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 인물

향토언론 개척자 이종윤 선생

by 형과니 2023. 4. 4.

향토언론 개척자 이종윤 선생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6 19:07:10

 

향토언론 개척자 이종윤 선생

외풍에 꺾이지 않은 '참언론인'

 

향토언론 개척자 이종윤 선생

 

향토 언론인 김응태(1921~1995) 선생은 타계하기 2년전 지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운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마디로 말해 전형적인 선비풍에 꼿꼿한 분이었습니다. 언론사의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어깨에 힘을 준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구요. 사리사욕이나 타협 따위의 단어들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인물이었어요.”

 

혈기왕성한 젊은 기자들도 평소 집안의 큰 어른처럼 모시던 운영 앞에 서면 어떤 호칭을 붙여야 할 지 망설일 정도로 몸둘 바를 몰라했다고 한다.

 

1899년 인천 화평동에서 고성(固成) 이씨 27대손으로 태어난 운영은 10살 무렵 박문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면서 평생지기인 장면 박사와 인연을 맺는다.

 

세관장인 부친을 따라 인천에 와 있던 장면 박사와의 만남은 한학과 유교적 관습에만 젖어있던 운영에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하는 계기가 됐고, 아울러 가치관 확립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장면 박사와의 교분은 세상을 뜨기 전까지 60년 가까이 이어진다.

 

6·25 전쟁 중 부산 임시정부시절 총리였던 장면 박사가 공보장관직을 제의하고, 4·19 직후에는 '반민주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생을 위촉했던 것도 선생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보장관 직은 완곡히 거절했지만 선생은 반민주특위에는 참가해 5·16 군사쿠데타로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주로 김포·강화 지역에서 활동을 했다.

 

선생이 언론계에 뛰어든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 동경고등공예학교 인쇄과로 진학하면서다.

 

졸업후 오사카 대판매일신문사(大阪每日新聞社)에서 4년간 신문제작 실무를 익혀 귀국한 뒤 1927년부터 인현동에 '선영사(鮮英舍)'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쇄업에 뛰어들었다.

 

선영사는 1944년 일본의 통제경제정책에 따라 인쇄시설을 징발당하면서 간판을 내린다.

 

1945107일 대중일보가 창간되면서 공무국장(제작국장)으로 신문제작에 뛰어든 운영은 이듬해 5월 부평 병기창에 있던 인쇄기를 미군정청으로부터 불하받아 대중일보 인쇄인으로 취임했다.

 

6·25 전쟁으로 대중일보가 해산되고 인천신보로 재편되면서 부사장겸 편집인으로 취임한 운영은 1960년 인천신보가 경기매일신문으로 개칭되면서 부사장겸 7대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편집과 경영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밖에서나 집안에서나 말수가 적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선생이지만 큰 며느리인 강분희(75)씨의 기억을 더듬으면 그 누구보다 다정다감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이들도 그렇지만 남편(이벽)이나 시아버지나 성품이 비슷하셨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도 없고 무뚝뚝한 남편이었지만 제 생일날만 돌아오면 잊지 않고 선물을 꼭 챙겨주었죠. 결혼해서 3년밖에 모시지 못했지만 시아버지도 남편과 비슷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선생은 자신보다 먼저 뇌졸중을 앓던 아내(민천순)가 세상을 뜬 지 17일만인 1967114일 아내의 뒤를 따랐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감이 넘쳐흘렀던 선생의 기개는 2대를 넘어 3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선생과 비슷한 시기인 1947년 대중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뛰어든 장남 묵천(默泉) 이벽(李闢;1926~2000)은 서슬퍼렇던 박정희 정권 시절 '편집권 독립'을 위해 언론의 정도(正道)를 걸었다.

 

일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이벽 언론상' 제정 움직임까지 일 정도로 이벽 선생은 부친인 운영 못지않게 향토언론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생의 손자이자 이벽 선생의 차남인 훈기(41·iTV 희망노조 위원장)씨도 조부와 선친을 이어 언론계에 투신했다.

인천지역 원로 언론인들의 모임인 ()인천언론인클럽에서는 60년에 걸쳐 향토언론 발전에 기여한 운영 집안의 공로를 인정, 가족을 대표해 이벽 선생에게 제2회 인천언론상 외길상(2003)을 추서했다.

/ 김도현·kdh69@kyeongin.com

 

 

'편집권 독립' 과묵한 행보

운영 이종윤 선생의 8남매 가운데 장남인 묵천(默泉) 이벽(李闢·1926~2000·사진) 선생은 인천 언론계에 '편집권 독립'과 관련해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경기일보(73년 경인일보 전신 경기신문으로 통폐합)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지 불과 2주일도 안된 1971920일자 경기일보 1면 하단 '바람개비'란에 게재한 글은 언론 정도(正道)를 걷고자 했던 선생의 언론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존 스튜어트 밀''자유론'을 인용한 이 글에서 선생은 편집권을 흔드는 이들을 향해 원색적인 단어까지 사용하면서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그릇된 행위로 시민의 일부나 또는 대다수가 피해를 입게된다고 하면은 그것을 모든 시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 것이 신문의 사명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 지 신문이 그 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신문사 경영자와 신문편집자에게 갖가지 항의를 해오고 있다. 도둑에게 매를 든다고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측에서 그것을 보도할 정당한 권리와 의무가 있는 신문의 보도를 잘못한 것인 양 책하고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꼬라지들인가.'

 

중앙정보부 등 기관원과 신문사주 등의 편집권 침해가 당연시 되던 당시 시대 분위기를 감안하면 일대 사건으로 기억된다고 원로 언론인 오세태(66·당시 경기일보 편집차장)씨는 증언하고 있다.

 

이 사건 뿐만아니라 선생은 편집국장으로 재직(19719~19734)하는 동안 비판적인 기사편집과 관련해서는 후배들에게 어떠한 지시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대가성 짙은 기사라고 판단되면 예외없이 걸러냈다고 오세태씨는 덧붙였다.

 

·외부 입김 탓에 '기사 수위'를 적절히 조절했던 전임 국장을 불신임한 편집국 직원들의 만장일치 추천으로 편집국장이 된 선생은 그해 한국신문협회의 한국신문상 제6회 편집부문 본상(1971)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부인 강분희(75)씨는 선생이 서울 선린상업고등학교(현재 선린인터넷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한 신문학원을 수료한 뒤 1947년 대중일보에 입사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중일보에 이어 '인천신보'에서 경제부장과 취재부장을 지낸 선생은 1955년 동양통신 인천 특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6년 경기일보가 창간되면서 편집부장과 편집국장을 역임한 선생은 유신정권의 언론통폐합정책(11)에 따라 1973831일 경기일보가 문을 닫으면서 사실상 언론계를 떠났다.

 

[인터뷰] "불의와 타협않는 정신은 가족사"

할아버지나 아버님 모두 독재정권이 활개를 치던 불운한 시대를 살아가신 분들입니다. 특히 아버님은 결국 당신의 뜻을 펴지 못한 채 눈을 감으신 불행한 언론인 이셨습니다.”

 

이벽 선생의 22녀중 장남인 이철기(49·사진) 동국대 교수는 할아버지인 이종윤 선생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평생을 사셨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위주로 말을 이었다.

 

평소 말씀이 없으셨지만 아버님께서는 '기회는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3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나에게도 기회는 온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곤 하셨다고 전했다.

 

유신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19739월 언론계를 떠난 이후 20여년만에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 수 있는 민주화가 찾아왔지만 이미 칠순을 넘긴 고령 때문에 그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시민연대' 공동대표 등 학교를 벗어나 활발하게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 교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물려받은 것 같다며 집안 내력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하나 들려줬다.

 

유신헌법이 통과되던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이 교수는 정말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이틀간 단식을 했고,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동생 훈기(41)씨도 모든 친구들이 유신을 찬양할 때 나홀로 '유신은 나쁘다'를 외쳤다고 한다.

 

어머니 강분희(75) 여사 역시 유신정권 시절 천주교 성당에서 열리는 시국기도회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김대중의 옥중서신 등 당시로서는 불온 인쇄물(?)을 받아 집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런 탓에 순탄치 않는 길을 걸었고 또 지금도 걷고 있는 아픈 가족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 교수는 아버님이 한창 활동하실 때 펜을 놓았는데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언론계에 뛰어들었던 동생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어 마음이 무겁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