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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연구,자료

그리피스 컬렉션에 포함된 한국 근대 도시·건축 사진자료에 관한 연구

by 형과니 2024. 12. 3.

도시사진자료의 유형별 분석 中 인천 편 / 박소연

 

 

인천은 1875년(고종 12년)의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인천의 문호가 개방되고 뒤이어 일어난 제물포 조약의 결과 1883년(고종 20년)1월에는 인천항이 개항되었다.개항이후 이 지역은 근대 여명기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의 현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당시 인천항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은 총 6개이며 이 사진은 모두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사진3-24>는 인천항의 모습으로 월미도 정상 부근에서 찍혀진 것으로 짐작된다.개항이후,이 지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의 관문으로서의 위치적 특성과,대형 항구의 입지가 가능하다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하여 1883년 일본과의 전관조계 설정을 시작으로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1884년 4월에 청국과의 전관조계가 설정되고,10월에 각국공동조계가 설정되면서 이 지역은 근대여명기의시작을 알리는 현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조계 설정에 따라 외국인의 이주가 작되면서 서구문물이 급격하게 유입되었고,각 조계지 별로 각국의 특색 있는 다양한 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어 한옥들로 구성된 조선인 거류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었다.(40)

 



<사진3-25>는 인천항의 서양건축물을 보여주는 사진으로,지금의 자유공원이자리 잡은 응봉산 기슭에는 서양식 건물이 세워져있는데 이곳은 세창양행 사택이다.세창양행 사택은 1884년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독일의 무역회사인 세창양행(世昌洋行.마이어상사)이 사용했던 건물이다.

 

사진중앙에 일본 깃발이 꽂힌 일본영사관이 있다.일본은 개항이 되자마자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의 영사관을 준공하고,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영사관을 이사청으로 개편해 청사로 사용했다. 1910년 이후에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는데,오늘날 인천 중구청 자리이다.

 

인천항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구미 각국의 외교사절,선교사,여행객들이 방문했고,자연스레 숙박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따라서 근대적 숙박시설인 호텔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곳이 사진에 표시 된 대불호텔이다.이곳은 1888년에 세워졌으므로,1902년 서울의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건물이다.

 

사진의 오른쪽 해안가에 깃발이 보이는 건물이 세창양행 사옥이다.이후에도 인천에는 각 나라의 영사관과 중요한 시설들이 많이 들어섬에 따라 당시 제물포가국가 외교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 (40)정형철,「인천개항장 근대건축물 보존 및 활용에 관한 연구」,가천대 석사학위논문,2011,p.44- 33

 

 

 

<사진3-26>은  인천항 파노라마 사진으로 좌측으로 보이는 섬은 월미도와 소월미도의 모습이며,우측에는 개항의 중심이 되었던 인천 개항장의 모습이 보인다.사진 속에 나타난 모습은 근대화가 진행되어 서양건축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것을 볼 수있다.이 외에도 인천항과 관련된 사진으로 채색된 인천항 전경 사진과,제물포 일본군 묘지로 추정되는 사진,인천의 갯벌 사진 등이 있다.이 사진은 와 같으며,당시 인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진을 선별하여 나타냈다

 

 

출처 : 그리피스 컬렉션에 포함된 한국 근대 도시·건축 사진자료에 관한 연구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박 소 연의 석사논문  20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