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산리~진강산~삼흥리
조산리~진강산~삼흥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22 01:08:06
8구간:조산리~진강산~삼흥리
진강산 정상엔 `말발굽 자리' 선명
우리땅의 산줄기를 밟아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산에서 물을 건너지 않고 다른 산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한남정맥을 넘어 강화도의 산줄기를 조심스럽게 밟아가면서 느낀점은 적어도 이런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몇 개의 섬지역을 매립의 과정 등을 통해 하나의 섬으로 형성했다는 지형적인 특징도 있지만 어느 산 정상에서건 수평선이 보일 만큼 바다와 가깝다는 이유도 있다.
강화도는 지정학적인 조건으로 선사시대부터 남북간 문물의 전파경로 였고 삼국시대에는 국방의 요충지이자 대중국 교통의 중심지의 기능을 해 왔다.
특히 13세기 몽고침략기에는 39년간 고려왕조의 임시수도 역할을 해오면서 일대에 많은 지배층의 무덤군을 형성해 놓았다.
이번 8구간의 진강산은 강화 중앙부에 위치한 진산으로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이 밀집해 있는데다 많은 설화들이 구전해 내려오는 곳이다.어 삼흥리로 넘어가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코스를 선택했다.
오전 9시50분. ‘시발지’ 혹은 ‘생명의 근원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조산리를 들머리로 능선을 밟기 시작한 일행은 등반 30여분만에 하일리와 능내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암릉지대를 만났다.
고려초 이 일대를 이르던 황골(강주)에 현읍을 옮기고 ‘강주의 진산’이라고 하여 그 이름을 얻게 됐다는 진강산엔 고려 21대 희종의 무덤인 석릉(碩陵),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嘉陵), 22대 강종의 왕비인 원덕태후의 무덤인 곤릉(坤陵) 등 고려 고종의 홍릉을 제외한 왕실의 무덤이 모두 모여있다. 이들 무덤은 2002년과 지난해 문화재정비를 위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상태.
암릉지대를 지나 완만한 능선을 20여분 더 오르면 인천지역에서 가장 높은 봉수가 있었던 진강산 정상이다.
443m의 정상 부근엔 봉수대와 봉수군이 기거하던 집터 자리로 보이는 평지가 눈에 들어온다. 봉수대터에서 북쪽으로 삼각점이 위치한 정상에는 전망이 빼어나지만 후면으로 산불감시카메라와 중계탑이 설치되어 있어 흉물스럽기까지하다.
진강산 정상에 있는 말발굽 자리가 선명한 바위와 관련된 신비스런 전설을 듣고나면 그 흉물스러움은 더해만 간다.“장사가 태어나면 집안을 몰살하는 법이 있던 시절, 한 장사와 장사를 태우고 다닐 용마가 이 일대 건평리와 용내천에서 함께 태어 났는데 마을사람들이 장사아이를 절구에 눌어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용마가 진강산에서 3발작에 건평리로 내려와 구하려했으나 실패하자 돌아가 함께 죽었다.”
이곳 사람들은 삼흥리 존강마을 뒷산과 진강산 정상,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건평리에 각각 말발굽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고 믿고 있다.진강산 정상에서 마을 사람들이 ‘작은진강산’이라고 부르는 봉우리로 가는 길은 온통 진달래군락지인데다 그늘 지고 위험해 보이는 급경사 길이다.
숲을 헤치며 찾아간 작은진강산 정상엔 헬기장이 있고 주변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산초나무와 초롱꽃, 쥐똥나무 등이 눈에 띈다.종주단은 삼흥리 방면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20여분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가자 비교적 잘 정리된 산행로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 지역부터는 군마종축장의 경계를 위해 쌓아둔 마성지대. 예로부터 목장이 많았는데 그 중에도 지금의 양도초등학교 뒤 진강산 남서쪽의 진강목장이 유명했다. 이곳은 조선 효종 대왕의 애마이자 명마인 ‘벌대총’ 생장지로도 이름이 높다.
벌대총을 위의 전설과 연관시켜 용마라고도 부르는데 아직도 이 고장 사람들은 용마가 태어난 샘물을 ‘난우물’, 개울 이름을 ‘용내’라고 부른다.종주단은 3시간여만에 삼흥리를 지나 진강산 북쪽 골 안에 있는 산문에서 8구간 종주를 마무리했다.
이번 종주기획의 마지막 구간인 제9구간은 마니산 구간으로 3일 오전 9시 마니산 주차장에서 모여 화도와 마니산 정상을 거쳐 정수사로 하산한다./이원구기자 blog.itimes.co.kr/jjlwk
구간따라잡기-진강산 봉수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 진강산(443m) 정상의 봉수는 조선시대 봉수로 인천시에 분포한 봉수대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사방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축조, 멀리 바다를 조망 감시하면서 유사시 불은면의 대모산 봉수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내가면 망산 봉수로 전하는 기능을 했다.
특히 진강산 봉수는 조선시대 봉수노선 중 제 5거에 해당하는 직봉노선으로 전남 여수 돌산도에서 서울 남산까지 이어진다.그 중 인천구간을 살펴보면 안산 정주산 봉수∼인천 문학산 봉수∼부평 축곶산 봉수∼김포 백석산 봉수∼통진 수안산 봉수∼강화 대모산 봉수∼강화 진강산 봉수∼강화 망산 봉수∼교동 화개산 봉수∼강화 봉천산 봉수∼강화 남산 봉수∼서울 남산 제5봉에 이른다.
강화도 지역 봉수간 거리는 통진 수안산 봉수-7.2㎞-대모산 봉수-6.8㎞-진강산 봉수-7.2㎞-망산 봉수-10.5㎞-교동 화개산 봉수-11.1㎞-봉천산 봉수-7.2㎞-남산 봉수-7.8㎞- 서울 남산으로 봉수되는 거리는 평균 9㎞. 전국 봉수간 평균거리인 8㎞ 보다는 약간 길다.
진강산 봉수에는 봉수장 1명과 감관 5명, 도감고 1명을 두어 총 26명의 봉수군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현재 진강산 북쪽 정상부에는 요망대와 건물지,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연조 등 관련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원구기자(블로그)jjlwk
고려시대 무덤군
강화도 전역에는 26곳에 달하는 고려시대 무덤군이 산재해 있어 당시의 역사적 체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진강산 서쪽에 있는 가릉 뒤편에는 왕릉과 같은 형식의 무덤으로 현재 주인을 알 수 없는 능내리 석실분이 있고
석릉 주변에도 강화도내 최고의 석곽묘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어 고려시대 매장처로서 진강산의 위상을 짐작케 하고 있다.
특히 석릉 주변 고분군은 석릉의 동쪽과 북쪽, 남서쪽 능선을 감싸안듯 자리, 인하대 박물관 조사결과 112기의 고분이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조사된 고분군은 석곽묘가 대부분으로 무덤 규모가 길이 2m, 폭 70∼80㎝.
형태는 벽체가 할석으로 된 할석조 석곽묘가 주를 이루고 판석조 석관묘도 포함되어 있다.
고려시대 석곽묘는 당시 계층구조에서 중간지배층 이상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어 지배층의 무덤이
진강산에 몰려있다는 점은 여러모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이원구기자(블로그)jjlw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