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립해운회사 이운사(利運社)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8-20 12:04:59
인천 개항장 풍경(8) - 근대문화로 보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1)
- 관립해운회사 이운사(利運社)-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그간 인천에 애정을 갖고 있던 많은 향토사가들에 의해 ‘근대 최초 문화’와 관련한 자료들이 정리되어 왔고 이를 통해 인천의 역사와 문화는 더욱 풍요로워졌다. 개인으로서 인천자료를 찾아 나선 지역 연구자들의 노고는 지역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며, 최초사에 관한 책자 발간에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인의 기억이나 확인되지 않은 풍설에 의존한 사례도 있고, 전거를 밝히지 않은 채 ‘최초’라 이해한 부분도 없잖아 있다. 근대 개항장으로 기능했던 인천은 타 지역보다 앞선 내용들이 많을 수밖에 없지만, 근현대에 있어 ‘최초’적 사실들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평가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도출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인천 개항과 더불어 개항장에는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조성되고 근대문물이 들어오면서 최초에 해당되는 여러 가지가 생겨났다. 1883년 서구 무역상사의 진출과 서구식 주택 건립, 이방인들의 외국인 묘지 조성에서부터 1946년 국내 1호의 공립박물관인 시립박물관의 개관에 이르기까지 ‘한국 최초’에 해당되는 문화들이 형성됐다. 비록 급변하는 시기에 타율적으로 생성됐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러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밝혀가는 것은 인천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역사적 공간, 인천’의 개척지로서의 발자취를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전거를 밝힐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몇 차례에 걸쳐 분류·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최초의 사실들은 넓은 범주에서 산업경제, 사회, 문화의 3부류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그 중 산업경제적인 면에 해당하는 사실들이 가장 많고, 다음이 제반시설이나 제도 등을 포함한 사회면이며, 나머지가 교육을 포함한 문화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소개함에 있어 개항장 인천의 풍경을 기술하면서 이미 설명됐던 사실들은 언급하는 정도에서 그치기로 할 것이다.
우선, 산업경제 부분에서 ‘한국 최초’라고 일컬어지는 사실로서는 서양무역상사의 진출에 따라 영국계 이화양행(Jardine Matheson&Co.)이 1883년 최초로 지점을 설치한 데 이어 세창양행(E.Meyer&C.Walter&Co.), 타운센드(Townsend&Co), 홈링거양행(Holme Ringer&Co.) 등이 개설됐다. 세창양행은 최초의 상업광고 ‘덕상세창양행, 고백(1886.2.22, 한성주보)’으로 알려져 있으며, 타운센드상회의 경우도 최초로 스팀동력정미소(1892)를 운영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조선인들도 우리 상권을 지키기 위해 최초로 신상협회(1897)를 조직했고, 최초의 관립해운회사인 이운사(1892)를 운영했으며, 금융기관 최초의 지점인 대한천일은행(1899)을 인천에 설치·운영했다.
# 우리 손으로 운영한 관립 해운회사, 이운사(利運社)
▲ 객주회상상도
우리나라는 19세기까지 철도가 부설되지 않아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비롯한 곡물, 소금, 재목 등 부피와 중량이 많이 나가는 화물 수송은 모두 선박을 이용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연안 해운업의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고 선박 구조가 취약해 침몰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 와중에 개항으로 통상 관계를 갖게 된 일본, 청, 서구제국은 증기 기선을 도입해 해운업에 뛰어들어 재래선박을 사용하던 우리 해운업을 압도했다. 이러한 외국의 해운업 침투에 맞서 정부와 민간은 해운회사를 조직하고 기선을 도입해 근대적인 해운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회사 가운데, 1886년 10월 이병선이 설립한 대흥상회가 민간에서 설립한 최초의 해운회사였다. 이 회사는 미국인 에드워드 레이크(Edward Lake)로부터 72� 규모의 기선을 구입해 ‘대흥호’라고 명명하고 일본인 선원을 고용해 항로가 연결되지 않은 항구 간의 미곡 운송을 했으나 자본 부족으로 문을 닫았다. 이 외에도 삼산회사, 우체기선회사, 원산상회 등이 개설됐고, 인천에서는 1890년에 의신회사(義信會社)가 설립돼 운영되기도 했다.
해운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에서도 민간과는 별도로 ‘이운사’라는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이운사는 1892년 12월에 전운국(轉運局)에서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해운회사로, 민영준과 전운국 총무관 정병하, 인천 경찰관 우경선 등의 발의에 의해 청국에서 20만 냥의 차관을 도입해 설립됐다. 이 회사는 청의 초상국을 모방한 회사로서 세곡 운송을 주목적으로 하며 화물과 여객 수송도 담당했다. 창설 당시의 사장은 민영준, 부사장은 정병하, 그리고 조필영과 우경선이 각각 전라도 전운 총무관과 사무관에 임명됐으나, 실무는 대개 우경선이 담당했다.
▲ 세창양행의 마이어와 볼터
이운사는 설립과 동시에 전운국이 맡아 하던 해운업무와 현익호(顯益號), 창룡호(蒼龍號) 등의 기선을 함께 인계받아 세곡 운반에 투입하는 한편, 따로 독일에서 1천�급의 기선 조주부호(潮州府號, 뒤에 이운호로 개명)를 구입했다. 이운호는 1896년경에 세창양행을 통해 구입했는데 선박구입대금을 완전히 지불하지 못해 세창양행이 선박의 운영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또 상해조선소에서 한양호를 건조해 보유 기선 수를 늘렸다. 이들 기선은 조운에 투입되는 한편, 개항장과 각 항구 간, 또는 국내 각 개항장과 외국 항구 간의 화물과 승객 운송을 맡아 했다. 또 일본에서 30�급의 소형 선박인 경운호, 광리호, 광제호, 전운호와 풍범선(風帆船) 15척을 따로 구입해 연안의 세곡 운송에 투입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등 제국을 견제하고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현익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화물 700개 정도(총기 3천 정 포함)를 싣고 인천에 입항하기도 했다.
이운사의 초기 경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세곡 운송만을 담당하던 전운국 단계에 비해서는 분명 발전한 것이었지만, 정부의 불합리하고 강력한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물론 이운사는 정부로부터 각종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이운사 선박은 빙표 없이 내륙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으며, 선박 유지비는 정부에서 항세 등을 통해 지급했다. 또 일반 상민들에게는 외국 선박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운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국가의 공공화물은 물론 관리나 권세가의 화물까지도 무상으로 수송해야 했던 재정 부담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또한 증기 기선의 운항에 익숙한 국내 기술자가 없었기 때문에 전운국 당시부터 기선 운항에 필요한 기술적 업무는 모두 외국인을 고용해 처리하고 있었다. 1895년에도 기술 교습을 통한 학도와 학도감독을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상황은 갑오개혁 이후까지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던 듯하다.
1894년부터는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이 위탁운항을 맡았다. 1896년 선박을 돌려받았으나 세곡 운송이 줄어 업무는 재개하지 못했다. 이후 소속 선박을 세창양행 등에 위탁해 경영하게 되며, 우리나라의 연안 해운업은 일본의 상선회사가 독점하게 됐다.
▲ 외국인묘지
한편, 동학혁명 당시에는 조선군과 청나라 군사 및 군수물자를 전라도 지역으로 수송하기도 했다. 조선군은 강화 총제영에서 차출한 70명의 군사와 6근 야포 1문, 화약 4상자, 탄약 2상자를 수송했다. 1897년 3월에는 제주도로 유배가는 죄인들을 수송하기도 했다. 이는 이운사가 상선회사로서의 기능 외에도 정부가 요구하는 비상업적 활동도 수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이운사의 사무관을 겸직했던 우경선은 1897년 광통사(廣通社)를 설립해 정부 소유의 해룡호를 불하받아 군산, 목포 등에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1900년에는 안기영 등이 인천시 내동 103번지에서 대한협동우선회사를 설립해 인천항을 기점으로 진남포, 부산 등의 항로에 취항했다.
<※ 자료제공=인천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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