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마을 - 율목동
부자마을 - 율목동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7 16:51:52
옛날엔 떵떵거렸던 부자마을 - 율목동
인천시 중구 율목동은 밤나무가 많아 밤나무골로 불리기도 했지만 일제 강점기 부터 오랫동안 「기와집 동네」로 유명했다. 지금은 그런 옛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 곳은 부자들이 많이 살면서 한때 인천의 중심지로 꼽히던 마을이었다.
율목동은 구한말엔 행정구역상 부내면(府內面) 율목리(栗木里)로 면사무소 소재지였다. 그러다 1913년 인천부에 편입된 후 1937년에 율목정(栗木町)으로, 다시 1946년에 율목동으로 바뀌었다.
1920년대 이 곳은 내동(內洞)과 함께 인천의 부자와 유지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동네로 이름났다. 몇몇 부자들이 율목동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지역에서 돈 있고 행세 깨나 한다는 이들이 너도 나도 율목동으로 옮겨 「기와집 동네」를 형성한 것이다. 특히 주로 일본인 기와집이들이 밀집했던 자유공원 일대와 한국인 부자들이 모여 살던 율목동은 좋은 대조를 이뤘다.
향토사 자료에 따르면 1910년 당시 율목동은 2백35가구에 인구 1천49명으로 내동과 함께 부자촌의 쌍벽을 이룰 만큼 기와집이 제법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 곳엔 기와집들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경동과 신흥동, 유동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다 이 일대가 번창하게 된 데에는 1906년 생긴 근업소(勤業所)영향이 컸다. 근업소는 일어를 무기삼아 부산지역에서 올라온 영남상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미곡중개업체이다. 따라서 율목동엔 부산 등 영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내리에선 일본말 자랑하지 말고 내리받이 언덕에선 주먹다짐을 하지마라. 그리고 밤나무골(栗木洞)을 지날때엔 돈자랑하지 말아라.』
일제 때 부터 율목동 일대에서 전해져 내려 온 이야기다. 내리에서 일본말 자랑하지 말라는 얘기는 이 주변이 일본인촌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 율목동에서 지금의 신생동에 이르는 내리받이(당시 花開洞<화개동>, 일명 38고지라 불렸다)엔 오늘날의 화장장과 홍등가가 들어서 있었고 자연스레 건달들이 들끓었다 한다. 화장장은 1930년대 복숭아 밭이 많았던 도원동으로 이전했고 이후 여기엔 한옥주택가가 들어섰다.
율목동이 그 무렵 부촌을 이뤘던 것은 결국 정미소 등으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모여 든 데서 비롯된 셈이다. 하지만 이 곳은 지난 60년대 도시재개발을 본격화면서 고풍스런 기와한옥의 명성을 잃게 됐다. 현재 율목동 곳곳엔 다가구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 예전의 정취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율목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김정애 할머니(81)는 『해방을 전후해 율목동은 고급스런 기와집과 깨끗한 거리 등으로 인천의 대표적 부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며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공동묘지 근처는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율목동에 자리잡았던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유골을 묻은 곳으로 우리나라의 봉분과는 달리 평평하고 비석을 죽 늘어서 세워놓았다고 한다. 당시 신흥동에서 인천고등학교(현 인천정보산업고 자리)를 다녔던 인천인들은 아직도 이 곳을 넘어다녔던 기억을 갖고 있다. 율목동 공동묘지는 배다리와 신흥동의 경계선이었던 셈. 김환씨(57·인천시 중구의회 전문위원)는 『중고등학교 시절 율목동은 학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며 『학창시절 기독교병원 아래 도너츠집과 단팥죽집이 유명했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기와집과 공동묘지로 대표되던 율목동은 애초엔 야산이었고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살며 망부석 등을 세워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근식씨(60·前 중구 부구청장)는 『지난 97년 율목공원 공사로 땅을 파던 중 귀와 목 등이 잘린 망부석 6점을 발굴했다』며 『문화재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의뢰한 결과 일제강점기 전 마을을 지키고 조상의 은공을 빌기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가 나왔다』고 전했다.
이중 망부석 3개는 현재 율목공원 정상에 있는 도서관 옆에 진열해 보관하고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망부석을 거꾸로 매장했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다.
율목동은 또 6.25당시 미군이 상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율목감리교회가 들어선 자리엔 대포진지가 구축되기도 했다.
부자동네로 잘 알려진 만큼 율목동과 관련한 유명인사들의 이름도 자주 거론된다. 고급주단 태풍상회 김태성씨, 제주도 지사를 지낸 민주당 원로 양재박씨,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는 상술로 주위를 놀라게 한 문방구상 희문당 윤병희씨, 한글 점자를 창안,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박두성 선생 등···. 하지만 율목동은 이처럼 쟁쟁했던 인천인들의 얘기와 옛 영화를 뒤로 한 채 지금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도심속 작은 동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정용인: 인천근업소
개항 당시 쌀과 관련한 인천역사를 거론할 때 향토사학자 등 많은 인천사람들이 먼저 미두장(米豆場)을 끄집어낸다. 일제가 경제수탈의 일환으로 설립한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쌀에 관한 인천의 과거를 되돌아 보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단체가 바로 1906년 설립된 근업소다.
근업소는 구한말 정부(농상공부)에서 정식 영업허가를 받은 인천 최대의 쌀 중개업체였다. 조직은 소장과 총무원, 평의원, 조사원, 서기원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소원은 30여명 정도였다.우선 이들이 하던 업무 내용을 살펴 보자.
국내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게 근업소의 주요 업무였다. 오늘날의 업종과 비교하자면 일종의 무역업무인 셈이다. 하지만 쌀을 거래하는 방식에서는 오늘날의 무역개념과는 매우 다르다. 근업소의 쌀 수출은 위탁판매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국내 대지주들이 판매하고자 하는 쌀을 근업소에 맡기면 근업소는 시세에 따라 판매대금을 지주에게 전달해 주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근업소는 쌀 수출 과정에서 위탁자인 국내 지주와 구입자인 일본 미곡상 양족으로부터 일정액의 중매 수수료를 받아 이를 수입으로 챙겼다. 당시 중매 수수료 계산방식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근업소 회원들의 수입은 엄청났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개항 직후 인천항은 전국의 쌀 집결지로 변모했고, 인천에 집결한 쌀 대부분이 근업소를 통해 일본에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과의 쌀무역을 독점한 근업소는 한일합방 이전까지 급속도로 성장하며 그 위세를 전국에 떨쳤다. 당시 근업소 간부였던 자제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그 때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근업소는 당시 인천경제의 중심 역할을 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 경기지역 지주들은 날마다 쌀을 싣고 근업소를 찾았고, 일본 미곡상들 역시 필요한 쌀을 확보하기 위해 근업소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미소 관계자들도 일거리를 찾기 위해 근업소에 줄을 대려고 야단스러웠다니 가히 당시 근업소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기녀들이 있는 용동이나 신흥동유곽 등은 근업소 관계자들이 고객의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인천경제를 좌지우지 했다.
근업소가 일본과의 쌀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배경을 알기위해서는 근업소의 설립과정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근업소 설립 당시의 소원 전원이 영남인들로 구성 됐다는 것이 특징이다. 영남은 지역적으로 일본인들의 방문이 잦았던 곳이다. 그러다 보니 영남인들 중에는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근업소 소원중 결원이 생겼을 경우에도 채용기준은 우선 영남인이어야 하고, 일본어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래서 근업소는 설립과 함께 일본 미곡상들을 완전 장악했고 일본인들 역시 의사소통이 원활한 근업소를 신뢰한 것이다. 근업소가 한일 합방 이후 일본정부의 견제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구 율목동 55번지에 있었던 근업소 건물은 이미 오래 전에 철거되고 현재는 그 자리에 상가건물이 들어섰지만 당시 근업소 건물은 '솟을 대문'이 서 있는 위풍 당당한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근업소 건물에 솟을 대문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구한말 법무대신을 지낸 이하영씨의 명의로 근업소가 허가되었기 때문이다. 이하영씨 또한 영남 출신이었다. 이처럼 세도 당당했던 근업소도 한일 합방 이후부터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제는 전국 각지에 조직망을 갖춘 미창(米倉,조선미곡창고(주)의 약칭)을 설립하면서 싼 값에 우리나라 쌀을 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1935년 경에는 곡물검사제가 실시돼 근업소의 활동은 더욱 제약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40년 초에 이르러 그 볼품 좋고 경기 좋던 인천근업소의 솟을 대문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때 독보적인 존재로 미곡계를 쥐고 흔들었던 근업소였지만 일제의 끈질긴 간계에 의해 근업소의 권한과 역할도 일본 사람들에게 넘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