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

조병창의 역사성

형과니 2023. 3. 28. 12:25

조병창의 역사성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2 10:25:01

 

조병창의 역사성

 

 지금도 더러 부평구의 동아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일대를 조병창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그곳은 6.25당시 주둔한 미군부대가 소재했던-즉 에스컴이라 불리던 곳이요 조병창이라면 그 이전의 일제 강점기 군수기지의 이름이다. 앞서의 아파트 뿐 아니라 68자동차부대가 있었던 부평공원과 산곡동 일대까지가 모두 해당한다.

 

 19404월 부천군 부내면이 인천부의 2차 부역확장으로 인천부에 편입되자 일제는 곧 조병창 공사를 시작했다. 31년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을 도발 대륙침략이 본격화하자 인천을 병참기지화하면서 그 일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조병창의 배후도시로 지금의 부평역전 일대에 도시계획을 병행하게 된다.

 

 당시의 공사 하청은 일본인으로 조직된 5개업자였다. 부평문화원장을 지낸 조기준옹의 부평사연구에 의하면 관또(關東) 다다(多田) 다마보꾸(玉操) 시미스(淸水) 하사마구미(間組)였다. 이때 우리 젊은이들로 근로보국대를 편성 공사에 투입했다. 지금도 복개한 원통천변에 남아있는 지명 다다구미는 현장사무소가 있던 자리라서 동네 이름이 되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일제는 학업중의 학생들이라고 그대로 두지 않았다. 중학생들에게 학도동원령을 내려 하급반은 주안염전 염부로 내몰고 상급반은 조병창의 군수공장으로 끌어들였다. 학교 수업은 전폐하고 경인선 열차로 부평역에 집합 조병창 까지의 행군으로 출근 작업이 시작되었다. 복장은 선반으로 총신을 깎는 작업이라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한 노인은 제3공장장이던 채병덕 소좌(6.25때 전사한 육군참모총장)가 한일인간의 마찰을 우리편에서 해결해 주었다고 회고 한다.

 

 지금은 일부가 낡은 가옥의 밀집지역으로 소방안전상의 문제 등을 안고 있으며 인근의 산곡시장 현대화 계획에 따라 연내 철거될 예정이다. 그런데 재개발에 앞서 남아있는 당시의 흔적 일부라도 남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고 한다. 초라한 흔적에 역사성의 부여가 타당한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