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성냥공장과 담배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9-18 01:26:42
인천 개항장 풍경(11)
근대문화로 보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5)
- 인천의 성냥공장과 담배-
강덕우 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최초의 성냥공장과 인천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는 “1886년 제물포에 외국인들의 지휘 하에 성냥공장이 세워졌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하게 됐는데, 그 주요 원인은 일본제 성냥이 범람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록으로는 이 성냥 공장의 정확한 위치, 또 상호라든가 회사 규모 등을 알 수는 없지만 한국 최초의 성냥 공장이 인천에 있었던 것만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성냥의 국내 전래는 1880년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 갔다가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과 동행 귀국할 때 처음으로 성냥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하고 있고, 일반에게 생활용품으로 대중화하기는 국권피탈 후인 1910년대 일본인들이 인천에 조선성냥[朝鮮燐寸]을 설립한 것을 비롯, 군산·수원·영등포·마산·부산에 공장을 설립해 생산 판매함으로써 가정용으로 확대·보급된 시기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인천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 10월 금곡리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였다. 이 공장이 인천에 들어선 것은 경인지역의 넓은 시장과 무엇보다도 압록강 일대 삼림지에서 생산되는 목재 원료를 배편으로 쉽게 들여올 수 있는 이점 때문이었다. 이 회사는 신의주에 부속 제재소까지 두었고 직원도 남자 200명, 여자 300명 등 총 500여 명으로 패동, 우록표(羽鹿票), 쌍원표(雙猿票) 등의 성냥을 연간 7만 상자를 생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냥갑 제조를 위해 하청을 주는 곳이 500여 호에 달할 정도로 규모나 생산량이 대단했다. 그 무렵엔 기계화가 잘 이뤄지지 않아 성냥개비에 인을 묻히거나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넣는 일을 전부 수작업으로 했다.
당시 지역 여건을 서울과 비교해 보아도 서울에는 성냥공장을 세울 만한 부지가 없었고 전력도 인천보다 부족했으며 인천은 성냥공장이 들어서기에 적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 동구 금곡동 고지대엔 인천 최초의 변전소 시설까지 들어서는 등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 공급 사정도 서울보다 훨씬 나았던 것이다. 이 무렵 서울이나 대구 등지에 세워졌던 성냥공장들이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얼마 못가 문을 닫은 것도 이러한 여건들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냥공장에선 주로 10대 소녀들이 일했으며, 성냥공장 외에 금곡동과 송림동 지역의 500여 가구가 성냥갑을 만들어 공장에 납품하는 일에 종사했기 때문에 인천지역 최고의 가내 수공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당시 금곡동 일대 빈터나 도로변엔 햇볕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으로 온통 뒤덮이는 등 동네 전체가 성냥공장을 방불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1년 3월 조선인촌주식회사의 직공 150명이 지배인 배척을 선언하고 동맹파업에 들어간 이래, 인천지역 각 성냥공장에서는 파업이 잇따랐고,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제 요구 등 동맹파업이 계속되기도 했다. 인천의 성냥공장은 성냥제조업의 시발점이자 본거지라는 연대기적 의의 말고도 일제시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쟁의 현장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성냥을 독점 생산하기 위해 조선인의 기술 습득을 막았기 때문에 우리 손으로 성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15 광복 이후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성냥공장도 인천에 설립된 대한성냥이었다. 이 무렵 전국에 300여 개의 수공업 형태의 공장이 설립됐다. 1970년대부터 생산 시설이 자동화되며 업체 규모의 대형화로 업체수가 20개로 감소됐고, 점차 성냥의 대체 수단인 라이터의 보급으로 많은 성냥공장이 문을 닫았다.
인천하면 지금도 성냥공장과 직공 아가씨들을 연상하는 것은 이렇게 인천이 우리나라 성냥 공업의 출발지요 메카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성냥 생산은 손이 많이 가는 산업이었기 때문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많았던 데서도 그런 연상을 하게 된 것이다. 성냥을 말하자면 담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 담배
조선사회에 담배가 전래된 이래 연초의 수요는 계속 증가해 갔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일용품처럼 사용돼 미곡과 똑같은 비중으로 취급되고 귀하게 여겨졌다. 당시 일반 민들은 주로 엽연초를 잎 그대로, 관리·양반·상인·지방의 토호·부호 등 상류계층은 각연초(엽연초를 잘게 썰어 가공한 것, 살담배)를 담뱃대(곰방대, 長竹)에 담아 피웠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은 사대부층의 사치풍조를 쇄신하기 위해 장죽(긴 것은 1m)의 길이를 반으로 줄이라고 명하기도 했다.
1876년 개항 이후 외국 담배가 유입·소개됐고, 1883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일원의 소비지역 관문이었던 인천이 개항한 후에는 서양 및 일본의 담배 수입이 증가해갔으나, 그들이 수입한 담배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대도시의 양반관리나 상인층 및 부호층 등 상류계층을 대상으로 유포됐기 때문에 한국인의 소비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은 군대 및 인부의 이동에 따라 외래 담배가 널리 내지에 전파되는 계기가 됐고, 또 당시 김홍집 정권은 길거리에서 한국인이 종래 사용해 오던 긴 담뱃대(長煙管)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외국에서 수입한 담배의 수요가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1895년 실시된 단발령은 결과적으로 양복을 착용하게 함에 따라 긴 담뱃대의 휴대보다는 서양식 담배가 편리하게 됐다. 더욱이 한국인의 관습 중에서 어린 사람이 연장자 앞에서 끽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담뱃대를 휴대하기도 어려운 사정도 한 몫 하고 있었다.
그리해서 1900년경 담배는 이미 내륙지방의 소읍에서도 주요한 상품으로 거래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보급됐다. 당시에 수입된 담배는 일본제가 다수를 차지했는데 목촌합명회사(木村合名會社)·촌정형제상회(村井兄弟商會) 등의 인천지점이 생겨났고, 특히 촌정형제상회 인천대리점에서 판매하는 히로(HERO)는 담배의 대명사로 인식됐다. 이렇게 한국에 수입된 담배는 황성신문·독립신문·제국신문 등의 광고를 통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담배의 소비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때와 거의 동시에 외국의 자본은 자국의 담배를 수입·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에 연초공장을 설립해 직접 제조·판매코자 했다. 1896년 경성에 담배제조업에 전념하는 일본인이 나타난 이후,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주로 인천·부산 등의 거류지를 중심으로 대자본을 투자해 제조공장을 설립하고 담배를 제조·판매하면서 시장을 확보해 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양연초회사와 인천연초회사다. 동양연초회사는 그리스인 밴들러스 필립이 영국인과 합자해 1902년 5월 인천에 자본금 3만 원을 투자해 빈정(濱町:사동)에 설립한 것으로 담배를 제조·판매했다. 1903년 5월에는 자본관계로 조업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영업은 계속했다.
인천연초회사는 동양연초회사의 지배인이었던 영국인 해밀턴이 동양연초회사를 떠나 1903년 11월 인천에 자본금 5만 원을 투자해 청국거류지에 설립했다. 이 회사는 후에 일본인과 합자해 인천연초·권련초회사(仁川煙草及卷煙草會社)로 개칭, 영업했다.
일본인은 담배제조의 절대적 우세하에 한국인의 제조업을 능가하고 있었는데,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상하이 영미연초회사(英美煙草會社)의 담배가 한국에서 판매되고 1906·07년에는 한국의 주요 도시에 판매점을 설치하면서 일본 담배와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이게 됐다. 급기야 1908년 영미연초회사 인천 공장을 설립해 제조판매에 돌입하자, 1909년 일본정부는 동아연초회사에게 특허권을 주어 경성에 대규모 연초공장을 설립해 영미연초회사에 대항했다.
1910년대 담배의 생산액은 정미업 다음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고 그 업에 종사하는 직공수는 제조공장 가운데 가장 많았다. 연초공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사회적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단체를 결성했고, 이들의 노동쟁의는 특히 일본인 제조공장에서 두드러졌으며 다른 분야의 노동운동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들의 항거의 표시가 3·1운동에 참여하는 간접적 원인이 됐던 것이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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