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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인천의 산이동 구전설화

by 형과니 2023. 5. 19.

인천의 산이동 구전설화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1-15 22:39:37

 

인천의 산이동 구전설화

이영태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BK21 연구교수)

 

# 서울을 향한 짝사랑-인천의 산이동 구전설화

 

설화는 구전되는 이야기를 총칭한다. ()이란 글자의 뜻에 말하다와 그것을 듣고 즐거워하다가 결합된 것이니 만큼 설화는 발화자나 수신자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수신자는 수신자에 머무는 게 아니라 발화자로 변모해 새로운 수신자를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이런 과정에서 발화자는 기존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에 맞게 윤색 및 가감을 한다. 특정 설화의 발화자가 특정인 아니라 누구이건 발화자이면서 동시에 수신자일 수 있는 것이다.

발화자와 수신자의 양면을 지닌 자들은 흥미소, 효용소, 목적소라는 설화의 전승 동인(動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승 동인에서 흥미소는 주로 민중계층에 작용하는 전승소(傳承素)로서 민중들로 하여금 설화를 창작·형성·전파케 하는 동인이다. 효용소는 특수집단의 포교와 영험의 제시에 이바지하는 동인이다. 목적소는 주로 상층민인 지배계층에 작용하는 전승소로서 자기네의 문화적 우월과 교훈성을 과시하려는 목적에 의해 설화의 형성·전파에 가담하는 동인이다.

인천의 설화도 이러한 동인에서 예외일 수 없다. 다만 설화를 이러한 동인에 의해 단순히 판단하기보다 배후를 통해 발화자와 수신자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사례에 해당하는 게 인천의 구전설화에서 산이동 설화. 산이나 섬이 이동하다가 현재의 위치에 머물게 됐다는 이야기가 그것인데 이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

 

 

옛날 먼 옛날 서해 바다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섬이 큰 꿈을 꾸고 서울로 가서 크게 뽐내고자 한양으로 떠들어가다가 선갑도(仙甲島)가 들어 앉으려는 자리에는 이미 목멱산(木覓山:남산)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서울로 떠들어 가려던 선갑도는 도중에 머무르게 된 것이라 한다.(‘옹진군지’)

 

그래 인제 서울까진 가지 못하구선 여기 만리산이 만 리 밖에서 떠들어와 가지구서는 여기에 앉어가지구, 떡 보니깐 두루 삼각산이 벌써 들어와 앉았으니깐 가질 못하구, 그냥 거기 주저 앉었대지. 그래 만 리 밖에서 떠들어와서 만리산이지.(‘한국구비문학대계’)

 

저 산. 요 산으로다가 영락 우렁이 모냥 생겼어, 산이. 그 산은 전설로 뭐라고 그러느냐 하니, 서울로 도읍하러 들어가다가, 우리나라는 산세 가지고 도읍한다고 그러잖아요. 산이 들어가다가 서울 삼각산이 먼저 들어갔다는 거야. 그래서 드러운 맘 먹어가지고 돌아앉았다 하는 전설이야.(‘강화구비문학대관’)

 

위의 산이동 설화들은 도읍과 관련돼 있다. ‘서울로 가서 크게 뽐내려다가 목멱산이 자리잡고 있는 관계로 좌절한 선갑도나 서울 가는 도중에 삼각산이 이미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고 눌러 앉은 만리산우렁산이 그것이다. 우렁산의 경우는 드러운 맘 먹으며 돌아 앉았다는 것이다. 서울을 향하다가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목멱산과 삼각산으로 인해 눌러앉은 게 선갑도와 만리산, 그리고 우렁산이라는 유래는 단순히 전국에 분포된 산이동 설화의 하나로 판단할 수도 있다.

 

흔히 산이동 설화를 창세신화적 성격을 지닌다고 판단하는데 이에 머물 게 아니라 인천의 경우는 다른 접근이 필요할 듯하다. 선갑도와 만리산, 그리고 우렁산은 정말 서울을 향해 움직였을까? 라는 아이들의 우문(愚問)에 우리는 그렇다 아니다 라고 대답할 게 아니라 산이 왜 서울로 향해야 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발화하는 자나 수신하는 자가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에 대해 현답(賢答)을 제시해야 한다.

 

선갑도, 만리산, 우렁산이 향하던 곳이 서울이었기에 산이동 설화가 조선시대 한양을 도읍을 정할 때 비로소 생성됐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산이동 설화는 그 이전에 생성됐다가 구비전승되면서 조선에 이르러 그들이 향하던 곳이 서울로 바뀌었을 뿐 산이동 이야기의 유래는 유구한 것이다.

 

혹자는 서울을 도읍으로 정할 때, 인천의 산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던 바람으로 설화를 읽기도 하지만 이는 낙관적인 지적이다. 서울에 있는 삼각산이나 목멱산은 만리산, 우렁산, 선갑도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와 풍광을 지니고 있다. 서울을 향하고자 하는 것은 산이기보다 산에 인격을 부여한 사람들이기에 좌절감은 산이 아니라 인천사람들이 느끼는 것이다. 서울을 향한 짝사랑이 좌절된 게 산이동 설화로 재연된 것일 뿐 그 이상과 이하도 아니다.

 

우문(愚問)에 대한 현답(賢答)이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사람을 낳으면 한양으로,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낸다는 속담처럼 사람들 대부분 서울을 향해 짝사랑을 하지만 서울은 그것을 받아줄 넉넉한 인심을 지닌 공간이 아니다.

 

인천이 경기도(京畿道)에 속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은 서울의 의미이고, ()는 서울의 식량()과 방어(), 그리고 옷()을 공급한다는 의미다. 서울과 공존하는 게 아니라 서울을 위해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서울을 향한 막연한 짝사랑이 인천의 산이동 설화에 그대로 재연된 셈이다. 그것도 우렁산의 경우처럼 드러운 맘 먹으며 말이다.

 

영종도 옆에는 서풀섬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중국서 떠들어온 불산이라고 합니다. 이 섬이 떠들어온 것은 영종도를 불살라 버릴라고 왔다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영종도를 불살르라고 했넌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서풀섬이 떠들어오니까 영종도 용수동(龍水洞)에 있는 큰 연못에서 용이 나와서 물을 뿜어서 서풀섬의 불을 껐답니다.……이 서풀섬에서는 본토백이보다 타지에서 들어온 사람이 더 잘삽니다. 이것도 이 섬이 떠들어왔기 때문에 타지 사람을 더 잘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한국구전설화’)

 

중국 쪽에서 섬이 영종도 옆으로 이동했다. 이상하게도 서풀섬이나 불산으로 불리는 이 섬의 주민들은 영종도 주민들보다 훨씬 잘 살았다. ‘서풀이란 단어가 서푸리’ ‘섶불이거나 땔나무 ()’의 의미다. 어떤 것이건 불에 쉽게 타는 것이기에 불산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서풀섬은 신불도(薪佛島)이고 용수동은 지형이 가마솥 모양이었던 운서리의 가마골인데 이들은 모두 인천공항의 부지로 편입돼 사라진 상태다.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곳에서 구전되던 설화를 통해 보건대, 서풀섬의 주민들이 사는 정도가 여타의 인근 지역에 비해 나았던 것 같다.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신불도 옆에 위치하고 있는 가마골의 서쪽 마을 용수동의 용을 등장시켜 물을 뿌려가며 불을 껐던 것이다. 여러 시대에 걸쳐 내려온 속담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가 있듯이 영종도 한켠에 자리잡고 있던 서풀섬이 경제적으로 윤택하자 이에 대한 부러움을 드러낸 구전설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불도가 윤택했다는 기록은 어디서건 확인할 수 없다. 혹자들이 인천과 중국 간의 해상항로를 운운하면서 신불도의 경제력을 방증하려 하지만 풍설에 가까울 뿐 확증할 자료는 전무하다. 다만 영종진의 서쪽 30리에 있으며 사람이 살고 있다거나 옛날에 목장이 있었다(‘여지도서’)”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서풀섬(신불도)이란 명칭은 말 목장에 필요한 먹이 즉 과 관련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말 목장은 국가 관리 하에 있으며 말 먹이에 불이라도 붙으면 문제가 생기기에 인근 용수동의 용이라도 나서서 꺼야 할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풀섬 설화를 이해하는 게 차라리 타당할 것이다.

 

 

薪佛島로 말하면 不過 十二戶밖에 없는 貧寒小島인데 이 섬의 擔當金額으로 보면 不過 十三圓이라는 小金額이나 이것조차 如意判出하지 못할 만하도록 平日生活慘憺洞里인 바 同島 住民 一同悽慘無比大慘狀을 듣고는 이것을 함은 우리의 本分이라고 一同全力을 다하여 率先하였다는 바(‘시대일보’, 1925812) ([신불도로 말하면 불과 12호밖에 없는 빈한한 소도인데 이 섬의 담당금액으로 보면 불과 13원이라는 소금액이나 이것조차 여의히 판출하지 못할 만하도록 평일에 생활이 참담한 동리인 바 동도 주민 일동은 처참무비의 대참상을 듣고는 이것을 구함은 우리의 본분이라고 일동이 전력을 다하여 솔선하였다는 바] - 본글은 한자와 한글 혼용돼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글로만 평기한 것임 - 편집자 주)

 

1920년대 신문 기사의 일부분이다. 신불도는 빈한한 작은 섬으로 가구의 수가 12호였고 주민의 생활은 참담할 정도였다. 하지만 생활수준을 넘어서는 수재의연금을 모았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서풀섬(신불도)을 경제적 윤택과 관련시키기보다 말 목장과 관련된 명칭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서풀섬 설화가 말 목장과 관련됐다고 할 때, 경기(京畿)라는 글자의 의미에 합당하다. 과거에 말 목장이 있었는데 그 말은 성장과 더불어 서울로 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의 산이동 구전설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서울을 향한 짝사랑이나 공급처로 만족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