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조병창
부평 조병창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24 16:26:02
*부평 조병창*
일제 무기 만들던 곳...항일 위해 잇단 밀반출
대륙(만주)침공의 부푼 꿈을 안고 있던 일제는 1941년 4월1일 부평지역을 인천에 편입한다.
부평을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일제의 계획에 따른 조치다.
이에 따라 일제는 부평에 있던 무기 제조 시설인 ‘육군조병창’에 대한 확장공사에 들어간다. 부평조병창 또는
인천조병창으로 불리던 이 곳에서는 잠수함을 비롯한 일제의 대동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각종 무기가 생산됐다.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가지 않으려 부평조병창에 취직한 젊은이들은 조병창 주변에
얼기설기 판자집을 만들어 모여 살았다. 다다구미, 홍중, 삼능, 미쓰시비, 히로사까, 줄사택 등
식민지 조선의 아픈 역사를 대변하는 이 지명들은 아직도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슬픔과 아픔, 원통과 비운이 얽혀있던 부평조병창.
그러나 그 안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일의 움직임은 끊이지 않았다.
1940년대 초반, 일제는 부평을 중국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고, 지금의 부평미군기지에 군수품 공장을 세운다. 육군조병창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 인천부윤은 극비리에 육군조병창 확장사업을 벌인다.
동으로는 원통천, 남으로는 경인선철도, 서로는 호봉산 산줄기, 북으로는 백마장 입구에서 관통도로를 경계로 한
전체지역을 수용하여 민간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시킨채 공사를 진행한다.
공사는 일본인 하청업자 다마보구미, 다다구미, 관또구미, 하사마구미, 아사노구미 등 5개 업자가 맡았다.
국민총동원령에 따라 전국 각지역의 청장년을 강제 동원해 ‘근로보국대’를 만들어 공사에 투입했다.
보급창의 증설로 현재 일신동 구산동 일대를 강제수용하고 기존 민가를 전부 철거시켰다.
일본군 헌병대가 상주하고, 육군 한연대가 상주 수비했다. 일반인들은 도대체 무슨 공사가 벌어지는 조차 몰랐다.
히로나까(미쓰비시), 한국베아링, 동양철강, 국산자동차, 아사노가릿트, 디젤자동차, 부평발전소,
부평정수장 등이 가동됐다.
부평 주민들은 식량통제에 이루말할 수 없은 고초를 겪었다.
식량통제령이 발동돼 모든 양곡은 정부가 아니면 일반 거래가 이뤄지지 않았다.
지정된 배급소가 아니면 살 수 없었다.
금속품 공출이 이어졌다. 놋그릇, 주발, 대접, 양푼, 세수대야 심지어 요강까지 모두 뒤져서 가져갔다.
사찰과 교회 동종이나 청동 혹은 철불 등 모든 종류의 금속 기물에 대한 자진 헌납이 강요됐다.
이 때 강화도 전등사의 동종과 불기들이 강제로 공출당했고,
당시 보물로 지정됐던 서울 종로의 보신각종도 백척간두 공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농사용 비료(금비)도 농경면적에 따른 배급제로 지급됐고,
일상식품인 소금, 설탕, 술, 고무신, 광목 등도 모두 배급됐다.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제는 강제징병에 나섰고, 나이가 많은 사람은 강제징용해 탄광으로 보냈다.
부평역 남쪽 언덕에 신사를 지어놓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먼거리에 거주해 신사참배를 못하면 집안에 ‘가미다나’란 신단을 설치,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강제징용을 앞둔 사람들은 조병창을 피난처로 삼았다.
현 부평공원 부지는 일제시대에는 군수품(부품) 제조공장인 ‘히로나까’(弘中)가 들어서 있었는데,
당시 이 곳에서 일을 하면, 징용을 면제받는 혜택이 주어졌다.
부평지역 사람들은 물론, 전국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신촌이라 부르는 현재의 부평3동과 히로나까 사택으로 불린 현재의 부평2동 등
조병창 주변엔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형성된 새마을이 신촌, 신트리로 현재에 이른다.
평화촌 일대도 부평조병창에 따른 아픈 역사의 연장선이다.
동아아파트 입구에서 북인천 우체국 옆, 복개된 원통천 동쪽인 큰 길가를 예전엔 다다구미라 불렀다.
부평조병창 확장공사를 맡은 일본인 토건업자인 다다구미의 현장사무소가 있던 자리인데,
야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었다.
해방과 함께 부평조병창에 미8군 ‘캠프마켓’이 들어서자, 캠프마켓에서 나온 미군물자를 이용해
살아가던 사람들이 다다구미 현장사무소자리에 판자집을 세운 것이 지금의 평화촌이다.
더 암울한 것은 이 일대에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향락촌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일제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
헌병대의 서슬퍼런 감시하에 가동중이던 공장에서도 항일운동의 기운은 싹텄다.
한국전쟁때 전사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부평조병창의 공장장으로 있을 당시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학생들이 강제 동원돼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생산량이 줄어들자 일제는 보선정문학교를 폐교시키는 등 강력한 체벌을 검토했다.
이 문제는 채병덕과 보성전문학교 교수, 지역유지들이 나서 무마시켰다.
이같은 학생들의 소극적 태도와 달리, 적극적인 행동도 포착된다.
비밀리에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조직적으로 빼내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경기도 파주 출생의 황장연(黃長淵·1923년4월∼?)도 그 중 하나다.
그는 1943년 3월5일 부평조병창 내에서 30여명이 동지들과 함께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을 비밀리에 조직한다.
황장연은 이 조직에서 당원들에 대한 무기 공급책임을 맡는다.
이후 1944년 8월 임시정부에서 빌파된 국내 연락원 신교선(辛敎善)과 접선하고
독립투쟁용 무기 공급을 지령받는다.
그는 부평조병창에서 무기를 몰래 빼내, 그해 9월 신교선에게 인계한다.
그러나 이 일이 일본 경찰에 발각돼 결국 붙잡힌다.
이듬해 2월17일 일제의 조선군법회의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월15일 해방과 함께 출옥한다.
이에 앞서 무기제조법을 빼내, 조선총독을 암살하려던 비밀 결사단체가 검거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서울 창천감리교회에 다니던 청년회원 오순환(1921년8월∼), 김군희(1918년3월∼1963년1월) 등은
정은태, 이광운, 이선영 등 21명의 동지들과 뜻을 모아 친목을 가장한 비밀 항일결사조직 창천체육회와
조기회를 만든다. 이들은 교회내 청년회원들의 모임인 엡웻청년회에서도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회장 오순환과 김군희 등은 부평조병창에 위장 취업, 무기제조법을 빼내기로 한다.
이들은 항일독립운동의 방안으로 조선총독과 일제 고관을 암살해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앙양시킬 계획을 세운 것이다.
1941년 10월 거사를 목표로, 폭발물 제조방법을 배우기 위해 부평조병창에 입사해 일을 하던 이들은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탐지한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거사일을 한참 넘긴 1942년의 일이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체제하에서 무기제조법을 조직적으로 빼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터다.
이 일로 1944년 5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회장인 오순환은 징역2년을,
김군희는 징역1년을 각각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오순환은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받았다.
김군희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미쓰비시의 무기 부품 제조 공장이 육군 88정비대로 바뀌고,
후에 부평공원이 돼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곳.
그러나 친일파 손병준 후손의 땅찾기가 계속되고 있기도 한 ‘부평조병창’ 일대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김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