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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인천 외국인 묘지

by 형과니 2025. 6. 29.

인천 외국인 묘지

 

 

낯선 땅에 잠들다

 

근대 인천이라는 낯선 곳에 잠든 외국인들의 마음을 1300년 전의 혜초 스님이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시인 <여수旅愁>로 달래본다.

 

月夜瞻鄉路 월야첨향로

浮雲颯颯歸 부운삽삽귀

緘書參去編 함서참거편

風急不聽迴 풍급불청회

我國天岸北 아국천안북

他邦地角西 타향지각서

日南無有雁 일남무유안

誰為向林飛 수위향림비

 

달 밝은 밤에 고향 길 바라보노라면

너울너울 뜬 구름만 고향 길 가네

그 구름편에 편지 봉해 부치려하니

빠른 바람에 구름을 잡을 길 없네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이구요

내가 있는 남의 땅은 서남쪽이라오

햇볕 따뜻한 이곳엔 기러기도 오지 않으니

그 누가 내 소식을 계림(신라)으로 전해주리

 

근대 외국인 묘지의 역사는 인천의 개항(1883)과 함께 시작한다. 제물포 인근에 조성되기 시작하는 외국인 묘지는 초기에 일본인 묘지, 중국인 묘지가 별도로 조성되고 그 밖의 나라들이 한 곳에 모여서 외국인 묘지로 탄생된다.

 

근대 인천의 외국인 묘지는 망자亡子를 추모追慕하는 공간으로 마련됨과 동시에 거듭된 이전(移轉)을 통해서 조계지 확장의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또 현대에는 일제강점기 잔재의 청산과 도시 계획으로 도심에서 사라져 가는 시대적인 산물로 남게 되었다.

 

개항 이후 근대 인천에는 일본과 중국을 필두로 각국 조계(租界)가 설치된다. 나라마다 사는 구역을 나눔으로써 제물포는 더욱 치열한 각축장으로 변해간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각각 나라들은 규칙을 마련하기 시작하며, 일본은 <조일수호조규부록(1876)), 중국은 <인천구화상지계장정(1884)), 그 밖의 나라는 <조영수호통상조약(1883))을 토대로 묘지를 조성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격변의 세월 속에서 인천에 묻힌 외국인들은 인천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편안히 잠들어 있다. 초기의 묘지는 각각 다른 곳에 안식처를 마련하였지만 현재는 인천가족공원 자리에 나란히 하고 있다. 근대 인천의 외국인 묘지의 탄생과 이전을 통해서 근대 변모하는 인천의 모습을 뒤돌아보고 타향에 묻힌 외국인들을 애도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