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과 인천사람 / 고일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22-06-04 01:44:52
1962년 - 前 조흥은행 인천지점 (경동)
인천과 인천사람 / 고일
나도 인천 사람 당신도 인천사람이니 대관절 인천이란 곳과 인천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인천지지(地誌)와 역사는 필자의 소관 이외의 것이니 인천편람」이나 『인천부사』 외의 향토지에 맡기고, 인천사람도 순수한 토착민은 현재 점점 감소하고 있으니 이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곤란한 노릇이다. 나는 내가 인천에서 살고 있는 동안 듣고, 보고, 느낀 것 이외에는 체계를 세워서 쓸 수 없는 것을 고백할 뿐이다.
인천은 누구나 다 아는 극동반도 서해안에 조그맣고 빈한한 어촌 제물포시대부터 개항 후의 인천이 극동의 정세에 움직여서 한 때 훌륭하게 발전된 항도였다. 이조쇠망의 길을 재촉하던 시절, 곧 대원군의 쇄국정책 시절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있어서도 인천은 큰 변화가 없었다. 인천이 근세사에 있어서 등장한 것은 일본의 명치유신 이후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은 뒤로 부산 원산과 함께 개항된 그 후부터이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 개화당의 김옥균 씨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헤이그 밀사 이준 씨도 인천항으로 밀항했었다.
일본이 청국의 세력을 물리치고 다시 광무 9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등박문(伊藤博文)과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강제로 한일협상조약을 맺어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만들었고 1910년 순종 4년에 드디어 이 나라는 일본에게 예속되었으니 강화도조약 후 24년 간은 인천의 예명기로 수난을 많이 겪었다. 일본과 러시아의 해전이 인천바다에서 전개되었고 뭇 애국지사가 눈물을 흘리고 인천항에서 망명했던 것이다.
인천발전의 태동은 일본의 세력 강화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일인거류민단과 청국의 화교가 인천경제를 좌우하였고 일본세력에 부수하던 한인이 인천 시민의 경제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일본말 잘 하는 영남사람이 약삭빠르게 진출해서 유명했던 근업소를 창설했었고 다음은 지리적으로 접근한 강화와 수원, 그리고 충남의 서산, 태안이며 이조 때에 혜택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약진분투한 개성 사람들이다.
서울 태생과 인천 원주민의 경제적 발전은 그다지 괄목되지 못했었다. 인연(人煙)이 희박했던 제물포는 점점 인구가 늘어서 인천은 무역항 상도공업지로 비약하였다. 살기 좋은 '제밀' 이란 것은 러일전쟁 후의 노동도시로 집결했었고 대일 수출의 조종인 쌀공장의 진출에 따라 봉건 이조 말에 토색당하고, 통감부 시절 이후에 토지 빼앗긴 세농과 소작인들이 소위 산업예비군으로 정미직공이 되거나 칠통마당 목도꾼이 되어 구름같이 모이게 된 그때부터였다. 그리해서 막거리집, 선술집 등의 노동자의 식당이 날로 발전했었고 지게꾼, 인력거꾼이 신상들과 술잔을 드는 데 조금도 겁내지 않았었다.
한쪽으로 미두장이 생겨 서울과 호남부자들의 주머니를 털어놓았었고 해산물 가공품의 대중무역은 중국인의 다방면 입주와 진출을 촉진시켰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통하여 해변매축과 도로확장 그리고 대규모의 공장유치, 인천부에 부천군 다섯 면(다주면, 문학면, 남동면, 부내면, 서곶면)의 편입, 부평의 군수공장설치, 축항의 확장 등은 해방전의 인천항을 극도로 진흥시켰던 것이다.
갈대밭 우거진 초라하던 어촌이 일약 공업도시이며 항구도시이며 산업도시로서의 일대비약을 보게 된 것이다. 각 처에서 모인 사람과 일인, 중국인과 외인이 섞인 국제항구 인천이지만은 식민지란 것으로 배일정신이 배양되었고 외국자본에 항거하는 정치적인 노동 투쟁이 인천의 인물을 배출도 시켰다.
그러나 해방 후 일본인은 다 물러갔다. 그리고 새로운 지방인이 들어와 적산의 주인공도 되었는데 6·25와 1·4 이후 폐허화된 인천은 인천의 특징을 아주 말살한 느낌을 주고 있다. 대한의 국제항도이며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인 서울의 관문 대인천은 시방 진통 중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석금』, 경기문화사,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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