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공책

안경(眼鏡) / 「애체덕」본 목참판(穆参判)

형과니 2024. 7. 5. 14:15

안경(眼鏡) / 「애체덕」본 목참판(穆参判)

잦았던 안경화(眼鏡禍)…왕외숙(王外叔)이 자살(自殺)도
안경(眼鏡)이 빚은 한(韓)—일분규(日紛糾)

1891년(고종26년)일본전권공사 대석정기(大石正己)가 고종을 알현하고자궁중에 들어왔다.궁중에서는 조그마한 소동이 벌어졌다.왜냐면 대석(大石)공사가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상의 어른을 뵙는 데는 안경을 벗는 게 예도인데 하물며 왕을 뵙는데 안경을 낀다는 것은 불손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내시들은 당시 통변인 현영운(玄暎運)을 통해 안경을 벗을 것을 요구했지만 무슨뱃 심인지 막무가내고 왕을 알현했다.

고종도 여간 불쾌해하지 않았으나 외국사신에게는 비위를 거슬리게해서는 안된다는 왕의 모토에 따라 아무 일 없이 알현은 마쳤다. 한데 조정에서는 이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어 일본정부에 나라를 얕보고 왕에 불경이라고 정식항의문을 전달하였다. 일본정부는 이 항의를 묵살하고 대꾸를 하지 않았다. 왕의 노여움에 보답할 길이 없었던 근신들은 애꿎게도 통변인 현영운(玄暎運)을모함하여 유배시킴으로써 이 안경사건을 일단락 지었던 것이다.

1882년 중국 이홍장의 알선으로 초빙 돼온 독일사람 묄렌돌프도 눈이 나빠 꼭 안경을 끼어야 했다.

그가 청나라를 떠나 올 때 이홍장으로부터 조선의 왕을 뵐 때는 조선식으로 큰절을 세 번 하고 안경 벗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타이름을 받았던 것이다.

묄렌돌프가 그의 아내에게 부친편지로 그 첫 알현광경을 실 펴본다.「왕은 일단 높은 자리에 앉아 계셨고 나는 예복에다가 훈장들도 달고 있었는데 세 번 허리를 굽혀 큰절을 하였다. 그리고서 통례대로의 인사를 하고 나니 왕(王)이 일어서서 답례를 하였다. 왕은 그리고서 나에게 안경을 쓰라고 하시었는데, 나는 본래 동양식으로 안경을 벗었던 것이다.(중략(中略))이어 나는 조선말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이것은 전날밤 조영하(趙寧夏)가 가르쳐 주어로마자로 무턱대고 연습해 두었던 것이다.

Sini kuikuke wa pollo posini, kamtsick hawa, kalliektsinsim haolkosini, kuntsu kesoto kangsine sienimhaopsikirul paramnaita.(신(臣)이 귀국에 와 불러보시니 감칙하와 갈력진심(竭力尽心) 하올 것이니, 군주(君主)께서도 강신(降臣)에 신임(信任)하옵시기를 바랍나이다) 왕은 이에 퍽 호감을 가지신 모양으로 내가 물러나올 적에 일부러 일어서시 었다.」

순종(純宗)은 근시안(近視眼)이었다

외국사신들의 불손한 태도만 보다가 안경을 벗고 조선식으로 큰절을 하며 모르는 후리말이라도 애써하는 이 묄렌돌프를 보고는 호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그에 대한 고종의 신임을 두고「애체덕」(주(註)=옛날에는 안경을 애체라 불렀으며, 안경 덕분이란 뜻이다)이라 하였고, 옛날독일에서도 윗사람 앞에서는 안경을 벗는 버릇이 있는데 그 덕분으로 왕의 신임을 얻었다고 비꼬는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고종은 구습을 버리는 데는 소극적이었으나 개화에는 대담한동조자였다. 그런 분이 안경을 두고 관심이 그토록 컸다면 그 이전왕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헌종(헌종(憲宗))때 왕의 외숙이 안질이나 안경을 쓴 채로 왕의 옆을 지나갔다. 헌종은 그 불경에 여간 노하질 않았다.

곁에 있던 신하들에게『외숙(外叔)의 목이라고 칼이 들지 않을꼬』하고 뇌까리매 이 말을 들은 안경낀장본인은 며칠을 고민하다가 끝내는 칼을 목에 찔러 자살해 버린 것이다. 영국여인 버드비숍여사가 만나 뵌 황태자시절의 순종은『건강에 중대한 결함이 있어 보이며, 체질이 허약하고 꽤 비만하였다. 또한 강도의 근시안이었는데 예법상 안경을 써서 안 된다 하니 보기에 딱하기 이를 데 없다』하였다. 합병 후 순종은 공석상이 아닐 때는 강한 근시안경을 쓰고 있었다 한다.

강화도에서 일본군함 운양호를 포격한 데 대한 사죄형식의 수신사(修信使) 김기수행(金綺秀行)이 일본에 입경할 때 한결같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눈 나쁜 사람이 많은가 보다고 일본사람들은 생각했지만 실은 열등국민을 대한 고자세의 과시로서 안경을 썼던 것 같다. 시위용의 안경인 것이다.

서재필이 개화내각의 성립을 보고 미국서 달려와 친로파의 책동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파천(播遷)중인 고종황제를 배알하고 대궐로 돌아가실 것을 간청하였다.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친로파 이범진(李範晋)은 서재필을 모략하길 다음과 같이 하였다.『황제를 뵙는데 외신(外臣)이라 칭하고 안경을 쓴 채였으며 권연을 피며 뒷짐을 지었으니 조정이 통틀어 분통해하였다』고.

대낮에 별이 뵈는 수정경(水晶鏡)

중국에 처음안경을 들여온 네덜란드사람 이름을 따라「애체」라고 불리었던 안경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와있던 명(明) 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 중 현소(玄蘇) 가다 같이 늙었음에도 안경을 꼈기에 잔글씨를 거뜬히 보아 넘김 다는데 조야(朝野)가 감탄한데 비롯된다.

선조 때 이미 하사품목(下賜品目)으로 안경이 들어있었으며 순조 때는 꽤 민간에 보급되어 180여 년 전 김득신(金得臣)이 그린 팔기도(八技図) 그리고 1백여 년 전 혜산(蕙山)이 그린 그림가운데에 안경 쓴 인물이 그려져 있을 정도다.

초기안경은 귀중품이었기에 수정알에 금으로 알 테를 하였고, 노끈을 매어 합치면 하나가 되고 펼치면 두 개가 된다 하였다. 이 절접식(折接式) 안경에 코걸이가 달리고 그 다리테는 귀걸이 식이면서도 마치 작대기가 양쪽뒷머리를 짓누르듯한 디자인으로 보편화하였다. 안경알은 주로 수정이었으며 누렁, 검정, 파랑 따위가 있어 색안경으로도 많이 썼다. 특히 언양(彦陽)과 경주(慶州) 산 수정은 품질이 뛰어나 김완당(金阮堂)의 말을 빌면극상품의 수정안경을 끼면 대낮에도 별이 보인다 하고 왕에게 안경하나를 선사하기까지 했다.

당시 안경은 지름이 2촌(寸) 안팎이고 수정의 두께는 1분(分) 7이(厘) 내외, 테는 조개껍질(초기)이나 자라껍질(후기)로, 이 역시 굵기가 2분 오리(分五厘)나되어 개화기 때 한국에 온 외국사람으로, 하여금『안경이 너무 무거워 한국사람의 코가 납작해졌나 보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안경에서 코걸이가 없어지고 테가 가늘어져 은터, 금테가 되고 무테안경까지 발전하였고, 다시 둥글던 알이 보스턴형, 웰링턴형, 폭스형, 레디즈형으로 변화해 가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466919681217m1042&set_date=19681217&page_no=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