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징용 인천서만 4756건
일제 징용 인천서만 4756건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4-12 20:52:51
일제 징용 인천서만 4756건
지옥의 섬에서 살아온 지 61년
아직 끝나지 않은 외로움 싸움 - 김행진 옹
▲ 일본강제징역 김행진 옹
“기자 양반, 나 꽤 건강해 보이지? 그래도 언제 갈 지 몰라. 죽기 전에 어서 시원하게 해결됐으면 좋겠어.”
1922년 출생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건강하고 정정한, 그러나 백발 역시 성성한 김행진(86)옹이 바지를 걷어 내보인 왼쪽 다리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입은 포탄 파편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꿈 많던 18세, 태평양전쟁에 조선인으로서 징병을 당해 갖은 고초를 겪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지 61년.
일본정부는 지난해 김행진 옹을 비롯한 250명의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 및 징병 피해자들에게 법원 판결을 통해 어떠한 보상도 해 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 1965년 맺은 한일조약을 통해 일본정부가 이미 충분한 배상을 한국 측에 했다는 주장에 따른 판결이었다.
김 옹은 현재 일본 고등법원에 항소를 하는 등 여전히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가끔씩 잠에서 깨곤 해. 옆에서 포탄 맞아 죽고 굶어 죽던 친구들이 생각나. 바라는 것? 돈 많이 주면 뭐하나. 나 죽기 전에 속시원히 일본애들에게 사죄받는 거야. 강제로 징병, 징용 보낸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지.”
▲ 일본에서 발행한 솔로몬제도 관련 책자에서 김행진 옹이 속했던 부대의 솔로몬제도 내 이동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징병 후 느닷없이 배를 타고 건너간 솔로몬제도, 지옥 같은 섬에서 4년
88주년 3·1절을 맞아 실제 증언을 토대로 김행진 옹이 징병을 당한 1940년부터 1946년 인천시 송현동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를 구성했다.
“내 살이라도 먹고 살아남아서 내 뼈를 추려 고향에다 묻어주겠나?”
연일 계속되는 미군의 함포사격과 보급이 끊긴 채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1943년 7월 태평양 남서부 솔로몬제도의 부겐비루 섬.
찌는 듯한 더위와 독충, 독초가 우글거리는 밀림 속에서 한 친구가 김행진 옹에게 그 한마디를 남기고 죽어갔다.
김행진 옹 역시 배고픔과 포탄 파편을 맞은 다리의 통증 속에서 죽음이 목전에 있음을 알았다.
뼈라도 고향 땅에 묻어달라는 죽은 친구 만큼이나 김행진 옹 역시 인천 송현동 고향이 그리웠다.
편지를 몇 번 부쳤지만 일본군 본진으로부터 보급이 끊긴 지 오래돼 답장은 커녕 편지가 제대로 전달이라도 됐는지도 불분명했다.
태평양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 1941년 12월 8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과 미국·영국·네덜란드 등의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동남아를 거쳐 태평양에 대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태평양 남서부에 위치한 솔로몬제도에서 미국을 비롯한 미 동맹국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 태평양전쟁에 나선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강제 징집된 당시 조선청년들이었다.
1940년 현재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김행진 옹은 학교장의 자원입대 권유를 받고 일본군이 지휘하던 용산 22연대에 입대했다.
이후 1942년 부산항으로 이동한 김 옹은 일본 사세모 군항으로 배를 탄 뒤 다시 한 배에 3천 명을 태운 수송선에 몸을 싣고 태평양 남서부에 위치한 솔로몬제도로 향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상륙도 하기 전에 미군의 폭격을 받아 상당수가 바다에서 죽었으며 이 교전에서 일본은 태평양함대 연합사령관인 야마모토 대장까지 잃게 된다.
간신히 살아남은 김 옹은 솔로몬군도 가다루가나루 섬에 상륙해 부대에 합류했지만 잇따른 패전으로 쫓기듯 솔로몬군도 내 섬에서 섬으로 옮겨다니며 목숨을 부지했다.
보급이 끊겨 각종 식물은 물론 발달린 짐승을 잡아먹었으며 야자나무 껍질까지 벗겨 먹는 처참한 생활이 지속됐다.
약품보급마저 제대로 되지 않아 포탄 파편에 맞은 다리가 썩어들어갔지만 별다른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낮에는 밀림에 몸을 숨기고 밤에는 고무보트 등을 이용해 이동하는 일이 반복됐다.
“사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굶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아. 한 번은 한 일본인이 독초를 잘못 먹고 죽는 것도 봤어.”
김 옹을 비롯해 솔로몬제도에 투입된 일본군은 1945년 8월 15일 당시 일왕의 항복선언도 알지 못해 미군들이 뿌리는 일본패망 소식이 적힌 선전물도 거짓으로 생각하고 항전을 계속했다.
결국 1946년 2월 일본군 측이 나서 무장해제를 요구해 간신히 귀국선에 몸을 싣게 된 김 옹은 4년간의 지옥같은 섬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미 두 번이나 김행진 옹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가족들은 김 옹의 모습을 보자 온통 울음바다가 됐다.
“월급은 커녕 편지조차 못받았다고 하더라구. 억지로 끌어가서는 이제와서 모든 배상이 끝났으니 모른다는 식의 일본정부 태도가 가장 화가 나.”
당시 악몽같았던 솔로몬제도 생활을 떠올리는 듯 김행진 옹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 당시 처참했던 솔로몬제도 주둔 일본부대의 내용이 담긴 책자, 김행진 옹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에서 제작됐다
◇일본정부도, 한국정부도 원망스럽다
솔로몬제도에 투입된 일본군의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김 옹은 한국인들의 숫자가 대략 5천여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3천 명씩 탄 배가 11척이 솔로몬제도로 향했는데 이중 배 2척 정도가 한국인으로 가득 찼었다는 것이 김 옹의 기억이다.
김행진 옹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지난 2001년부터 일본정부를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했다.
뜻있는 일본변호사 5명이 무료변론을 자처했고 일본 내의 일부 언론들도 관심을 가지며 여론이 우호적으로 가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김 옹을 비롯한 250명은 지난 1965년 한일조약을 통해 일본정부가 배상을 끝냈다는 이유로 피해보상 소송판결에서 지고 말았다.
“소송에서 지고 나니까 역시 민간인의 힘으론 역부족이라는 것이 느껴졌어. 이럴 때 우리나라 정부가 힘이 돼줘야 하는데 정치적으로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지.”
김 옹은 다시 일본 고법에 항소장을 제출했고 오는 4월 이에 대한 판결이 다시 이뤄질 계획이다.
현지 변호사들이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줬지만 김 옹은 여전히 내심 불안하다.
일제시대 때 피해를 입은 징용, 징병 피해자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공전하고 있는 상황 역시 김 옹에게는 또다른 상처다.
“돈 몇 푼이라도 더 받자는 게 아니야. 일제시대 때 피해본 사람들을 우리나라 정부가 이렇게 신경쓰고 있다는 일본정부에 대한 압박의 의미가 더 큰 거야.”
이미 일본에서는 오래 전에 요미우리, 아사히 등 일본의 주요 언론과 방송국, 대학 연구진들을 보내 김행진 옹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조사한 책자까지 펴냈지만 국내에서는 지난 2005년 시작된 일제강점하 피해조사 접수가 전부다.
“나 죽기 전에 일본정부와 왕이 속시원히 사과하는 것을 보고 싶어. 강제로 한국사람들 총알받이로 끌어들인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사과. 다른 나라를 침범한 전쟁이 잘못된 일이고 다시는 그런 일 벌이지 않겠다는 사과. 그게 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