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련동-그 길에는‘불편한 진실’이 깔려 있다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1-01-12 00:29:36
지금은 ‘송도’하면 당연히 송도국제도시를 생각한다. 송도국제도시가 조성되기 전에는 흔히 송도유원지 일대를 뜻했다. 그 이전에는 송도역 부근을 일반적으로 송도라고 불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만큼 영역이 넓어진 ‘송도(松島)’라는 이름은 일제가 이 땅에 박아놓은 또 다른 쇠말뚝이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목마른 화차(火車) 물 한모금 마신 곳
구한말 옥련동 일대는 한진마을, 옥골, 독배, 대암 등 자연마을이 있었던 ‘원우이면(遠又爾面, 일명 먼우금)’이었다. 일제는 1936년 이 일대를 인천부에 편입하면서 일본식으로 ‘송도정(松島町)’이라 붙였다. 일본어 발음으로 ‘마쓰시마(松島)’는 일본인들이 즐겨 써 온 땅이름이다. 일본 전역에는 크고 작은 ‘마쓰시마’가 부지기수로 있다.
1937년 수인선이 개통하면서 이 지역에 역이 하나 만들어졌다. 역명은 동네이름을 따서 ‘송도역’으로 붙였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1979년 남인천역~송도역 간, 1992년에는 송도역~소래역 간 운행이 중지되었다. 철로가 폐쇄하면서 송도역도 문을 닫았다.
송도역은 그 기능을 다했지만 역사(驛舍)의 흔적은 가까스로 남아있다. 시골 간이역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송도역은 현재 모 광고회사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역사는 너무 낡아서 비가 오면 물이 새 얼마 전에 슬레트 지붕에 천막을 씌웠다.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한갓 낡은 건물로 밖에 볼 수 없는 이 역사는 자신이 옛날에 철도역이었음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역무원 사무실로 사용했던 방 외벽에 아직도 ‘송도’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수없이 칠해진 페인트칠에도 감춰지지 않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낡은 물건 하나가 철도 정거장의 흔적을 명확히 해준다. 송도역에서 학익동 쪽으로 30미터 가량 내려가면 녹슨 철탑 위에 커다란 철통이 놓여져 있다. 급수탑이다. 천리를 달려 온 화차가 목마름에 물 한모금 마셨던 곳이다. 증기기관차가 수인선을 달렸을 때 사용한 물통이니 족히 5, 60년은 된 물건이다. 비바람에 심하게 녹슨 급수탑이지만 주둥이에서 금방이라도 물을 쏟아낼 것 같은 모습이다.
그 옛날 송도역은 물물교환 장소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역전 공터에는 번잡한 장이 섰다. 소래, 군자 쪽에서 건너 온 촌로와 수인역 쪽에서 온 아낙네가 서로의 물건을 내놓고 흥정을 벌였다. 폐선이 되면서 이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에 송도역전 시장이라는 상설시장이 들어섰다.
시장 안 송도방앗간 이연수 사장이 과거의 이곳 풍경을 그려 줬다. “3, 40년 전 송도역 건너편에 수인선 양쪽에서 온 사람들로 늘 복잡했지. 각종 농산물을 비롯해 닭, 어류 등을 내놓은 좌판이 줄지어 있었어요. 수인선이 폐선되면서 장사꾼들의 발이 묶였고 급격히 위축된 거죠. 그 자리에 상가 건물들이 들어섰고 그 뒷쪽으로 현재 이 시장이 생긴겁니다.” 송도역전시장 조차 이제 그 명맥을 잇기 쉽지 않은 듯하다. 상권이 위축되면서 40여개의 가게만 장사를 하고 있고 몇 년 전에 번영회도 없어졌다. 시장 안 쪽으로 가면 송도초등학교가 있다. 1948년 학익국민학교의 분실로 개교한 학교다. 당시 적지 않은 학생들이 수인선 꼬마열치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기름골이 된 옥골
수인선 옛 철로는 다 뜯겨져 나갔다. 그 기찻길 바로 옆으로 새로운 수인선 철로가 놓이고 있다. 노적산 산줄기가 끝나는 양지바른 곳에 옥골이란 오래된 동네가 있다. 바다 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오그라져 든’ 마을이라 옥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곳곳에 동네의 연륜을 대변해 주는 기와집 두어 채가 있다. 100년이 훨씬 넘은 고택들이다.
길에서 동네 어르신 이창렬(71)씨를 만났다. “우리가 덕수 이씨인데 고조할아버지께서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매립되기 전까지는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요. 그물 치고 갯벌 캐고 하면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늘 풍요로웠죠. 반농반어의 평화로운 부락이었는데 수인선이 지나가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죠. 재개발이 된다고 하는데 이제 옛 모습을 볼 날도 얼마 안남았어요.” 수인선은 옥골을 반으로 가른다. 기찻길에 길을 내주기 위해 동네 곳곳이 파헤쳐져 어지럽다. 재개발이 되면 전체가 엎어질 것이다.
옥골은 이미 아픔을 품고 있다. 기름으로 뒤범벅된 땅이 신음을 하고 있다. 50년대 초 시립사격장 인근 산 기슭에 미군 유류창이 자리 잡았다. 수원비행장 등 수도권 일대 미군에게 기름을 공급키 위해 지름 30m의 대형 유류저장탱크 18기가 심어졌다. 인천항으로 유조선이 들어오면 현재의 SK저유소에서 파이프라인을 통해 이곳 저장탱크에 유류를 저장했다. 이 과정서 파이프 이음새가 자주 터져 땅을 오염시킨 것이다. 추운 겨울에는 바다의 큰 얼음조각이 파도에 밀려 종종 파이프를 터트렸다.
기찻길 옆 사람들은 한동안 석유를 땔감으로 땠다. 기름이 새는 이음새에 깡통을 받쳐 기름을 받았다. 미군 병사들이 정기적으로 기차를 타고 순찰을 돌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이프에서 철철 흘러나온 석유를 모두 깡통으로 받아낼 수는 없었다. 넘쳐난 기름은 땅으로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비가 오면 기름이 물과 함께 고였다. 물에 떠서 두껍게 말라버린 기름층을 회 뜨듯 양철로 벗겨서 그릇에 담았다. 이것은 훌륭한 땔감이었다. 왕겨에 버무려 때면 한줌의 겨로도 몇시간 거뜬히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남는 것은 몰래 내다 팔기도 했다. 기름탱크는 지난 1971년 미군 유류창이 포항으로 이전한 뒤에도 한동안 방치돼 있었다. 유류저장탱크가 산에 박힌 이후 옥골에서는 그 누구도 우물을 파지 않았다.
홍어 삭힌 냄새 폴폴나는 조개고개
철로는 없어졌지만 기찻길은 아직 남아있다. 옥골 동네 앞에는 기다란 둔덕이 엎어져 있다. 이것이 철로가 놓였던 기찻길이다. 협궤열차가 다니던 외길답게 다리를 양쪽으로 뻗으면 닿을 만한 폭이다. 이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조개고개에 다다른다. 사람들이 홍어회골목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조개고개’라는 이름은 그 아랫 편에 조개조합이 있었기 때문이고 ‘홍어회골목’은 홍탁, 홍어회 무침 등 홍어음식점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화학이 바다를 매립하기 전까지 이 동네는 바다를 끼고 있던 동네다. 물끝 따라 나가서 반나절 만에 망태기 하나 가득 조개를 캐오던 곳이다. 갯일을 마치고 고개를 넘던 아낙들이 하나둘씩 흘리고 간 조개들로 길 위가 까맣게 보여 조개고개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조개가 풍부했던 곳이다.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이 골목에 들어서면 홍어 삭힌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도로 양편으로 충남홍어, 흑산도홍어, 할머니홍어 등 빛바랜 간판을 달고 있는 몇몇의 홍어집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이곳에 처음 홍어집이 들어선 것은 대략 40년 전쯤. 인천에 일자리를 얻은 아들을 따라 충남 대천에서 올라온 충남홍어의 김찬례 할머니가 식당을 내면서부터다. 당시 노적산 기슭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다. 훈련을 마친 예비군을 상대로 밥장사를 하던 할머니가 간단하게 홍어무침을 반찬으로 내놓았다. 여기에 매콤한 맛을 진정시켜주는 조갯국을 함께 내놓았다. 단연 인기폭발. 뜻밖에 좋은 반응을 얻자 아예 홍어집으로 업종을 바꿔버렸다. 이후 입에서 입으로 홍어맛 소문이 번져나가면서 주변에 하나둘씩 홍어회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흑산도 홍어집 사장 정이석(61)씨는 인하대 자리에 있던 피란민 수용소에서 태어났고 이후 이곳에서 일생을 보낸 덕에 이곳의 산 증인이다.
“한때 줄서서 먹었어요. 자리가 없으면 그냥 마당에 자리 깔고 먹기도 했죠. 순전히 조갯국을 먹기 위해 홍어회를 먹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냥 앞마당 나가듯 나가서 조개를 잡아오면 됐으니까… ”
조개고개 건너편에 새인천풀장이 있었다. 동양화학에서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잠시 운영했던 노천 풀장이다. 키 작은 아카시아나무 몇 그루 밖에 없던 뙤약볕 아래의 풀장이었지만 아쉬운대로 시민에게 인기 있었던 유원지였다. 이곳의 행락객들도 조개고개에 와서 허기를 달래곤 했다.
실미도대원 탈주 루트
수인선 철길 옆에는 송도역에서 조개고개를 잇는 오래된 길이 하나 있다. 세기자동차, 옥련여고 등이 접해 있는 약 400미터의 좁은 길이다. 이 길에는 비극의 역사 한페이지가 숨어 있다. 실미도대원 탈주 루트였다.
1971년 8월 23일 이른바 실미도 사건이 발생했다. 대원들은 새벽 6시30분 지나가던 6톤급 어선을 탈취해 실미도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육지에 닿은 곳은 옥련동 돌산 인근이었다. 몇몇 대원은 해수욕을 하며 놀기도 했다. 그들은 현재의 송도고 밑으로 돌아 나오다가 옥골고개에서 떡장수 할머니에게 떡 1천700원어치를 사먹고 2천원을 주고 갔다. 그들은 시내로 가던 항도교통 시내버스를 총으로 위협해 탈취해 승차했다. 버스 안에는 승객 6명과 버스기사, 여차장이 타고 있었다. 잠시 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옥련이발소 앞에서 놀던 김은희(당시 5세)가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송도 길을 벗어난 버스는 학익동~용현동~숭의로터리~제물포역~석바위를 거쳤다. 바퀴가 펑크나자 석바위에서 서울행 버스로 갈아타고 그들은 서울로 향했다. 그리곤 그길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