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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⑧오푼도>

by 형과니 2023. 6. 5.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오푼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12-09 19:06:48

 

5푼짜리 가짜 돈 만들어 오푼도로 불려

해수욕과 망둥어 낚시를 즐기던 시민들 놀이터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오푼도>

 

 

 

현재 인천에 거주하는 사람 중 오푼도(五分島)를 아는 사람은 10%도 안된다. 오푼도는 50년전인 1960년대까지 불리다 사라져간 옛말이 된 것이다. 오푼도는 원래 구한말 다소면 선창리 (중구 사동<沙洞>)에 속한 자그마한 섬이었다.

 

모래가 많은 섬이라 해서 사도(沙島)라 불렸는데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이 일대 바다를 매립해 자신들이 사는 거류지를 만들면서 육지(지금의 인천항)가 됐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일본인 거류지 (지금의 삼익아파트) 뒤쪽에 둑으로 바다를 막아 물을 담수시켜 놓아 인천시민들은 이곳에서 해수욕과 낚시(망둥어)를 즐겼다.

 

사도는 육지와 연결되기 전 오푼도라 불렸는데 이는 한동안 이 섬에서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5푼짜리 가짜 돈을 만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1892년 정부가 지금 전동의 옛 인천여고자리에 현대식 화폐를 만드는 전환국을 세우고 그동안 사용했던 엽전 상평통보 대신 현대식 주화를 만들기 시작하자 그 기회를 이용해 가짜 돈을 만들었던 것이다.

 

사동은 광복 뒤인 1946년 사도와 연관 지어 지은 이름으로 일제 때는 바닷가 마을이라는 뜻으로 빈정(濱町)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었다. 사동에는 일제의 우리나라 쌀 수탈과 관련된 사연이 많이 서려있다. 일본은 인천항 개항이후 자신들에게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 계속 쌀을 수출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사실 수출이라기 보다는 수탈이었지만 그 결과로 1890년쯤부터 수출이 시작됐으며 1897년 무렵부터는 인천항을 통한 쌀 수출량이 전국 수출량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다. 이처럼 쌀 수탈이 계속되자 가뜩이나 형편이 좋지 않았던 조선의 각 지방에 식량난이 일어나 큰 문제가 됐다.

 

한 때 조선 정부는 쌀을 지키기 위해 방곡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나 힘이 없어 주권을 잃어가는 처지에 큰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쌀 수출이 시작되자 일본인들은 1896년 자유공원 일대에 있던 일본 지계에 인천 미두취인소’(지금의 대한통운)라는 기관을 세워 우리의 객주 조직을 제쳐놓고 일본 상인과 일본 정미업자들이 직거래를 했다.

 

미두란 증권 거래와 비슷한 것으로, 1석에 1원의 보증금을 미두 중개점에 예치한 뒤 보증금으로 쌀을 거래하며 쌀값 변동에 따라 이익이나 손해를 보는 제도다.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빼앗은 뒤 미두취인소가 총독부의 지원아래 크게 번성하자 우리나라 사람들도 미두로 떼돈을 벌어보겠다며 인천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쉽게 쌀값을 조작하는 전문 미두꾼들에게 걸려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무척 많았다. 중개점에서 땅문서를 보증금으로 받는 편법까지 생기면서 문제는 더욱 커졌다. 이곳을 찾는 고객의 90%가 한국사람이었다고 하니 애써 번돈을 모두 이곳에서 잃고 허망하게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충청도 태안의 갑부 권희중이라는 사람이 이곳 미두장에서 가산을 탕진하고 끝내 객지인 인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다. 고 신태범 박사는 소금의 생산과 유통이 많아 그렇지 않아도 짠물로 통했던 인천이 이곳 미두장에서 망한 사람들 때문에 더욱더 짜다는 듣게 됐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당시 사동에는 몇 안되는 조선인 미두중개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미소를 경영하며 큰 돈을 번 경우가 있었으니, 뒷날 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사업가 유성군씨가 바로 그였다. 이렇듯 많은 사연을 간직한 오푼도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현재의 삼익아파트 일대에 철조망을 치고 거주했다.

 

이 때 이곳에서 일을 하던 한국인 노무자들은 식당에서 훔친 고기 덩어리를 비롯해 커피, 토마토 주스, 초콜릿, 과자 등을 비닐에 싸서 철조망 넘어 하천(갯골)으로 던진 후 퇴근길에 주어가곤 했다.

 

당시에는 지금의 용현갯골에서 삼익아파트까지 갯골로 이어져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이 때 커피나 토마토 주스 같은 통조림류는 썰물 때 바닷물에 떠내려가 오푼도에 해수욕을 즐기다 돌아오는 시민들이 횡재를 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영어를 잘 모르던 시민들은 떠내려 오는 깡통을 건져 집으로 돌아오면 부모님이 열어보고 커피 등과 같은 식품은 크게 반겼으나 토마토 주스는 기피하는 품목으로 전락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토마토 주스가 낯 설은 식품으로 비위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영어를 일찍 알았어도 선별을 해서 주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듯 많은 추억을 남긴채 오푼도는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지명이 됐다.

 

남용우 객원기자 nyw1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