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돈대에서 정족산성 까지
갑곶돈대에서 정족산성 까지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3 09:26:17
갑곶돈대에서 정족산성 까지
상채기 난 땅 속에서 숨쉬는 호국영령의 기개
강화역사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벽에는 '帥(수)'자가 커다랗게 새겨진 황토색 깃발이 걸려있다.
이 깃발은 모조품이다. 진짜는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여기서부터 강화도의 슬픈 역사는 시작된다.
강화역사관에는 다른 지역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국난극복실'이란 테마관이 있다.
강화도가 지정학적으로 외세침략의 단골장소이기 때문에 개설될 수 밖에 없는 방이다.
고려 때의 항몽 관련 유적부터 조선말기의 운양호사건, 신미양요 등 생채기 난
우리역사와 관련된 사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역사관을 나와 바다 쪽으로 몇 발짝
내디디면 갑곶돈대가 나온다. 김포 땅이 바로 앞에 보이는 갑곶은 옛 강화의 출입문이자 요새였다.
그곳은 고종 3년(1866), 당시 불랑기국(佛狼機國)이라고 불리던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개항을 요구하며 닻을 내린 곳이다.
19세기 말 외세 침략 전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곳이다. 갑곶돈대에서 광성보로 가는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최근에 개통한 해안순환도로 덕분에 읍내를 통하지 않고 역사관에서 곧바로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등 강화도 격전지에 한걸음에 다다를 수 있다.
해안도로를 달리면 철조망도 함께 달린다. 이제 저 견고한 철책은 누굴 막기 위해 세워졌는가.
# 대포와 창의 '게임'
광성보 주차장에는 관광버스로 꽉 차있다. 언제부턴가 광성보는 학생들의 인기 소풍장소가 되었다.
광성보는 광성돈대와 손돌목돈대 그리고 용두돈대를 아우른다.
성문인 안해루와 성벽은 지난 77년에 복원된 것이라 유적으로서의 맛은 좀 밋밋한 편이다.
광성보와 관련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주변의 지형과 지세를 감상 포인트로 잡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1871년 음력 4월 신미양요. 이번엔 미국이 싸움상대다. 1866년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 때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평양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좌초된다.
그로부터 5년 후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아세아함대 5척이 1,2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해협으로 들어왔다.
4월 23일 미군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하고 다음날 광성보를 공략했다.
광성보의 싸움은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았다. 대포와 총을 든 다수의 청의병사(靑衣兵士)와
창과 칼을 든 소수의 백의병사(白衣兵士)의 싸움. 광성보 전투는 조선군이 참패했다.
그때 그 '帥'자 깃발을 뺏긴 것이다. 미군 측이 기록한 종군기록을 보자.
'조선군은 약세이면서도 도망칠 생각을 않고 용감히 저항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무기를 잃은 자는 돌과 흙을 들고 대항해 왔다.
살아 남은 조선군 1백여 명은 언덕을 넘어가 일부는 강물에 투신 자살을, 일부는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투신한 조선 병사들의 하얀 시체가 크림 빛깔의 한강에 부침하며 떠내려가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 안해루에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광성보 전투를 이끌다 전사한 어재연·어재순 두 형제 장군을 기리는 쌍충비각이 나온다.
그 옆에는 그때 함께 전사한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가 세워져 있다.
길 아래쪽에는 기와담장으로 둘러 처진 7개의 분묘가 자리잡고 있다.
51명의 이름없는 용사들의 주검을 화장시켜 합장시킨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다.
죽어서도 광성보를 지키고 있는 그들을 생각하니 잠시 옷깃이 여며진다.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에 흐르는 강 아닌 강, 염하(鹽河). 그곳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원형극장처럼 생긴 손돌목돈대가 있다.
광성보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다른 돈대의 군수품을 대주던 보급창 역할을 하던 이곳에서도 그날은 예외없이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손돌목돈대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용머리가 바다를 향해 들어가는 듯한 형상을 한 용두돈대가 나온다.
용두돈대에 서면 왜 이곳에서 저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지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깨달음이 온다.
이곳을 거치지 않고는 서울로 들어갈 방도가 없을 듯 하다.
염하의 거친 물살에서 나는 소리가 마치 외적과 싸우는 조선군의 함성처럼 들린다.
손돌목을 훑고 흐르는 탁한 물의 흐름이 우리나라 근대사의 격랑을 보는 듯하다.
[2000년 06월호,굿모닝인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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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상흔
광성보와 초지진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 요새를 연결시켜 주던 덕진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력한 포대를 가지고 있었던 덕진진은 김포 쪽에서 튀어나온 덕포진 포대와 마주 보며
해협의 길목을 지키는 강화 제 1의 요충지다.
신미양요 당시에는 60여 문의 대포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제 1의 포병부대가 주둔하던 요새다.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타국선은 어떠한 경우라도 함부로 이 곳을 통과할 수 없다)'
바다를 향한 대원군의 경고비는 소리없는 메아리였다.
극동함대 소속의 미국 병사들이 '함부로' 육지로 올라오자 덕포진의 포대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포탄이 다 떨어진 조선군 포병들은 자신의 몸을 포신에 묶어 놓고 싸울 만큼 임전무퇴의 강인한 정신을 지녔다고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백병전의 대가로 염하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덕진문루인 공해루(控海樓)를 돌아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15개 포문이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남장포대가 나온다.
그곳에는 그때 조선군의 몸을 묶었을지 모를 그 포대가 주인을 잃은 채 방문객을 맞고 있다.
덕진진을 나와 더 아래로 내려가면 초지진. 광성보나 덕진진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품고 있는 사연은 결코 적지 않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아세아 함대의 첫 상륙지였으며
1875년 8월 21일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 앞에 접근했을 때 이곳 수비군의 화포에서 불이 품어졌다.
운양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초지진을 향해 110밀리와 40밀리 함포로 일제히 사격해 왔다.
일본의 조선침략의 신호탄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조선군은 사정거리도 짧고 정조준도 제대로 되지 않는 구식화포에 의지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돈대 중앙에는 그때 쏘았음직한 대포 1문이 전시돼 있다.
어떻게 이런 포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 있었을까.
돈대 내의 노송 가운데와 석축 한편에는 당시의 포탄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아직도 그때의 상흔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 전세 뒤집은 정족산 전투
해안을 벗어나 전등사 길로 접어든다.
강화가족호텔을 바로 지나면 천년고찰로 오르는 언덕길이 나온다.
언덕마루에 다다르면 돌과 벽돌로 소박한 홍예를 만들어 멋을 부린 동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돌문 밑을 지나면 왼쪽에 비각이 하나 서있다.
'양헌수장군승전비'이다. 여기가 바로 병인양요 때 수세에 몰리던 전세를 한순간에 뒤집은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 현장이다. ,
정족산성은 전등사를 에워싸고 있는 산성으로 일명 삼랑성(三郞城)이라고 한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성으로 총 길이가 약 1㎞에 달한다.
1866년 갑곶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유린하고 이곳으로 향했다.
이에 양헌수 장군은 비밀리 500명의 포수를 이끌고 덕진진을 건너서 미리 정족산성에 들어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성을 향하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조선 사냥꾼들의 화승총이었다.
예기치 못한 기습공격에 프랑스군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프랑스군은 강화도로 들어왔던 갑곶으로 다시 쫓겨나갔다.
결국 프랑스군은 조선 땅에서 물러났다. 전등사 대웅전에는 조선군의 기개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법당의 기둥에는 먹으로 쓴 글자들이 낙서처럼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
정족산성 전투의 결사항전을 앞둔 포수들은 예불을 드리고 법당의 기둥과 벽에 자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글자들은 우리들에게 호국영령들의 기개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