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장/마제이
백마장/마제이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6 04:45:02
백마장/마제이
가당치도 않는 백마소동(白馬騷動)이라니 산골짜기 마을이기에 山谷里로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했건만 내 고향 부평은 우리가 소중히 가꿔야 할 조상의 얼이 깃들은 문화유적이
도시개발로 인하여 훼손되고 하나 둘씩 사라져 자취를 감추고 있음은 심히 마음 아픈 일이다.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음된 지명과 방언은 그 본래의 뜻을 상실한 것이 허다함으로
우리는 이를 바로잡아 내 고향 사랑으로 숭화시켜 계승 발전토록 할 막중한 책무를 느껴
앞으로 잘못된 땅이름을 바로 잡는데 다같이 동참하여 시정에 힘쓰기를 바라는 소박한 심정에서 이 글을 쓴다.
우리는 지금 산곡 1, 2동 일대를 백마장이라 불러오고 있다.
서울의 관문인 서울역 앞에서「백마장」행 버스가 운행한 지 수 십 년, 그 후 강남고속터미널 옆에서 운행하고 있은 지
또 수 십 년에 이르러「백마장」하면 국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왜정 때 이웃에 자리잡은 육군조병창과
그 자리를 이어 받은 미국 예스캄으로 인하여 해외에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부평구청 옆 신트리 공원에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힘차게 달리는 백마상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연 전에 이 고장 교육계의 원로인 지도자가「백마장」과「백마상」의 연유를 물어옴으로
부평이 「백마」와 연유 깊은 고장으로 오인되기에 안성맞춤으로
내 고향의 역사가 왜곡될까 두렵고 또 후세대의 교육상 큰 문제구나 하는 생각이 지금도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백마장」이라 불리어 온 산곡동은 원래 한 말에 부평군 마장면 산곡리였는데, 부·군·면 (府·郡·面) 폐합 때 (1914. 4. 1)
부천군 부내면 산곡리로 되었고, 그 후 인천부 제2차 구역확장(1940. 4. 1) 으로 부내면 전부가 인천 부에 편입되자
당시 인천부윤(仁川府尹) 나가이데라오(永井照雄)는 인천 전 지역의 각 리(里) ·동(洞)을 일본식 이름으로 모두 고쳤는데
이 때 산곡리(山谷里)를 하구바죠(白馬町)로 개칭하였다.
이 「하구바죠」가 해방 (1945. 8. 15)이 되자 우리말로「백마정」이라 했는데 물자 풍족한「미군 예스컴」주위로
전국 각 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활기를 띄는 반면
「백마정」의 정(町)이 장(場)으로 변음되어「백마장」이라 불러지게 된 것이다.
이 백마장과 신트리 공원의 백마상과는 하등의 연관이 없음을 밝혀둔다.
다만, 한말의 마장면(馬場面)은 청천동을 중심으로 효성동까지 초지무성한 벌판으로「마장뜰」이라 불러 왔는데,
마장(馬場)은 목장(牧場)으로 세종실록에 의하면 경기도에만 26개소의 마장(馬場)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 이전의 국영목장이기에 마장면이란 행정면이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옛 노인들은 청천동을 마제이(馬場)라 부르고 있음은 마장면소가 있었음으로 해서 부르게 된 마을 이름이다.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일제의 산물인 백마 (백마장, 백마로, 백마료, 백마장행, 백마장 입구) 등을 과감히 삭제하고
모두 「산곡」으로 개칭되어야 할 것이다.
마제이(청천1동)
말 키우던 마장뜰 면 이름과 마을이름으로
지금의 부평보건소 일대에「동수재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이 마을에 부평군 동소정면소 (부평군 同所井面所)가 있어
면소이름을 마을이름으로 불렀듯이 청천동에 마장(馬場)면소가 있어 마장을 "마제이" 로 변화된 이름을 지금도 불러오고 있다.
그리고 철마산과 원적산 사이의 "도둑굴"에서 원출된 맑은내(淸川)가 마을 앞으로 흘러갔으므로「청천리」라 하였다.
마장(馬場)이란 지명이 생긴 것은 효성동, 청천동, 산곡동 그 일대의 벌판을 "마장뜰"이라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마장뜰" 역시 말을 사육했던 마장(馬場,牧場)이 였기에 붙여진 땅이름이다.
이 곳은 수원이 부족하여 농경에 부적 당하며 말먹이로 좋은 억새풀로 뒤덮여 새벌이(효성동) 마을이름이 생겼듯이
억새풀 벌판이니 말목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쪽의 중구봉과 천마산 서쪽의 원적산은 원통산에 이어지고 남쪽은 금마산 부개봉으로 삼면이 병풍같이 둘러싸인
아늑한 벌판이니 옛 목장이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이 말목장은 옛 부터 국가 안위 상 군사적 또는 통신상 중요한 역할은 했으므로 조정에서는 양마사업에 국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고려 때는「태복사(太僕寺)」를 설치하여 양마에 힘써왔고 조선조 역시 국초부터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국영마장을 확장하였다.세종 15년(1433) 사복사제조(司僕寺提調)가 상계한 "마장"을 보면 경기도 15개소, 충청도 7개소, 함길도 5개소, 전라도 12개소,평안도 5개소, 경상도 4개소, 황해도 7개소, 제주도 2개소 등 도합 57개소의 마장이 있었다.
또, 세종실록에는 경기도가 26개소로 증가하고 그 중 전국 최대의 마장이 강화의 「진강목장(鎭江牧場)」이고
다음이 자연도(영종도) 목장으로 국마 1,500여필을 방목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외에도 인천 앞바다의 덕적, 용유, 무의, 장봉, 주문, 신, 시, 석모, 말, 모, 동검, 길상 등 서해안의 모든 섬에
국영목장이 있었으니 이는 말을 방목 하는데 가장 좋은 위치에서였다.
조선조는 국초 이래 마정(馬政)에 힘써 크게 확장되었던 마장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모두 황폐되었음을 효종은 북벌계획을 세워 이완(李浣)대장으로 하여금 10만 대군의 양병에 힘쓰는 반면 마정부활을 도모하였으나 시운이 맞지 않아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조선조 후기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무기의 발달은 마장을 위축시켜 결국 폐쇄를 가져왔다.
이 곳의 "마장뜰"은 고려 때의 목장이라고 구전되고 있으며 역시 방목에는 적당하지 않으나 세종실록에 있는 경기도 26개소의 마장에 속했던 것으로 믿어지며 목장이 있었기에 "마장뜰", "마장면"이 생기게 되었을 것인데 자상한 유문을 그 이상 찾을 수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 곳은 조선중기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괄이 한양 서울을 점령한 뒤 새 도읍지로 결정했던 곳이 마장뜰인데 난에 실패하니 모두 없었던 일이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from 부평문화원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