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수탈과 개항항구도시
仁川愛/인천이야기
우리나라의 수탈의 시작은 일제가 운요호사건(1875년)계기로 강화도조약을 체결(1876년)하면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근대적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우리나라는 3군데를 개항하는데, 그 3군데는 인천, 원산, 부산이며 인천은 정치적으로 , 원산은 군사적으로, 부산은 물류수탈로 하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양측량권 인정도 하여 한국침략을 발판으로 삼았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고, 뒤이어 목포, 진남포가 개항된 이후 군산은 성진, 마산과 함께 6번째 개항이었다.
인천 - 외세 각축(개항기), 군사기지(일제강점기)
사실 인천이 국제도시로 이름을 날린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126년 전에 이미‘제물포(Chemulpo)’라는 이름이 세계에 알려졌으며, 개항장 인천은 각국의 문물이 넘치던 국제도시였다.
개항 이후 유럽인과 일본인, 중국인은 인천에 그들만의 생활공간인 ‘조계지’를 확보했다. 측량으로 도로와 가구를 구획하고, 공원을 설치하는 등 서구식 도시계획기법이 적용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으로 이는 인천의 도시공간구조가 되었으며, 해안은 매립으로 그 모습이 변하게 되었다. 매립은 주로 자신들의 영역확대를 끊임없이 획책하던 일본인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 이후 급격히 증가한 일본인의 거주지와 군사용지 확보를 목적으로 해안을 매립했다. 인천에 진출해있던 외국인들은 이렇게 확보된 땅위에 자신들의 건축물을 세웠다. 건축양식은 당시 자국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으며, 자재는 배를 통해 들여왔다. 이로써 응봉산 남측(제물포)에는 여러 나라의 건축물이 들어선 외국인 거리가 형성되었다. 이후 1900년대 초반까지 인천은 국내 최고의 국제도시었다.
다른 개항도시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로 양분되어 발전한 것과 달리 인천에는 일본인거주지 외에 중국인거주지와 여러 나라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각국조계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인의 세력이 커지면서 중국인과 유럽인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들의 빈자리는 속속 일본인이 차지하여 일본인마을은 계속 확대되었으며, 일제강점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화되었다.
부산 - 식민지 수탈 교두보
부산이 근대의 길을 걷는 시점은 1876년 2월 27일 강화 연무당에서 조선측 전권대신 신헌과 일본측 전권대신인 구로다에 의해 12조로 된 한일수호조규 또는 강화도조약이라고도 하는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제 5조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하여야 한다.’를 들어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케였다. 또한 일본은 본격적인 식민지 침탈을 하면서 용두산 일대 일본과의 무역을 담당했던 초량왜관을 연 50엔에 빌려주는 조계지로 담을 헐며 일본 전관거류지로 개방하여 대마도, 큐슈등지에 사는 일본인들을 이주시켰다. 메이지 유신으로 일찍 개화한 일본인들이 용두산 일대 지금의 동광동과 광복동으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어 부산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부산은 최초의 개항지였고 또 일본사람들이 처음으로 활동한 무대로 한반도와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경제적, 정치적으로 의도된 일본의 시나리오는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1905년 조선 정부에 을사 5조약을 강요하여 우리의 외교권마저 박탈하였고 1910년엔 강제 합병하기에 이르렀다. 개항때 부산에 거주했던 일본인은 82명이었던 것이 10년 뒤에는 1900여명, 1910년에는 26,500명으로 늘어나면서 일제 강점기 부산은 일본에 의해 철저히 계획된 변화의 길을 걸었고 다른 도시보다도 많은 일본의 잔재가 남아 있다.
군산 - 호남곡창의 미곡수출항
1899년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미곡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서 급성장했다가 해방 후 그 기능이 쇠퇴했다. 1899년 5월에 개항한 군산 내항은 일제 강점기 당시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쌀 수탈 전진 기지'로 이용된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1910년 당시 군산에는 주민의 절반인 8천여 명이 일본인일 정도로 군산 곳곳은 일본풍 건물이 즐비했다.개항 직후 군산에는 외국인 전용주거지역이 설치됐다. 또 근대적인 항만시설과 철도, 도로 등이 건설되고, 관공서, 상가, 주거시설 등이 건립되면서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군산에 들어온 외국인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군산과 김제, 익산의 넓은 평야지대에서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했고 여기서 수확한 쌀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930년대 중반 군산은 부산 다음가는 미곡 수출항으로 성장하여, 전국에서 수출되는 미곡 수출량의 25%가 이곳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군산은 일제강점기 개항도시(군산, 목포, 마산, 진남포)중 조선인 비율에 비해 일본인 거주비율이 가장 높았던 곳으로 개항기(1899~1905), 도시기반시설 건설기(1906~1925), 도시확장기(1926~1945)로 대표되는 시기별로 도시공간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목포 - 호남곡창의 미곡수출항
목포개항은 1889년 일본인에 의해 거론된 이후 1897년 10월 1일에 개항되었다. 목포가 개항장으로 선정된 이유는 영산강의 강입구와 가까워 내륙소비시장까지 기선으로 직접 운항이 가능했으며, 나주, 광주 등 큰 배후시장이 있어 화물의 집분산이 용이하며, 전라도 지방에서 생산된 쌀을 운반하는데 편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목포에 거주하려는 외국인은 일본인이 대부분이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나라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각국조계지가 설정되었다. 조계지의 위치 선정과정부터 관여한 일본은 해안과 인접한 유달산 자락에 터를 잡았고 이곳에 구획된 시가지는 인천조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도시 목포는 각국공동거류지구역과 목포군 부내면 구역으로 구분된다. 목포개항으로 일본영사관일대에는 외국인거류지가 조성되었다. 이곳은 근대식 도시계획이 적용되어 격자형가로망과 각종 위생시설을 갖춘 공간이었다. 그러나 개항장 목포를 찾아 고향을 등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땅히 거주할 땅이 없어 무덤을 옮기고 그 자리에 터를 잡아야만 했다. 가로는 무질서했으며, 위생설비는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전형적인 불량주거지였다.
근대도시 목포는 이처럼 상이한 두 공간인 일본인거류지 1㎢와 조선인 거주지 1.33㎢에서 출발했다. 개항초기 목포에는 일본영사관 앞을 중심으로 해안을 향하여 상가, 주택, 공장, 창고가 세워졌다. 이후 해안매립이 진행됨에 따라 무안가도를 향해 동쪽으로 도시가 확장되어 갔다. 근대도시 목포의 전성시대는 1930년대였으며, 조선시가지 계획령(1936년 6월 발포)에 따라 1936년에는 1965년을 목표연도로 하는 도시계획이 수립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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