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윤식의 다방이야기 - 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2.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의 다방 - 절정기에서 변화의 시기로

by 형과니 2023. 6. 24.

22.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의 다방 - 절정기에서 변화의 시기로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4-08 22:02:55

 

인스턴트 커피의 도전 변해야 살아남는다

22.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의 다방 - 절정기에서 변화의 시기로

 

 

1976년 생산된 동서식품의 커피믹스 초기모델.

 

 

다방 문화의 난숙기(爛熟期)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는 또 한편 다방 문화의 쇠퇴를 예견하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로마 문명이 최고의 번영과 사치를 누리던 정점에서 쇠락의 길을 걸었듯이, 우리나라 다방 문화 역시도 최고조 극성(極盛)의 지점에서 종래와 다른 이종(異種)의 출현을 불렀고 동시에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하면서 서서히 쇠퇴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우선 DJ가 인기를 독차지하던 음악다방이 생겨난 것도 반세기 이상 유지되어 오던 전통 다방 형태에 대한 이종이자 하나의 도전 실례였을 것이다.

 

또 다방의 범람은 피차 대형화, 디럭스화 경쟁을 유발하면서 서울 같은 경우 일부 법인(法人) 형태의 대자본 다방이 등장하기도 했다.

 

 

1961'커피메이트'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식물성 커피 크리머. 우리나라에서는 동서식품이 1974년 프리마라는 브랜드로 자체 개발·생산을 시작했다.

 

더불어 1975년 중반에 발생한 '오일쇼크'는 수입 커피 값을 인상시키고, 이에 따라 국산차 마시기 운동이 일어나면서 일시 다방 출입 자제와 소비 심리의 위축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방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것이 국산 제조 커피의 성장세였다.

 

19685월에 설립된 동서식품주식회사는 19706월 미국 제너럴 푸드 사와 커피 제조 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인천시 계양구 효성동 대지 4700여 평에 공장을 세워 9월부터 국내 제조로는 최초인 맥스웰 하우스 레귤러 그라인드 커피를 생산하면서 인스턴트커피 시대를 연 것이다.

 

직수입 외래품이 아닌 국산 커피라는 점 때문에 다방들은 세간의 눈총을 덜 받는 이점과 함께 커피 원료의 안정적인 공급도 기대할 수 있었다.

 

 

1976513일 신문에 보도된 다방의 고급담배 매점 실태.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다방이 아닌 곳, 즉 집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게 한, 다방으로서는 적대적인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시절 다방의 주요한 변화는 커피에 프리마를 넣게 된 사실이다.

 

고유명사화 되다시피 한 프리마의 국내 생산, 보급으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양촌리 커피'라고 장난삼아 부르는, 이른바 설탕과 '프림'을 넣은 '다방식' 커피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다방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으레 레지가 연유(煉乳)가 담긴 작은 주전자 형태의 사기 또는 스테인리스 용기를 가지고 와 첨가 여부를 묻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손님에게만 몇 방울을 떨어뜨려 주곤 했었다.

 

프리마는 197412, 역시 동서식품에서 시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197612월에 들어서는 세계 최초로 커피믹스를 개발해 시중에 선보였다.

 

잇따라 커피 관련 제품들이 진화, 출시되면서 굳이 다방에 가지 않고도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끓는 물만 있으면 간단히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는 결국 다방들의 경영을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이 되었으며, 다방들이 살아남기 위한 더 치열한 생존 전략을 강요했다.

 

1979년인가 동서식품에서 일본에서 강사 가라사와 기츠모라는 사람을 초청해 제1회 다방 경영세미나를 개최한 것은 이 같은 환경에 처한 다방 업자들을 위해서였고, 이보다 앞선 197088, 동서커피판매주식회사(가칭)의 설립 발기 당시 다방 업주들에 대해 참여를 독려했던 것도 역시 그런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실제 다방 업자 측에서 보면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생존을 위한 새로운 돌파구의 모색으로 탄생한 대표적인 것이 젊은 층을 겨냥해 인기 DJ를 둔 전문 음악다방이었다.

 

물론 오디오 산업의 급격한 발전 때문에 음악다방들도 1980년대를 넘어서면서 다시 시들해지기는 했지만, 이 무렵에는 일단은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후일 '오디오의 빠른 보급은 음악을 들으러 다방에 간다는 핑계마저 앗아갔고, 시끄럽고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취향에 맞지 않는 음악을 억지로 들으며 차를 마시기보다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안락하게 쉬기를 바라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음악다방으로 변화 추세는 인천에도 불어 닥쳐 몇 군데 새로 생겨나거나 기존 다방의 변신이 이루어졌다.

 

 

1979년 보급된 삼성의 커피자판기.

 

 

서울이나 부산 등 다른 대도시와는 인구 차이가 있는 데다, 인천은 음악다방의 주 고객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층, 곧 대학생들 상당수가 서울 통학생이어서 그 숫자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기존의 '짐다방''별다방' 외에 동인천역 쪽의 '흑백다방' '혜성다방' 그리고 재빨리 음악다방으로 변신한 '명다방' 등이 있었다.

 

용동마루턱 아치가 있던 부근의 '석화다방'도 제법 음악다방으로서 젊은 층의 인기를 사로잡았다.

 

오늘날 신포 패션거리로 불리는 내동 의류상가 초입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잡은 '다희다방' 그리고 갤러리를 겸했던 가톨릭회관 지하 '성지다방'이 역시 음악다방을 표방하면서 젊은 고객들을 끌어 들였다.

 

당시 신흥 상권지역으로 발전하던 주안역 일대에는 '촛불다방'이 유명했고 제물포역전의 '동일다방'DJ의 활약과 함께 음악다방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때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 전문 다방 외에도 장발 청소년과 히피족들이 출입하는 퇴폐성 다방이 출현하면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당국의 지시로 모든 다방이 출입문 앞에 미성년자, 장발자 출입금지라고 써 붙였던 팻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면서도 일부 다방들은 종종 대마초 종류인 해피스모크 같은 금지 품목 암거래 등 퇴폐 행위의 온상이 되어 단속의 된서리를 맡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는 1960년대보다 마담과 레지의 상술이 더욱 극성을 떨었다.

 

마담과 레지의 존재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방을 완전히 양분화 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 동시에 티켓 다방을 탄생시키는 퇴폐의 전주(前奏)가 되었다.

 

그러니까 마담과 레지가 있는 다방은 '노털다방'이니 '꼰대다방'이니 하는 별칭처럼 노장년층이 주로 드나들었고, 젊은 층은 DJ가 있는 음악다방을 본거지로 삼아 출입하는 식이었다.

 

이 노장층 다방에 대해서는 '나이 든 손님들과 마담, 레지들이 벌이는 행동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는 신문 독자의 투고가 실릴 정도였다.

 

오디오 시스템 외에 다방에 TV가 설치된 것도 1970년대 중반부터가 아닌가 싶다.

 

특히 쇼 프로그램이나 스포츠 중계를 보려는 고객들 때문에도 다방들은 필수적으로 대형 TV를 벽에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노장년층 다방에는 시간에 맞춰 뉴스와 연속극 같은 것을 시청하는 고정 손님도 있었다.

 

다방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엉뚱한 피해자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애연가들이 피우고 싶은 담배조차 마음대로 사 피울 수가 없었던 일이다.

 

1970년대 초반 고급 담배였던 '청자'는 거리 담배 가게에서는 살 수가 없을 정도로 귀했다.

 

그 이유는 다방이나 음식점 등이 몽땅 매점(買占)해다가 단골 고객이나 자기 업소 손님에게만 서비스 차원에서 독점 판매했기 때문이었다.

 

1974년에 나온 '거북선''' 담배도 역시 그런 상황이어서 "담배를 사러 다방에 간다."거나 커피 한 잔 130원과 담배 300원을 합쳐 "담배 한 갑에 430"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초년 직장 생활을 서울에서 할 때 서울역 건너 '역마차다방'에서 회사 동료들과 이런 식으로 거북선 담배를 샀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무렵이라면 또 그때 상당수 다방들이 자행하던 기막힌 악덕(惡德)을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콩피, 꽁피 사건'이었다.

 

거기에 미성년자들에게 다방을 빌려 주어 '고고 파티 장소'로 쓰게 하거나, 대낮에 고교생들의 쌍쌍 파티를 위해 다방을 임대해 주는 행위 등이었다.

 

대법원 형사부는 11일 커피에 담배를 섞어 판 혐의로 기소된 유리다방 주방장 김창식(金昌植) 피고인(27)에 대한 상고를 기각 원심대로 징역 1년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또 같은 다방 주인 신도식(申道植) 피고인(36)에게도 벌금 3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들 두 피고인은 지난해 41일부터 57일까지 커피 색깔을 짙게 하기 위해 담배꽁초를 끓여 커피에 섞어 판 혐의로 기소되었다.

 

197759일자 경향신문의 보도 내용이다.

 

서울 서소문에 있는 '유리다방' 주방장과 주인에 대한 최종 판결인데, 이처럼 엄중한 벌을 받았다.

 

계속된 기사에는 범인 신도식이 '커피 30잔을 내는 한 주전자를 끓일 때 알 커피를 정량보다 적게 넣고 그 대신 3분의 1개비 분량의 담배가루를 섞어 끓여 색깔을 진하게 하거나 소금과 계란 껍데기를 넣어 커피 맛이 나게 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무려 700잔 이상을 팔았다니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더 해롭다는 니코틴 커피를 한 달이 넘게 수백 명의 손님들이 매일 돈 주고 사 마셨던 것이다.

 

이제 겨우 산업화의 첫 걸음을 떼던 우리 사회가 어느새 이토록 금전만능의 사고방식으로 변해갔는지 놀랄 따름이다.

 

이 무렵 특히 빈번했던 것이 다방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이던 사건이었다.

 

대부분 변심한 애인에 대한 좌절과 복수심, 사회에 대한 울분이 그 이유였다.

 

이 역시 우리 전통 도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던 당시 세태의 단면이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다방의 변화를 강요하던 것이 커피 자판기의 등장이었다.

 

1977, 롯데산업이 국내 최초로 일본 SHARP사로부터 커피 자판기 400대를 도입해 설치했고 이에 맞추어 19781월에 들어 동서식품이 자동판매기용 커피를 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길을 가다가도 동전 몇 닢만으로 얼마든지 쉽게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1968년 데뷔하면서 독특한 창법으로 크게 히트한 펄 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 레코드판은 이 무렵에도 다방 전축 위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그래서 시내 다방들은 여전히 호황을 누리는 듯이 보였지만, 이처럼 점점 더 강력한 도전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시기 인천의 다방들만은 유독 정직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방이 몰려 있던 시내 중심가 바닥이 너무 좁아서였는지, 그도 아니면 워낙 드나드는 고객 부류가 공무원이나 신문기자들이 주를 이루었던 때문이었는지, 서울과는 달리 그리 큰 사건이나 말썽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다방, 음식업소들 때문에 고급 담배 품귀 소동 따위의 일은 있었지만 악덕 '콩피, 꽁피 사건'은 없었던 듯하고,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서처럼 인질 사건이나, 고등학생 등의 미성년자들을 입장시킨다든지 혹은 그들에게 다방을 파티 장소로 대여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웬만한 시골 면 단위 지역, 소도시, 읍에 도시에 뒤지지 않는 스타일의 다방들이 예외 없이 문을 열면서 농촌 사회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오고 그에 따라 각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다방에 칸막이를 해서 맥주 같은 주류를 판다거나 "커피 50잔에 티켓 한 장 뗀다."는 등의 퇴폐 행위가 버젓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는 이처럼 다방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불리한 환경의 변화에 일방 정면으로 대처하면서, 또 한편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런 것을 두고 흔히 우리가 역사를 지적해 말할 때 '전성기에서 감지되기 시작하는 말기 징조'라고 할 수 있을까. /김윤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