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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은성다방 시절Ⅱ  

형과니 2023. 6. 22. 08:55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은성다방 시절Ⅱ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1-12-20 12:04:10

 

마담 몰래'공짜 커피의 비밀'공유하던 낭만시대

11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은성다방 시절Ⅱ   

 

여종업원, 가난한 화가·시인 지망생 오면

음악 선곡 새로 해주거나 창가 테이블 '명당자리'로 안내

청하기도 전에 엽차 채워 주고 찻값 안 받는 '배려'

 

 

 

앞장에서, "1960년대 중후반부터 출입을 시작한 우리에게는 썩 그렇지도 않았지만, '속칭 마담 김윤희 씨가'우리 윗세대인 우문국 선생 연배에 대해서는 늘 '긴장감을 조성하지는 않았던' 이유가 첫째였을 것이다"란 표현을 했었다. 그 중에 '1960년대 중후반부터 출입을 시작한 우리에게는 썩 그렇지도 않았지만'이라고 한 구절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이렇게 쓴 이유는 '은성다방'의 주인 마담 김윤희 씨가 우리 또래에게는, 무언중에 우문국 선생들에게 보이는 태도와는 반대의 분위기를 풍겼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그 태도가 아주 노골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늘 은근했고, 또 잔잔한 듯 미소를 보내 주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짧고 또 그다지 따뜻하지 않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김윤희 씨의 태도는 '자기 다방의 분위기와 명성을 지키려는' 나름대로의 또 다른 상술이었을 것이다. 4, 50대 중장년층 예술인 상대의 품위 있는 다방이 20대 젊은 애송이들이 드나들면서 그 고귀한 분위기를 흐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 또래가 드나들면서였는지, 아니면 당신들끼리 무언가가 맞지 않아서였는지, 한상억(韓相億) 시인이나 김길봉(金吉鳳) 수필가들의 발길이 그 무렵부터 다소 뜸해졌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얼핏 옆 모습만 뵈었던 분들로 1962년 초대 인천문인협회 회장을 지낸 소설가 조수일(趙守逸), 김창흡(金昌洽) 두 분 선생, 이분들보다는 연배가 뒤지지만 시인 손설향(孫雪鄕), 조한길(趙漢吉) 선생, 그때 처음으로 얼굴을 보았던 랑승만(浪承萬) 시인, 홍명희(洪明姬) 여류시인, 여러 장르의 글을 쓰던 최은휴(崔恩休) 시인, 그리고 서예가 유희강(柳熙綱), 정재흥(鄭載興) 선생, 훗날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는 장인식(張仁植) 선생 등이다. 그리고 미술 평론가 김인환 선배를 처음 대면한 곳도 역시 은성다방이었다.

 

 

김인환 선배와의 만남은 무슨 전시회 자리였던 듯한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최병구 선생이거나 손설향 시인이 길 쪽 창가 4번 테이블에 앉았던 우리를 불러 대선배라며 인사를 시켰을 것이다. 그날 그는 열 살 나이차이가 나는 우리 애송이 대학생들과의 첫 인사를 데면데면, 그러나 호기 있는 웃음으로 넘겼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자신들 나름대로 시인이나 미술가를 지망하는 청년 대학생들이라는 점에서 얼마든지 이 다방에 드나들 수 있다는 그런 치기어린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윤희 씨의 눈에는 여느 대학생들이나 다름없는 소란스럽고 분수 모르는 한낱 철부지 대학생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다른 다방의 마담들처럼 철저한 상술로써 우리를 대했다면 훨씬 나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은성다방'은 그런 상술 다방이 아니었다.

 

우리를 내리 누르는 '은성'의 그 무언의 압력이 다소나마 누그러진 것은 두 분 후견인(?)과 몇 번에 걸친 검증이 있은 후였다. 후견인은 고등학교 때 문예반을 지도해 주신 국어과 최승렬(崔承烈) 은사 시인과 1966년 당시 인천문인협회 지부장이었던 최병구(崔炳九) 시인이었다. 물론 두 분은 모두 영원히 다시 뵐 수 없는, 우리 인천 문학계의 큰 어른으로 기억된다.

 

이분들은 다른 분들과 달리 우리 또래를 한없이 귀여워했다. 최병구 선생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두 번 우리를 이 별천지 같은 '은성다방'에 데려와 달걀 반숙이나 시커먼 '커피물'을 시험 삼아 먹인 (당시는 미성년자에게는 특히 커피가 굉장히 해로운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적이 있을 정도로 관계가 각별했다. 아마 당신 큰딸이 우리와 동갑인 점, 그리고 그 밑의 외아들이 우리와 같은 고등학교 2년 터울의 후배라는 점이 우리에게 정을 갖게 했는지 모른다. 이분이 그 시절 우리에게만은 차가워지려는 김윤희 씨의 눈길을 따뜻하게 바꾸어 주었던 것이다.

 

은사 최승렬 시인도 마찬가지로 든든한 보루(堡壘)였다. 최 선생은 자주 신포동의 이름난 대폿집 대전집이나 다복집으로 우리를 데려가 돼지 족과 두부동그랑땡 등 푸짐한 안주와 함께 소주를 마음껏 먹게 하고는 으레 이 '은성다방'으로 데려 와 커피를 사 주셨다. 최승렬 선생을 동반함으로써 우리는 여사의 미소 속에 든 날카로운 금속 조각을 피할 수 있었다. 최 선생은 거구이셨지만 한없이 다정다감한 시인으로 김윤희 씨가 인천에서 가장 존경하는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했다.

 

이 같은 형태로 얼마간의 나날이 지난 후, 그리고 몇 번 우리끼리만의 출입을 통해 마담에게 우리가 비교적 양순한 종자들이면서, 선대들과 같은 예술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인증되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우리는 마음 놓고 '은성'에 출입할 수 있었다. 하기야 선배 문화 예술인들 중에도 우리 젊은축들의 출입을 못마땅해 하던 분들이 상당수 있었으니, 마담의 경계심 정도야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같으면, 세상 흔한 다방 다 두고 그렇게까지 주눅이 들어 '은성다방'에 다녀야 할 일이 뭐란 말인가 할지 모르나 당시 우리로서는 인천 예술의 메카인 '은성다방'을 결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고급한 다방의 분위기와 드나드는 분들의 고매, 고상한 모습과 우리가 반드시 동화되어야만 주변으로부터 예술인으로서의 또 하나의 인증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글 서두에 "1960년대 중후반부터 출입을 시작한 우리에게는 썩 그렇지도 않았다"고 쓴 것은 이런 연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곡절 끝에 '은성다방'을 비교적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면서, 결국 마담만 몰랐던(지금까지도 모를) 참으로 기막힌 비밀을 만들어 내게도 되었다.

 

우리들 스스로도 예술인입네 하는 치기가 충만해서 기회만 생기면 은성다방으로 향했다. 물론 여자들도 젊은 우리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찻값을 지불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이 젊고 가난한 화가, 시인지망생들에게 여자들은 늘 따뜻한 성원을 보내주었다.

 

성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방에 들어서면 여자들은 이내 걸려 있던 음악을 푸치니의 '허밍코러스'로 바꾸어 준다든지, 먼저 우리가 말하기 전에는 절대 차 주문의 말을 먼저 입 밖에 내지 않는다든지, 그래서 무상으로 4번 테이블을 점령해 앉는다든지, 그리고 청하기도 전에 자주자주 엽차를 보충해 준다든지, 하는 것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난한 대학생들에 대한 아주 가슴 따뜻한 배려였다.

 

그러나 이런 배려는 주인 김윤희 여사의 영업 방침과는 큰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김 여사는 철저한 경영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 여사에게 이 따위 승인되지 않은 '우호(友好)'가 정면으로 발각된다면 여자들의 입장은 보나마나 난처해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우리나 여자들이나 그날그날 용케 그런 위기를 모면해 나가고 있었다.

 

몇 해 전, 인천중구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신포동 추억거리로 썼던 <은성다방 시절>이라는 글 중의 일부를 옮겨온 것이다. 1966, 가난했던 시절의 궁상리라고 할지, 낭만이라고 할지, 지금 읽어도 얼굴이 뜨거워지고 멋쩍은 웃음이 나온다.

 

아무튼 그 무렵 '은성다방'에는 미스 PC라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이들은 젊은 우리들의 딱한 처지를 얼마간 이해하고 있어서 심정적으로 늘 '성원'을 보내던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가 드나들 무렵에는 주인 마담 김윤희 씨는 매일 저녁 7시경이 되어서야 다방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그때까지의 매상을 계산하고 한두 테이블 어른들 자리를 돌아보고 먼저 퇴근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낮 동안은 우리가 갈 수 없으니 마담이 근무를 하는지 어쩌는지 상관이 없지만, 우리가 다방에 입장하는 오후 4, 5시 무렵은 PC 두 여자만 있었다. 그러니까 한 3~4시간은 이들이 다방 경영을 주관했다. 그래서 여자들이 우리의 등장과 함께 음악을 바꿔 주거나 임의로 차 주문을 하지 않거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란 늘 그렇게 우리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김 여사는 6시 무렵이나, 혹은 그보다 더 이른 시간에 문득 들이닥치기도 했던 것이다. 실로 이런 때가 난처했다.

 

흔히 다방 카운터에는 테이블 번호와 일치하는 플라스틱 번호판이 있었다. 그 번호판은 번호별로 오목하게 되어 있어서 예컨대 2번 테이블에 앉은 손님 셋이 커피 두 잔에 쌍화차를 주문했을 경우 커피를 표시하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 2개와 쌍화차를 표시하는 조각 1개를 2번의 오목한 칸에 넣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각들의 숫자를 단가에 곱해 찻값을 계산해 내는 것이다.

 

김 여사는 도착하자마자 우선 그 번호판을 들여다본다. 그때 테이블에 손님이 있는데도 플라스틱 조각이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불시에 김윤희 씨가 닥치면 PC는 재빨리 우리 머리 숫자만큼의 커피 플라스틱 조각들을 올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부터였다. 찻값이 없는 우리는 마담이 퇴근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들과 우리들이 비밀이었다.

 

몇 번 이런 경우가 있었는데, 마담이 먼저 퇴근하고 난 뒤에는 번호판은 도로 공칸이 되었겠지만, 그래서 우리도 그녀들의 미소를 뒤로 하고 무사히 다방 문을 나설 수 있었지만, 다음날이라도 마담으로부터 혹 우리 찻값을 추궁 당하지는 않았었는지 하는 궁금함이 45년이 지난 오늘, 그때 그들의 상냥하고 어여쁜 얼굴과 함께 떠오른다. 그들의 그런 아름다운 마음씨와 예술가들을 진심으로 대접하던 갸륵한 정성이 결국 가연(佳緣)으로까지 이어졌는데, 훗날 그 두 여자 중의 한 명이 인천의 우리 문학인 선배와 결혼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아마 1970년대 중후반의 일이었을 것이다.

 

/김윤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