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 서구식 초등교육 기관 영화학교
1892~ 서구식 초등교육 기관 영화학교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2-02-03 13:47:55
1892~ 서구식 초등교육 기관 영화학교
단발머리 검은 교복 입고… 여학생도 근대식 건물서 공부
2012년 02월 03일 (금) 한동식 기자 dshan@kihoilbo.co.kr
▲ 영화학당 설립자 조원시 여사
지금은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은 아직도 ‘소학교’라 부른다. 어른들이 소학교를 고집하듯 ‘국민학교’에 다녔던 30대 후반까지는 여전히 초등학교보다는 국민학교가 더 가슴에 와 닿고 따뜻하게 들린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로 기록된 ‘영화학당’가 바로 인천에서 태동했다는 사실은 인천에 사는 우리들을 뿌듯하게 만든다.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인 1892년, 인천시 중구 내동 29번지에 설립된 영화학당는 우리나라 신교육 발상지로 기록되고 있다.
인천이 신교육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개신교가 인천을 통해 들어온 데서 비롯됐다.
개신교 목사로는 처음으로 1885년 4월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H.G. Appenzeller)목사가 같은 해 7월 19일 공중예배를 봄으로써 인천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를 세우게 된다.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교사를 겸하다 아펜젤러에 이어 내리교회 운영을 맡은 조원시(G.H. Jones)목사는 1892년 3월 지금의 내리교회 구내에서 강재형 전도사 부부와 함께 남자 어린이 3명과 여자 어린이 2명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것이 초등학교 교육의 시작이자 인천영화학당의 태동으로 기록되는데, 남학생을 가르친 학급은 후에 영화학교가 되고 조원시 부인이 여학생을 맡아 지도한 것은 영화여자학교의 시초가 된다.
조원시 부부는 학교 이름을 영화학당이라고 짓고 건물을 6칸으로 늘려 남학생 50명, 여학생 20명 등을 가르쳤는데 이것은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
조원시 부인은 스크렌톤(M.F. Scranton)여자선교사와 함께 이화학당 교사 출신으로 영화학당에서 산수와 영어, 찬미가를 가르쳤고 최헬렌은 한문과 국문, 성경, 지구약론, 붓글씨, 바느질 등을 가르쳤다.
교육과정은 1895년 공포한 소학교령에 준한 교과목을 채택했고 몇 과목을 더 보충해 중등 정도의 교육도 실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영화학당은 개화에도 앞장서 교직원과 학생들이 단발을 하고 흑색으로 염색한 교복을 입도록 하는 등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또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북돋아 주기 위해 신자가 기증한 나팔과 북, 고물 소총 등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해 각지에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학동들의 질서정연한 제식훈련 모습 등은 그 자체가 이색적인 풍경으로 인천의 큰 구경거리가 됐다고 한다.
영화학당 출신으로는 사후 친일행적 논란이 일었던 최초의 여성박사인 김활란 박사와 유아교육의 개척자인 서은숙 박사, 김애마, 음악가인 김영의 교수 등이 알려졌다.
영화여자학교를 나온 김활란 박사는 제물포 출생으로 미국 콜롬비아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화여전 예과 및 고등과 교수를 거쳐 재단이사장을 역임했다.
중구 율목동 출신인 서은숙 박사도 영화여학교를 거쳐 이화학당과 콜롬비아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이화학당 재단이사직과 함께 교수로 재직했다
김애마는 영화여학교를 거쳐 경성여전 보육부장을 지냈으며, 김영의도 영화여학교를 거쳐 이화여전을 졸업한 후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를 이수하고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했다.
영화학당을 거친 남학생으로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버린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가 꼽힌다.
영화학당에 이어 인천에서 관학(官學)의 효시는 지금의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인천외국어학교로 기록되고 있는데 학교에 대한 최초의 개념은 학교의 형태에 따라 구분돼 그 의미는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