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로 - 조선 6대 간선도로
강화로 - 조선 6대 간선도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1 17:37:54
▲ 서울을 출발해 강화와 교동을 잇는 강화로는 양천, 김포, 통진 등의 군현을 거쳐 이곳에서 염하(조강)를 건너 강화도로 진입한다. 갑곶나루아래 강화대교가 놓여있다. 사진/조형기전문위원·hyunphoto@naver.com
49.강화로>1< - 조선 6대 간선도로
강화로는 서울에서 강화도·교동도까지 연결되는 도로로서 양천·김포·통진·강화 등의 군현을 경유한다. `도로고'에 제6로로 명명된 강화로는 중림도(重林道)가 중심이 되어 본선과 분기로를 관리하였다. 중림도 소속의 역 가운데 남산역은 강화로 본선 연로에 위치한 유일한 역이었다. 문헌으로 남산역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1919년에 발행된 1:50,000 지형도 경성 도엽에는 현재의 화곡6동, 강서구청 자리에 역촌 마을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촌 마을에 역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 마을이 실제 남산역에 딸린 역촌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10년대까지 이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대대로 남산역이 유일하므로 남산역이 이 부근에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선 도로변에 위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강화로와 직접 관련된 역으로 종생역이 더 있다. 이 역이 소재했던 곳은 지명사전에도 등장하듯이 김포시 대곶면 율생리로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지명총람(권17, 275쪽)'은 종생이라는 마을이 ‘종생리, 종생역, 역촌, 역말’로도 불리며, ‘율촌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종생역이 있었음’을 명시해준다.
▲ 양화도와 당산철교. 양화도의 북안은 서울시 합정동의 감투봉 외인묘지(당산철교 북쪽 끝)이고 남안은 선유도이다. 잘 조성된 한강공원 산책길을 사이클을 탄 시민들이 질주하고 있다.
강화도는 몽고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부터 27년간 임시조정이 머물렀으며, 조선시대의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 때에도 인조가 몽진했던 곳이다. 이후 조선 조정은 강화도의 군사적 중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면서 1710년(숙종 36)까지 섬 전체를 요새화하기에 이른다. 그 구체적인 증거들이 섬 주위에 남아 있는 진보와 돈대, 그리고 강화읍내를 둘러싸고 있는 내성과 외성이다. 이후 개항기 때에도 병인양요(1866년)·신미양요(1873년)·운양호 사건(1875) 등 강화도를 둘러싼 군사적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강화로가 비록 노선이 짧고 한강 수로와 가까워 경제적 기능이 크지 않았음에도 `도로고'의 단계 때부터 조선시대 6대 간선도로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가 섬으로서의 군사적·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축조된 군사시설들은 오늘날 강화도로 관광객들을 흡입하는 최고의 관광자원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세의 측면에서도 강화로는 일찍이 대로로 등장할 수 있었다. 평야부에서의 육로는 보통 하천 연안을 따라 입지하거나, 혹은 충적지와 구릉지의 접촉부에 입지한다. 자연제방이나 하안단구로 구성된 하천 연안은 기복이 적고 취락과 가까워 쉽게 육로로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화로는 이러한 지세 위에 놓인 대표적인 대로로서, 한강과 소지류들이 만들어 놓은 해발고도 10m 내외의 충적지와 최고 고도 40m 이내의 낮은 고개만으로 연결된다.
이에 강화로는 어떤 대로보다 그 노선이 직선 거리에 가깝고 기복이 적어 최상의 교통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대동지지'에 수록된 10대로 가운데 강화로는 제6대로로 명명되었으며, 주요 경유지와 함께 구체적인 노선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강화로는 현재 48번국도의 모태를 이룬다.
경도-양화도(15리)-철곶포(2)-<양천>(13)-개화우(10)-굴포교(3)-천등현(7)- <김포>(10)-양릉포교(15)-백석현(5)-<통진>(20)-갑곶진(10)-<강화>-<교동>
▲ 강화로의 가로수 식재. 2000년대 지형도를 밑에 깔고 1910년대 지형도를 오버래핑시켰다. 빨간색 선이 1910년대 강화로 노선이고, 도로와 나란히 박혀있는 점들이 가로수이다.
양화도의 북안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의 잠두봉 외인묘지 아래로 현 당산철교 놓인 자리와 거의 같고, 남안은 선유도로 생각된다. 지금은 선유도가 완전히 섬으로 분리되었지만 한강제방이 쌓이기 전에 선유도와 남안은 일시적으로 하도가 형성되는 우기를 제외하면 평시에는 포인트바(point-bar, 모래톱)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1910년대에 발행된 일제시기 지형도는 물론 1895년에 측도된 1:50,000 지형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양화도에서 한강을 건넌 강화로는 지금의 양화교 `인공폭포'에서부터 48번국도로 접어든다. 선유도에서 양화교까지 이르던 길은 새로 길을 놓으면서 흔적을 감췄다.
지명 철곶포는 20세기 이후의 지도나 지명사전 등에서 용례를 찾을 수 없어 이름이 거의 사라진 듯하다. 다만 `대동지지'에 양화도와 떨어진 거리가 2리에 불과한 것으로 기재되었고, 철곶포 또는 간포진으로 불렸으므로 수로변에 위치했을 것이므로 현 양화교 부근, 안양천이 합수되는 지점으로 추정된다. 양화교를 건너면 길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가운데 길이 48번국도, 즉 강화로 본선이다. 이곳 염창동에서부터 개화동에 이르는 옛 강화로는 지금 양천길로 불린다. 일제시기 지형도에는 양천길 초입부터 개화산을 북쪽으로 돌고 전호리 굴포교를 지나 천등현까지 가로수가 심겨진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지금은 도로확장과 경지정리 등으로 인해 모두 사라졌다.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역사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