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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싸리재

by 형과니 2023. 5. 10.

싸리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19 00:32:57

 

서구 문물 유입의 일번지 - 싸리재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 서구문물 유입의 통로로 자리를 잡으면서 인천은 각 나라 상품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새로운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상점들도 속속 생겨났다. 그러나 개항 초창기만 해도 인천 자체만으론 인구나 물자수요가 그리 많지 않아 내국인들이 운영하는 상점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 점차 개항장으로 활성화하고 외국상사들이 인천에 잇따라 대리점을 개설하면서 1920년대 말을 전후해 지금의 배다리_경동사거리_신포동 한미은행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됐다. 당시 주를 이루던 업종은 포목전. 특히 경동 싸리재(배다리 철교를 지나 경동사거리에 이르는 고갯길로 싸리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인 이름)길을 따라 포목점과 양화점이 성업을 이뤘다. 광목과 구두는 당시 가장 유행했던 품목이었으나 서민들이 구입하기엔 가격이 워낙 비쌌다. 하지만 하도 인기를 끌었던 탓에 무리를 해가며 사는 이들도 꽤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때 구두 한켤레 값이 쌀 2~3가마니 값과 맞먹었다니, 구두가 얼마나 비싼 사치품이었는 지를 엿보게 한다.

경동에 있던 당시 인천유일의 중앙예식장

 

양화점은 1885년 단발령을 내린 후 양복·양장 차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개화풍조의 하나였다. 처음엔 서울 종로와 인사동 골목에 가죽구두를 만드는 양화점들이 문을 열었다. 이후 인천에도 양화점이 들어서, 지금의 경동파출소 위에 있던 삼성태란 양화점은 구두를 개조한 새로운 경제화를 선보여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해방후엔 백마양화점서울양화점이 문을 열어 70년대 중반까지 성업을 이루다 공장에서 만들어 낸 값싼 기성화제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삼성태양화점 건너편엔 최씨로 불리던 사람이 대장간을 운영했고, 그 바로 위에 가설극장인 협률사(協律舍)가 있었다. 협률사는 나중에 개축을 한 후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애관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싸리재 주변은 일제시대 부터 약국으로 유명했다. 이 곳엔 일제 때 평화당약국을 비롯 대제원등 한약방들이 모여 있었다. 그 명맥을 이어 지금도 이 일대엔 동서대약국싸리재약국등 대형 약국들과 함께 각종 병·의윈들이 밀집해 있다. 해방전만 해도 약국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 김포 등 먼 지역의 주민들도 약을 사려고 싸리재를 찾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중인 1952년 율목동에 기독병원이 설립된 이후엔 약국과 개인병원들이 속속 근방에 들어서 싸리재는 한동안 인천의 의료타운으로 불리기도 했다.

 

싸리재는 양화점들을 중심으로 인천 최초의 백화점인 항도백화점과 기독병원, 신신예식장 등이 자리를 잡으면서 70년대 후반까지 지역상권의 중심지로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자연히 젊은이들이 모이면서 인천 제1의 번화가로 자리를 굳히게 됐다. 싸리재 일대가 번창을 이뤘던 이유론 크게 세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기독병원을 중심으로 의료시설이 밀집해 있었다는 점, 둘째는 신신예식장항도백화점주변에 은행과 양복점, 양화점, 금은방 등 다양한 업소들이 들어서면서 생필품을 구입하기 쉬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애관극장과 인형극장, 중국요리집인 평화각주변에 음악다방과 당구장 등이 몰리면서 젊은이들이 자주 찾았던 이유를 들 수 있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예식장하면 신신이었다. 인천의 서양식 예식문화를 선도했던 신신예식장은 지역갑부였던 장광순씨가 운영했다. 한옥형식의 1층 건물로서 넓은 야외피로연장도 갖추고 있어 발길을 끌었으나 몇년전 개축한 이후론 옛 정취를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예식장과 함께 성업을 이뤘던 양복점으론 자유라사가 유명했고, 지금은 이수일양복점도성라사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 가구거리에 있던 항도백화점은 서울의 화신백화점에 비해 볼품은 없었으나 인천시민들에겐 색다른 볼거리와 잡화를 제공하는 쇼핑공간으로 한동안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중구청 부구청장을 지낸 이근식씨(62·원광해운 부사장)70년대 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의 최고 오락은 다방에서 친구, 연인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주로 싸리재 주변 일대 음악다방들을 즐겨 찾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또 당시 다방에선 손님들이 DJ에게 듣고 싶은 노래를 쪽지에 적어 신청하면 음악을 들려 주었다잡음 섞인 레코드판이 돌아가며 흘러 나오던 음악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애관극장옆에 위치했던 중국요리집인 평화각에 얽힌 사연도 많다. 중구의회 김환 전문위원(56)"평화각 2층 골방에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음식을 시켜 놓고 도꾸리란 작은 술병에 담아 팔던 고량주를 엽차잔에 따라 몰래 마시면서 어른들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돈이 모자라 음식값 대신 시계나 사전 등을 맡기는 젊은이들도 많아 평화각엔 보관품들이 늘 쌓여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처럼 번성을 누리던 싸리재 거리도 80년대 이후엔 다른 지역의 개발에 밀려 이제 인천인들의 추억속에만 남은 채 잊혀져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