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시의 태동(1883∼1945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1 08:50:14
"인천, 120년의 기록" (1) 도시의 태동(1883∼1945년)
격세지감(隔世之感). 인천은 지난 100여년의 세월동안 엄청난 진보·변화를 겪어 이제는 딴 세상처럼 여겨진다. 한적한 어촌에서 이제는 동북아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용틀임이 한창이다. 그동안 인천개항과 한국전쟁 복구, 대단위 매립, 도시정비사업 등으로 시대별 변화의 모습이 뚜렷하다.
인천시는 인천발전연구원 도움으로 지난 1883년 제물포항 개항 이후부터 지금까지 120여년 동안 도시계획 변천사를 책으로 엮었다. 꼭 2년여어 걸친 고단한 작업이었다. 여기에는 옛날 희귀사진·그림에서 부터 도시계획 연혁·고시목록 등이 총 망라돼 있다.
시는 소중한 과거를 바탕으로 희망찬 미래를 펼쳐 보겠다는 계획이다. 인천일보는 새해를 맞아 인천의 시가지가 한 세기를 넘기는 동안 어떻게 달라졌나 시대별로 나눠 6회에 걸쳐 시리즈로 게재한다.
(1)도시의 태동(1883∼1945년)
인천의 근대 역사는 지난 1883년 제물포항 개항으로 부터 출발한다.
조·일수호조규에 의해 부산(1876년), 원산(1880년)에 이은 세번째 개항이다.
제물포항은 1882년 5월 화도진에서 서양과 처음으로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했고,
영국·독일·청나라 등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레 서양의 선진문물을 국내에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했고,
가장 먼저 근대도시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의 중구청 부근인 개항장 일대(15만5천평)에는 일본인 전용주거지가 맨 먼저 생겼고,
청국과 각국 공동거주지가 잇따라 설치됐다. 이 곳은 국내 최초의 서구식 도시계획지역으로 기록돼 있다.
조계약서(1884년)에 따르면 토지임대 계약 후 착공기간과 위치에 따라 토지등급을 정하고,
건축재료와 최소한의 건축비용이 명시돼 있다.
각국 조계지도(1888년)에는 가로 경계와 가구 및 획지가 구획·면적별로 나뉘어져 있다.
나라별 영사관, 세관, 감리서 등 공공청사와 도로, 공원(현 자유공원), 외국인 공동묘지, 잔교 등 도시시설도
확인 할 수 있다. 이같은 조계계획은 인천세관소속 측량기사 사바틴(A.I.Scredin Sabatin·독일)에 의해 이뤄졌다.
개항 초기 도시는 각종 서구식 도시시설이 들어서면서 형성됐다.
항만시설로는 편리한 국제여객 업무와 수출입 물량 증가에 따라 부두시설을 구축하고,
무역관세 징수를 위해 세관을 신설(1883년) 했고, 부두안에는 검역소도 뒀다.
인천·서울간 철도부설(1899년),
기상관측소(1899년),
영화초등학교(1892년),
영미담배회사(1899년),
대불호텔(1889년),
제일은행(1902년),
팔미도등대(1903년),
상수도시설(1906년),
전기회사(1906년) 등은
국내에서 최초로 설치된 근대식 도시시설 이었다.
1914년에는 각국 조계제도가 폐지되고, 일본에 의해 새로운 정부제가 시행됐다.
이때 인천 면적은 약 6.056㎢였고, 인구는 3만명선 이었다.
이후 인천의 도시계획은 일본 주도로 이뤄진다.
노·일전쟁(1904년) 이후 인천항 교역량이 증가하면서, 선박 입출항과 하역이 쉽도록
총독부는 1911년 갑문식 선거(제1도크)를 건설했다.
4천500톤급 선박 3척이 동시에 접안 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항만시설이다.
1936년에는 행정구역이 27.123㎢로 확장되고 인구도 10만명으로 늘었다.
총독부의 ‘조선시가지계획령(1934년)’에 의해 인천시가지계획이 수립됐다.
이 계획은 1965년을 목표연도로 인구 20만명 수용과 27.588㎢의 구역면적에 주거·녹지지역과 풍치지구, 공원,
도로 및 광장을 조성토록 짜여 있다. 개발방법으로 이때 벌써 토지구획정리제도를 도입했다.
이 시가지계획은 광복 이후 1962년까지 그대로 적용 됐다. 지금까지 인천시가지 기본틀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백종환기자 k2@ 2005-01-02 오후 6:30:51
12.정용인: 인천도시기본계획, 84년 처음 수립
1883년은 인천으로서는 기념비적인 해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바로 인천항이 개항한 해이기 때문이다.
이어 인천항 일본 조계 설정(2월)과 인천해관 창설(6월), 감리서 설치(9월),
인천일본조계거류지조약 조인(9월) 등이 있었다.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 서양의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 이때 마련됐다.
개항장 조계지 15만5천평은 인천 최초로 도시계획이 이뤄진 지역이다.
또한 국내에서도 서구식 도시계획의 효시로 기록돼 있다.
현 중구 일대의 이 지역은 지금도 당시 모습 상당수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지금의 인천 시가지는 개항초기 항구를 중심으로 형성됐으나,
1940년경 군수공장 및 부평역으로 형성된 부평지구가 통합되면서 면적이 크게 확장됐다.
그러나 남-북을 가로지르는 철마산 관통도로가 개통(1970년)되기 전 까지
옛 시가지와 부평지구는 쉽게 통합되지 못했던게 사실이다.
인천의 인구는 개항 후 25년이 지난 1908년 당시 한국인 1만5천711명,
일본인 1만1천283명, 중국인 2천41명, 그밖의 영국·미국·독일·프랑스·러시아인 등이 60여명이었다.
그야말로 한국인과 외국인이 공존하는 도시였던 셈이다.
개항 후 50년이 지난 1932년에는 한국인 5만5천377명, 일본인 1만1천276명,
중국인 1천502명 등 총 6만8천189명으로 집계됐다.
해방 이후 1949년 처음 실시된 제1회 인구조사에서
인천인구는 지금의 10%선인 26만2천468명이었다.
인천의 도시기본계획은 지난 1984년 8월에 처음 수립됐다.
이때 송도신도시 해면과 서북부매립(현 청라지구)이 처음 반영됐다.
1985년 광역시로 재편된 후 강화·옹진·검단이 편입되고 인천공항과 경인운하 등
대규모 사업이 이뤄지면서 지금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도시기본계획이 변경·재수립됐다.
/백종환기자 k2@incheo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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