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생지옥이구나, 신음이 나오더라구요."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5 15:23:26
"이게 생지옥이구나, 신음이 나오더라구요."
소음때문에 소리가 안들려 호루라기로 신호보내
제가 동일방직에 입사를 한 날이 66년도 1월 18일이었어요. 동일방직이 저한테는 첫 직장이었어요. 요즘 사람들한테는 그 당시(60∼70년대)에 봉제공장의 조건이나 환경?가장 열악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동일방직에서) 쫓겨나고 주안에 있던 원풍물산이라는 봉제공장에서 8개월 정도 일을 했는데 '아! 이건 양반이구나'했어요. 그래도 봉제공장은 일요일은 쉬었고, 밥 먹을 시간은 있었으니까요.
처음 (현장에) 들어가서는 이것이 생지옥이구나 하는 신음이 나오더라구요. 말들도 다 일본말로 하니까 말귀를 알아들을 수도 없고, 큰 기계에서 나오는 소음들 때문에 말소리도 들리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호루라기로 대화를 하고 그랬어요. 호루라기 '삑' 불고 이렇게 손짓하면 나오고, 들어가라면 들어가고 이게 뭐냐고 인상을 팍 쓰면 실들이 많이 끊어졌다고. 그렇게 손짓 발짓하면서 의사소통을 했어요.
그 때 동일 방직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인천사람보다 전라도하고 충청도에서 온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어요. 관리자들이 우리회사는 충청도 사람들을 빼면 일이 안 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당시에는 그렇게 악조건인데도 여성들이 일할 공장이 없어서 동일방직에 들어가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고요.
그래도 여성들이 제일 많이 갈 수 있었던 데가 방직공장인데 인천에 하나잖아요. 나도 먼저 다녔던 언니를 통해서 과장한테 연평도 조기 한 짝 빽쓰고 들어갔어요. 또 예전에는 송월시장 있는 자리에 일본 사택에서 동일방직 관리자들이 살았는데 그 집에서 동일방직에 취직시켜준다는 조건으로 식모살이를 하다가 공장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꽤 많았어요.
그래도 나는 집에서 다녔으니까 지방에서 올라 온 친구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죠. 그 친구들은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벌어 가지고 고향에 보태주고 동생들 학비 대고 그랬는데 억척스럽게 일을 잘 하더라구요.
그 친구들은 거의 공장 근처에서 두어 명씩 자취를 하면서 생활을 했어요. 같이 살면 돈이 덜 드니까 교대반하고 같이 사는 거예요. 내가 1반이면 상대는 2반, 이런 식으로 살면 교대로 방을 쓸 수 있잖아요. 자취집이라고 해야 부엌도 없는 방뿐이었지만, 그 방에서 라면도 끓여 먹고 그러면서 지내는 친구들이 많았죠. 그때 생활은 비참했죠. 그나마 우리는 집에서 다니니까 괜찮은 편이었는데 자취하는 애들은 제대로 못 먹어서 폐결핵에 걸리는 일도 많았어요.
우리가 동일방직에서 3교대로 근무를 했는데, 새벽 6시, 오후 2시 그리고 밤 10시 이렇게 근무조를 짜서 일을 했어요. 시계가 어디 흔하기나 했나요? 그게 언제더라 아무튼 박정희정권때인가 새마을 운동한다고 동네마다 스피커를 하나씩 달아주었는데 그 스피커에서 4시인가, 4시 30분인가에 새마을 노래가 나왔어요. 그러면 새벽일 나가는 아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깨서 공장에 나오고 그랬죠.
그렇게 새벽에 공장으로 오면 중간에 기계를 세울 수가 없어서 (기계를 세우면 끊어진다고) 작업시간 중에는 식사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새벽 6시에 일을 하면 5시까지 가서 밥을 먹고 현장에 들어가야 하고 그랬어요. 밥도 그냥 짜디짠 깍두기하고 간장, 멀건 국 하나. 그러면 인제 아이들이 시골에서도 고춧가루를 가져온다고. 고춧가루를 간장에 타 가지고 고추장식으로 만들어서 그거에 밤낮 비벼먹는 거죠. 그게 정말 꿀맛같이 맛있었어요.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그런 때가 있었냐고 그럴 거예요.
그리고 당시에 내가 열 일곱 여덟 살이었는데 그때도 법적으로는 만 18살이 되야 일을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자기 이름이 아니라 언니 이름이나 친척 이름으로 공장에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우리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해보면, 국민학교 졸업하고 나서 중학교도 못 가고, 공장에 들어가려는데 나이가 안 되니까 언니 이름이나 친척이름으로 들어온 거였죠. 그래서 실제 나이는 열 다섯 살인 친구도 있었어요.
공장 안은 1년 내내 온도조절이 되야 하니까 스물 몇 군데 부서 중에서 한 두 군데를 빼고는 무릎에서 10센티 이상 올라오는 작업복을 입고 일했어요. 그만큼 더웠다는 얘기죠. 그리고 땀이 너무 많이 나면 탈진한다고, 관리자들이 지금은 보기도 힘든 왕소금을 갖다 놓고 먹으라고 권했어요. 탈진하지 말라고 말이예요.
아휴, 그러니 거기서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쉰내가, 쉰내가 나가지고 진짜 코를 찔러서... 그렇게 일하고 집에 오면 목욕탕이 있기나 한가요? 부엌 하나에 방 한 칸인데... 그러니까 윗도리며 바지를 올리는 데까지 올리고 엄마가 목말(목물)을 해주는 게 다였어요.
자취하는 친구들은 더 고생스러웠죠. 물이 흔하기나 했나요. 그 때는 전부 우물물 길어다 먹을 때인데, 그러니 빨래나 제대로 했겠어요? 그 친구들 중에는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해서 함께 사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우리 옆집에도 다락방에서 동생이랑 같이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옛날 엄마들은 그렇잖아요. 어린것들이 동생 데리고 와서 돈 번다고 하니까 밥을 제대로 해먹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국수 삶아 먹으면 같이 국수 먹고, 밥도 같이 먹고 하면서 동네사람이랑 잘 지냈던 것 같아요.
옛날 엄마들의 나눔이라는 거는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나누는 게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이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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