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

인천의 집성촌-박촌동 밀양박씨,남촌동,논현동의 해주최씨

형과니 2023. 6. 22. 09:04

인천의 집성촌-박촌동 밀양박씨,남촌동,논현동의 해주최씨

仁川愛/인천이야기

2011-12-23 12:51:23

 

박촌엔 박씨

남촌엔 최씨 모여살았네

 

동네 이웃은 촌수를 따져 아저씨, 아주머니, 삼촌, 조카로 부르고, 함께 농사를 짓고 집안의 대소사가 있으면 온 마을이 나서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내일처럼 거들어 준다. 혈연중심의 농경사회의 전통이 남아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현대인들에겐 먼 나라 이야기다. 토박이보다는 일자리에 따라 거주지가 바뀌는 산업화와 급격한 도시화로 수백 년간 이어 온 집성촌의 명맥이 끊어진 지 오래다. 계양구 박촌동 밀양박씨, 남동구 남촌동과 논현동 해주최씨는 인천에서 그나마 집성촌의 명맥을 잇고 있다.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400여 년간 박촌동을 지켜온 밀양박씨

 

인천지하철 1호선을 타고 계양방면으로 가다보면 박촌이라는 역명을 만나게 된다. 한자의 뜻을 보지 않고선 그저 여느 역 이름처럼 스치기 쉽다. 박촌(朴村). 이름그대로 박씨들의 마을이다. 박씨들이 공기좋고 물맑은 이곳 계양구 박촌동에 뿌리를 내린 시기는 조선 현종때. 지금으로부터 약 4백여 년전이다. 박혁거세의 후손인 밀양박씨 중 충헌공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땅을 파고 살았다.

 

이곳에 정착한 밀양박씨 충헌공파에서 중시조로 모시는 분은 박강()할아버지다. 그분의 후손들이 박촌동, 병방동, 상야동 일대에 퍼져 살았다. 박촌마을은 5,60년대만 해도 대촌(大村)이었다. 당시만해도 한 동네에 100호가 넘으면 큰 마을로 불렸다. 한강과 가까워 물이 흔했고 농토가 넓으며, 산이 많아 풍요로운 농촌마을이었던 이곳도 1970년대 우리사회의 도시화, 산업화의 길을 피할 순 없었다.

 

선조들이 갖고 있었던 농토와 산은 자식들의 고등교육을 위해 하나둘씩 외지인들에게 팔려나갔고, 농사보다는 도시에서의 삶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흩어지게 된다. 집성촌의 의미가 점점 퇴색하면서 뿌리가 흔들렸다. 현재는 박촌동에 15가구, 병방동에 15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박촌동은 인천의 다른 지역에 비해 아직도 농촌적인 향취를 풍긴다. 곳곳에 텃밭이 있고, 농사를 짓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뛴다.

 

이곳 종중의 사무총장인 박진원(71) 어르신의 선친도 박촌동에 많은 땅과 산을 가지고 있는 지주였다. 해방후 농지개혁으로 많은 땅을 빼앗겼어도 전답과 산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적 계양산을 놀이터 삼아 산과 들로 뛰어다니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당시 이곳엔 노루와 토끼가 많았고, 개울엔 가재가 흔해 아이들의 놀이터로는 최고였다고 회고한다.

 

박진원 어르신에 의하면 예전엔 집안에 큰 잔치나 상을 당하게 되면 집안의 아낙들이 가서 큰일이 끝날 때까지 서로돕는 미풍양속이 있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가 내일처럼 도왔고 결속도 잘 됐다고 한다.

 

집성촌의 미풍양속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박촌동은 박씨들의 근간이자 뿌리다. 대대로 일궈온 땅이있고 조상들이 뿌리깊이 박아놓은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선조들의 전통과 맥이 지금 젊은세대로까지 이어지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논현동, 남촌동의 터줏대감 해주최씨

 

남동구 남촌동은 인천에선 뒤늦게 개발바람이 분 곳이다. 다른지역에 아파트나 빌딩들이 꽉꽉 들어설 때 벼 농사를 짓고, 과수원에서 배와 복숭아를 수확하며 풍년을 만끽했다. 인천에 남아있는 마지막 허파이자 오아시스였다.

 

남촌동도 90년대 초 풍림아파트 건설로 개발이라는 거대한 기류에 휩싸인다. 누대로 땅을 갖고 농사를 지었던 최씨들도 땅이 개발지역에 수용되자 보상을 받고 하나둘 떠나게 된다. 남촌동도 이때 개발이라는 막차를 탄다. 이곳에 300년 넘게 살아오면서 터줏대감 역할을 해오던 해주최씨 집성촌도 1990년 대 남촌동 일대 개발로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현재는 17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남촌동에 살던 해주최씨(전한공파)1950~60년대 만해도 70~80세대가 살았다. 벼농사, 밭농사,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씨족들이 서로를 돕는 인심좋은 동네였다.

당시만 해도 남촌동 주변엔 갯벌과 염전이 있었다. 최씨들은 생업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부업으로는 소금을 구워서 서울 등 외지로 팔러 다녔다.

 

이웃집은 아저씨네, 뒷집은 큰아버지네, 아랫집은 장조카네 등 모두가 한 가족이었다. 잔치가 열리면 마당에 튼튼한 무명천을 세우고 멍석을 깔아 2~3일씩 잔치를 열곤 했다. 한집에서 잔치가 열리면 아낙들이 모여 잔치상을 차리고 어르신부터 아이들까지 모두 모여 결속과 번영을 다졌다.

 

어르신의 생일엔 집안어른 40~50명이 한자리에 모여 아침과 점심을 같이 했고, 제사가 있는 날은 상을 차려 밥 한 끼라도 같이 나눠먹었다. 잔치 하고 남은 음식은 떡 한 쪽, 고기 한 점이라도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눠줬다.

 

남촌동 최씨 집성촌에는 음력 71일 당제때 소 한 마리를 잡아서 마을사람들과 나눠먹던 풍습이 아직도 전해오고 있다. 집집마다 돈을 추렴해서 잡은 소를 같이 나눠먹으면서 마을의 안위와 번영을 빌었고, 더위에 허약해진 몸을 보하는 영양 보충의 의미를 담고 있다. 농번기 전에는 도림동 남호정에서 매년 활쏘기대회도 가졌다.

 

해주최씨 전한공파 종중에서 총무일을 보고 있는 최정언(73) 어르신은 옛날 조상들은 이곳에 농지가 적어 어렵게 사셨다는 말을 어릴적에 들었는데 조상들이 열심히 일한 덕을 후손들이 보고 있다고 말한다.

 

논현동에 터를 닦은 해주최씨(판사복씨공파)500년 가량 집성촌을 이뤄 살았다. 50~60년대에는 70여 가구가 살았다. 이들도 1990년대 말 논현동이 개발되면서 집단이주의 경로를 밟았다. 주변에 묻혀있던 조상묘도 화장해 납골당으로 옮겼다. 논현동 개발로 인근으로 이주했던 최씨들은 논현동아파트가 건설되면서 다시 들어와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해주최씨 판사복씨공파 최일섭 회장은 논현동을 둘러싸고 있는 오봉산은 학의 모양을 하고 있어 논현동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쾌적한 동네였다고 회고한다. 현재 이 종중에선 종중 자녀 중 고등학교 입학생에게 장학금과 65세 이상 노인들에게는 쌀을 지급, 문중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

 

예전엔 인천만 해도 집성촌이 꽤 여러군데 있었다. 급격한 산업화 재개발로 자신들의 터전은 아파트나 도로에 내어주고 짐을 싸야 했다. 집성촌의 중종을 이끌고 계신 어르신들의 평균연령은 70세 이상이다. 그분들의 소망은 조상을 모시고, 전통을 지켜 온 자신들의 정신을 후세대들이 이어갔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