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사태'의미 다시알자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3 09:09:52
'5·3사태'의미 다시알자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5·3 인천사태'의 주역들이 3일 한자리에 모인다.
대통령 직선제 획득의 씨앗이란 긍정적 측면과 미완의 항쟁이란 부정적 평가가 교차하는 5·3 인천사태를 넘어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다.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가 이날 오후 3시부터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개최하는 토론회에는 당시 항쟁을 이끌었던 인사연 집행국장 이우재씨를 비롯해 민주노동당 노회찬, 심상정 의원과 열린우리당 이인영 의원 등이 참여한다.
또 오후 7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야외공연장에선 인천지역 민족민주열사와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추모제도 열린다.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정동근 조직위원장은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전초전이었지만 5·3의 의미는 아직까지도 명확히 정립되지 못했다”며 “인천이 자랑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인데도 대다수 시민들은 모르고 있는 것 또한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밝혔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인 지난 1986년 5월3일 인천 남구 주안동 인천시민회관 앞 광장과 도로가 '독재정권타도', '노동권쟁취' 등을 외치는 3만여명의 시민과 대학생, 노동자들로 뒤덮였다. 운동권 단체 명의로 제작된 40여 가지 유인물들이 거리를 수놓은 가운데 군중들은 경찰과 8시간 동안 대치하며 역사의 한페이지에 5월3일을 추가시켰다.
5·3 당시 정국은 수도권이자 대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인천을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 노동운동권과 대학생 등도 인천을 결전의 장소로 삼으며 마침내 5·3 인천사태가 벌어졌다. 각 단체들의 노선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외친 건 '민주화'라는 대의였다. 이 사건으로 경찰 추산 191명의 경찰관들이 다쳤고, 민주정의당 인천 제1지구당사와 경찰차량 3대가 불타는 등 모두 1억6천여만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검찰은 시위주동자들에게 소요죄를 적용해 129명을 구속했고, 이 과정에서 폭행과 고문, 성적 가혹행위 등이 자행됐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제기됐다.
하지만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는 지난 2001년 5·3 인천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다. 발발 15년 만에 군사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이자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를 얻게 된 것이다. / 김창훈·chkim@kyeongin.com
절반의 성공 '5·3 사태'
'5·3 인천사태'가 민주화를 위해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이자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낸 1987년 6월 항쟁의 중간 단계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또 '미선이 효순이 추모 촛불집회'와 최근 '이라크전 반대운동' 등 새로운 한미관계를 요구하는 민중운동의 뿌리가 됐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항쟁을 주도했던 당사자들은 여전히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자중지란=1986년 5월 3일 수도권의 모든 운동권 세력은 인천에 총집결해 있었다. 크게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의장·이호웅, 이하 '인사연')이 중심이 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장·문익환, 이하 '민통련') 산하 단체들과 서울노동운동연합(의장·김문수, 아하'서노련') 그룹, 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이하 민민학련)을 위시한 서울 대학생들, 그리고 신민당원들이다. 이들은 민주화를 위해 공동 전선을 형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서로 동지라는 상호유대감마저 없었다. 민통련은 오로지 시민회관 앞에서 원래 계획했던 '민주화촉진 인천시민대회'만 고집했고, 서노련과 민민투는 보도블록과 화염병으로 무장한 채 인근에서 경찰과 격렬히 대치했다. 각 단체들의 구호도 통일되지 않은 채 각각이라 대중은 수수방관하거나 이리저리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운동권 내에서 극심했던 헤게모니 쟁탈전이 인천에서 벌어졌던으로 볼 수 있다.
◇과격해야 옳다=당시의 구호들을 살펴보면 '가자! 해방구 인천으로', '철천지원수 미제와 그 앞잡이 깡패적 반동정권의 심장부에 해방의 칼을 꽂자' 등 편협하거나 과격한 표현 일색이다. 전국민적인 호응없이 인천만을 해방구로 삼았다는 점은 운동권 스스로 자신들의 한계를 설정해버린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또 과격하고 섬뜩한 구호는 오히려 대중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 뿐이었다는 평가다.
경찰의 몽둥이와 최루탄에 맞서기 위해 꼭 필요하다면 던질 수도 있었겠지만 돌과 화염병만을 앞세운 운동이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는 1987년 6월 항쟁의 중간층을 형성했던 일반시민, 소위 넥타이부대의 전폭적인 지원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6월 항쟁은 넥타이부대의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성공한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김창훈·chkim@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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