난 괴물투수냐 싶어 감사용에게 우르르 달려갔다. 그는 결국 삼미슈퍼스타즈의 선수가 된다. 그런데 그가 선발된 이유는 딱 하나, 그 팀에 좌완투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1151세이브. 5년간 그가 올린 성적이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감독 김종현)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창단된 인천연고 구단 삼미슈퍼스타즈의 패전 전담 투수로 활동하던, 실존 인물 감사용의 야구인생을 그린 영화다. 일종의 휴먼스토리이다. 이름과는 달리 스타 선수 한명 없는 삼미는 개막하자마자 꼴찌팀이 된다. 결국 그해 188(1565)라는 초라한 성적을 올린다. 이 승률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악의 불명예 전적이다.

 

상대 투수들은 상대팀이 삼미라고 하면 서로 출전하겠다고 몸을 풀었고, 어쩌다 삼미가 이기기라도 하는 날엔 사람들은 관중석을 빠져 나가며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라며 비웃었다. 감사용(이범수) 역시 선발 등판 한번 하지 못하고 '패전처리투수로만 마운드에 오른다. 팀에 패색이 짙어지면 시도 때도 없이 나가는 마무리 투수. 상대팀은 감사용이 나오면 감사해 마지않을 정도다. TV중계 캐스터도 그가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면 으레 상대팀의 승리를 확신하며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마쳐야 한다는 멘트를 날린다.

 

그러던 중, 그에게도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최강팀 OB베어스, 그것도 20연승을 눈앞에 둔 미끈한 간판스타 박철순(공유)맞짱뜨는 경기다. 삼미의 투수진은 누가 봐도 질게 뻔한 경기의 등판을 서로 미루고 급기야 기회는 감사용에게 넘어온 것이다. 그것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선발 등판이다.

 

줄거리는 어찌 보면 단순명료하다. 열정은 있지만 재능이 부족한 어느 야구 선수가 세상의 무시와 편견 속에서도 묵묵히 제 갈길을 간다는 내용이다. 흔히 듣고 보아왔던 인간승리 드라마와 다를 게 없다. 어느 세상이나 승리한 자를 더 기억해주는 것은 마찬가지이겠지만 스포츠, 그것도 프로 스포츠의 세계는 그 냉혹함이 더 한 곳이다. 승부의 세계에서 패자는 기억되지 않는다. 다만 잊혀질 뿐이다.

 

박철순, 선동열, 최동원, 이승엽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 그러나 1등만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국 프로야구가 영웅만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듯 이 세상을 이끌어 온 주체도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다. ‘1등보다 꼴찌가 더 많은 세상, 비록 꼴찌의 자리에 있다 해도 결코 그들의 인생마저 꼴찌는 아니다.’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사실 감사용이 나오지 않으면 그날 삼미의 경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작은 꿈과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감사용은 인생에서 최고가 되진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9회말 쓰리 아웃까지 최선을 다했던 진정한 슈퍼스타이다. 끝까지 던지고 싶다는 무명투수의 작은 소망은 그 어떤 강속구보다도 묵직한 여운을 남겨놓는다.

 

이 영화의 주요 촬영장소는 인천이 아니다. 그렇지만 인천 연고 야구팀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는 분명 인천 영화다. 삼미슈퍼스타즈는 당시 인천시민의 애환과 정서를 고스란히 담은 팀이다. ‘외인구단이라는 별칭이 붙은 삼미슈퍼스타즈는 이름과 달리 슈퍼스타한 명 없이 외지에서 온 한물 간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어쩔 수 없이 스타가 즐비한 구단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인천은 외인부대란 이미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이다. 뚜렷한 지방색이 없고 팔도 출신들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온 이방인들이 용광로 속에 함께 용해되어 살고 있는 도시가 인천이다. 당시 인천은 그 야구단처럼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서울의 변방 도시였다. 시민들은 세상살이에서 삼진 먹기 일쑤였고 난타 당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렇지만 피할 수 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인물들처럼 쉽사리 어깨를 늘어뜨리지 않았다. 그게 직구이던 변화구이던 그들은 세상을 향해 희망을 던졌다.

 

미국 물을 먹은 최고의 투수 박철순을 상대로 투구하는 감사용의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 이 장면을 그리기 위해 제작팀은 인천 도원구장을 비롯해 전국의 야구장을 뒤지고 또 뒤져야 했다. 총 스무 군데나 되는 야구장을 둘러보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구장은 1년 내내 스케줄이 예약이 되어 있다는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제작진은 여러가지 조건을 고려해 당시의 서울구장(현재 동대문구장)을 재현해 낼 장소로 목동야구장을 선택한다. 곧바로 섭외에 들어가고 1982년의 야구장으로 전면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20년 전 야구장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 있어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엇보다 야간 경기 장면을 위한 조명탑 개조 과정이었다. 숨 막히는 야간 경기 장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에 걸맞는 조명이 필수조건이었던 것. 하지만 목동야구장은 그 당시 8년 동안 조명탑을 켜 본 적이 없어서 전원 공급이 완전히 중단된 상태였다. 결국 제작진은 발전차 2, 발전기 일곱 대라는 어마어마한 전력을 자체적으로 끌어와야만 했다. 다음은 5만 관중이 집결한 빽빽한 관중석의 모습. 목동야구장은 외야석이 없었다. 300여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해 컴퓨터 그래픽으로 외야석을 꽉차게 채워 넣었다. 당시 삼미의 홈구장이었던 도원구장의 모습은 부산 구덕야구장이 대신했다.

 

그렇지만 구장 밖의 모습 등은 도원구장 주변에서 촬영했다.

 

인천은 흔히 구도(球都)’라고 한다. 야구도시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야구도시라는 명성과 달리 인천의 프로야구 역사는 굴곡이 심하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에서 인천은 삼미수퍼스타즈를 연고팀으로 삼는다. 1983년 재일동포투수 장명부를 데리고 온다. 그 역시 일본에서 한물 간 퇴물투수였지만 그를 앞세워 삼미는 잠시 반짝한다. 그것도 잠시 성적부진으로 1985년 후반에 이름조차 생소한 기업 청보핀토스에 팀을 매각한다.

 

청보 역시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한 채 1988년부터 다시 태평양돌핀스로 간판을 바꿨다. 태평양돌핀스는 1989년 연고구단으로는 최초로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지만 거기까지였다. 결국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운 현대유니콘스가 1996년부터 돌핀스를 인수하고 창단 첫해 준우승을 차지하고 2년 뒤인 1998년에는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구도(球都)’ 인천의 자존심을 세운다. 하지만 영광과 환희도 잠시, 현대는 이후 서울입성을 시도해 인천시민들의 원망을 샀고 기업의 쇠퇴로 서울입성이 좌절되자 새롭게 팀을 창단한 SK와이번스에게 연고지를 넘겼다.

 

다시 감사용 이야기로 돌아가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선발 등판이었던 박철순과의 대결에서 감사용은 끝내 진다. 영화는 기적을 선택하지 않았다. 영화 속 감사용은 여느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기적을 이룰 것만 같이 보였다. 하지만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그 경기에서 그 어떤 경기보다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주고도 패자의 이름을 달게 된다.

 

실제로 삼미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 한번도 OB 베어스를 이긴 적이 없다. 감사용이 프로 첫 승을 거둔 것은 1982523일 부산구덕야구장에서 벌어진 롯데자이언츠와의 경기이다. 6이닝 동안 4안타 3실점으로 막아내고 동료 투수가 뒷마무리를 해준 덕분에 53으로 승리했다. 끝내 그는 ‘1이란 완성의 열망을 이뤄내고 만다.

 

스크린에서든 실제 구장에서든 그곳은 완성에 대한 강렬한 열망의 장이다. 패전투수의 구슬픈 넋두리도, 며칠 전 감독 경질에 대해 문학구장에 난입해 유니폼을 불태운 SK 광팬들이나 이제 막 출사표를 던진 데뷔 감독이나 모두 다 완성을 염원했던 미완성의 강렬한 열망들이 아닐까.

 

때로는 그 열망 자체가 무엇보다도 값진 것임을 슈퍼스타 감사용은 말해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 모두가 이기고 싶었다며 울먹이던 감사용과 같은 존재들 일 터이니. 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