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쇼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9-06 04:35:02
동국대 쇼크 | |
미추홀 |
향가를 학문으로서 처음 연구해 '향가 및 이두의 연구'라는 저서를 낸 이는 경성제국대학교의 일본인 교수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였다. 그에 충격을 받은 영문학도 양주동(梁柱東)은 전공을 국문학으로 돌려 끝내 한국의 명저 '조선고가연구'를 펴냈다.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한 서정주(徐廷柱)는 그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42년 이후 친일 작품들을 써 문명이 많이 쇠락했지만, 그의 귀기어린 시들은 한국시의 수준을 크게 높인 것으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문청(文靑) 시절, 필자는 무애(无涯), 미당(未堂) 두 분 선생을 존경해 마지않았다. 더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국대(東國大) 교수로 재직하고 계셔서 '작가의 산실' 하면 의당 '동국대'를 떠올렸다. 그 영향 아래 수많은 시인, 작가가 배출된 것은 물론이다.
그런 대학의 문기(文氣)가 하루아침에 흐려진 것은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는 교수가 나타난 이후부터다. 멀쩡한 국민들에게 '만경대 정신'을 학습하게 하려는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그의 언표가 준 사회적 충격은 가히 메가톤 급이었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이번에는 '신정아 교수' 사건을 터뜨렸다. 미모의 큐레이터가 가짜 서류와 언변으로 버젓이 대학 교수가 될 수 있었고 거기에 권력 실세와 종단 인사, 재단 이사들까지 조연으로 출연한 것이 알려져 범국민적 화제를 낳고 있는 중이다.
불행한 모습이다. 그 옛날 공자는 "군자는 의(義)에 민첩하고 소인은 이(利)에 민첩하다"고 했거늘 이 나라 최고의 지성(知性) 집단이 마치 무슨 3류 정당처럼 주류·비주류로 패를 갈라 허구한 날 주도권 다투기에 영일이 없었다니 하는 말이다. 타 대학도 이에서 '오십보 백보'란 얘기가 항간에 있으나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조우성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