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엄흥섭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30 10:56:52
'사회변혁의 꿈'…작가 엄흥섭
[인천인물100人·46] 원고지에 핀 '사회변혁의 꿈'…작가 엄흥섭
일제 식민지시대 인천지역 빈민들의 삶에 천착한 작가 엄흥섭(1906~?). 해방 이후 지역 언론운동을 주도했던 그의 행적은 파란만장했던 한국 근대사 자체다. 그는 월북으로 끝내 자신의 종적을 남한에서 감춰 버렸지만 일제시대 소외된 조선 민중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과 명확한 이념적 활동 등을 통해 현재와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인천스러웠던 그의 활동 궤적은 일제시대와 해방후 한국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의 대표적 유작들은 월북작가들의 해금과 동시에 조명을 받고 있지만 행적에 대한 연구가 미미한 형편이다.
일제 식민시대 인천지역 민중들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단편소설 '새벽바다'. 지난 1935년 12월 '조광'지에 발표해 당시 인천 상황을 사진처럼 표현한 이 작품은 식민시대와 자본주의로부터 동시적 고통을 겪는 민중들의 힘겨운 삶이 잘 드러나 있다. “'뚜우…'하고 부두의 공기를 흔들은 대련환(大連丸)은 석탄연기를 내뿜으며 슬며시 이륙하기 시작한다. 쨍쨍 쪼이던 해가 바다 저끝에 기울어지자 물결은 갑작이 피를 토해 놓은 것 같다”로 시작하는 '새벽바다'는 당시 인천항의 전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인천항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새벽바다'의 주인공 최 서방은 부두에서 날품팔이를 하는 노동자. 농촌에서 밀려 인천의 빈민굴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최 서방과 그의 가족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 치하의 가혹한 농업정책과 일제의 착취로 도시 부랑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식민지 민중들의 암담한 현실을 그린 작품이 바로 '새벽바다'다. 일제의 가공에 의해 근대 도시화되는 인천의 모습과 자본주의 병리 현상이 이 소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엄흥섭은 지난 1906년 충남 논산군 채운면 양촌리에서 삼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기독교 신자이며 인텔리인 어머니의 가정교육을 받지만 11살 때 어머니 마저 잃고 경남 진주로 옮겨가 숙부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가 동인지활동을 시작한 것은 진주중학 시절 '학우문예'를 조직하면서부터. 이후 그는 인천을 중심으로 진우촌, 박아지 등과 함께 '습작시대'에 참여하고 단편소설 '국밥'을 발표한다.
당시 엄흥섭은 경남도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에서 10리 떨어진 '평거'라는 낙후된 농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는 경남에서 인천을 오가며 문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붓는다. 엄흥섭은 진주에서 교원생활을 청산하고 상경해 본격적인 문학활동에 전념한다. 이 시기에 그는 카프(KAPF)에 가담하고 중앙집행위원에 보선된다.
그는 지난 1937년 인천에서 발간된 '월미'지에서 지독한 인천 사랑을 표현한다. 그는 이 잡지에 수록한 수필 '해방항시 인천소감'에서 “나는 인천을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슬퍼한다. 그것은 인천이 항구이기 때문이라는 것과 또한 항구 가운데서도 해방된 낭만적 항구이기 때문이라는 두가지 이유에서다”라고 적고 있다.
해방이후 그는 1945년 결성된 좌익 문학인들의 모임인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프로문맹)에 가입한다. 이후부터 그는 아예 인천에 터를 잡고 더욱 지역 문화 운동에 매진한다. 해방 직후 인천지역은 젊은 예술가들과 문화인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민족문화와 지역문화 건설을 둘러싸고 뜨거운 열기로 충만했다. 그는 특히 1945년 12월18일 결성된 인천문학동맹의 위원장을 맡는다. 프로문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던 엄흥섭의 활동 상황은 자연스럽게 인천문학동맹위원장으로 만들었다.
엄흥섭은 1945년 진보적 입장을 표방하고 창간한 '대중일보'의 편집국장과 인천신문기자회 위원장직을 겸직하며 언론계에 뛰어든다. 그러나 그는 진보적인 논조를 표방하던 대중일보가 중도적인 입장으로 변화하자 새로 창간한 '인천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장을 맡는다.
그는 이 신문사에서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창건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구속되는 필화사건으로 타격을 입는다. 이로 인해 신문사는 폐간되고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엄흥섭은 실형을 언도받는 수난을 겪는다. 이후 엄흥섭은 좌익 인사들을 감시하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1950년 6·25 전쟁과 동시에 월북한다. 그의 월북 이전 남한 행적은 좌·우를 넘나드는 당시 치열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성균관대 국문학과 석사 논문에서 이봉범씨는 엄흥섭과 관련, “그는 일제하 다른 작가들과 달리 인천을 중심으로 왕성한 문예활동을 벌였다”며 “그는 또 문학을 사회변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 자신의 신념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성실한 문학가”라고 평가했다.
/ 목동훈·mok@kyeongin.com
[인천인물100人·46] 엄흥섭의 문학분출 공간 '습작시대'는
엄흥섭이 리얼리즘 문학을 분출했던 공간이 바로 '습작시대'다. 지난 1927년 2월1일 창간된 이 잡지는 인천을 기반으로 발행됐지만 당대를 호령하던 문인들이 참여했던 중요한 문학사적 가치가 있다.
'습작시대'는 반타블로이드판 20면 내외의 월간지였다. 비용은 한형택이 대부분 제공했고 편집은 진우촌이 담당했다고 한다. 주요 필진으로는 중앙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주요한과 김동환, 박괄양 등의 중량급 문인들이 참여했다. 창간호에서는 이광수와 최남선, 김팔봉 등도 글을 써 당시 문학계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각 지역 문학청년들의 교류와 문단 선배들의 후원에 힘입어 창간된 이 잡지는 판매 또한 동인들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습작시대는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엄흥섭은 '책장에 갖다 맛기고 간판이나 하나 세우면 불과 3·4일 동안에 휙 다 팔려버리곤 했을 정도'라고 '나의 동인잡지시대를 말함'에서 적고 있다.
습작시대는 4호를 끝으로 폐간된다. 현재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창간호와 제3호다. 프로문학이 1920년대 후반들어 각 지역과 일반 독자층으로 그 폭과 너비를 확대하는 과정을 실증하는 잡지가 바로 '습작시대'다.
[인천인물100人·46] 엄흥섭은 어떤 작가인가
엄흥섭은 어떤 작가인가.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엄흥섭을 연구했거나 그의 작품을 접한 사람들에게 엄흥섭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박진숙 성균관대 교양학부 교수는 '탄생 100주년 문인 기념행사'를 위해 엄흥섭 관련 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다. 박 교수는 “엄흥섭은 카프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며 “그는 군기사건으로 인해 카프중앙위원에서 제명되지만 그 사건으로 그의 문학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카프계열 작가들은 농민과 지주 간의 갈등, 공장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을 그렸다”며 “그는 인천에서 집필활동을 하고 동인활동을 해서 그런지 어부 노동자의 삶을 그리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봉남(성균관·세명·성공회대 등) 강사는 “당시 인천을 중심으로 문학이나 연극의 동인활동이 매우 활발히 진행됐다”며 “그때 엄흥섭은 박아지, 진우촌 등과 함께 활발한 동인활동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군기사건과 엄흥섭의 초기소설'이란 글을 쓴 장명득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카프계열 작가들이 전향을 거치는 데 비해 엄흥섭은 40년대 전까지 계급적이고 적극적인 글을 썼다”며 “40년대 이후 통속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해방 후 다시 그 이전에 보여줬던 적극적인 글쓰기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월북 후 쓴 '동틀무렵'이란 작품은 북한 문학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며 “북한에서는 월북작가인 한설야만큼이나 엄흥섭의 가치를 높게 사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주형 경북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엄흥섭은 문단에 등장하기 전부터 사회주의적이고 계급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회고담에서 밝혔듯이 소학교 시절 자유주의적 진보주의 사상을 가졌던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형님이 망하면서 숙부 밑에 가난한 생활을 지냈기에 사회주의적 노선을 가졌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작품에 대해선, “투사후일담 같은 몰락상을 통해 강한 현실인식의 모습을 보여줬다”면서도 “그들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어떤 인식과 신념을 갖고 있는 지, 어떻게 투쟁했는 지에 대한 내면의 깊이를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아쉽다”고 설명했다. 또 “문학적 성취도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은 작가”라며 “그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이런 아쉬운 점들 때문에 다른 동반자·월북작가에 비해 덜 조명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대학연구소 관계자는 “엄흥섭은 월북과 함께 문단계에서 멀어지면서 그 후 관심을 덜 받았다”며 “80~90년대 월북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새롭게 이뤄졌지만 엄흥섭은 그의 작품세계와 경향에 비해 덜 주목받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에 대한 재조명·재인식이 가치가 많을 것이다. 그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인천인물100人·46] "문화·소설적 공간 적극탐구 인천문화운동 '숨은 주역'"
“일제 식민지시대의 현실을 그 나름대로 소설에 담으려 노력했던 인천의 작가입니다.”
지난 24일 인천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희환(40) 인하대 국문과 강사는 엄흥섭이 인천과 연관성이 깊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 강사는 “엄흥섭은 1926년대 진주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습작활동을 했다”며 “당시 인천을 오가며 문학청년들과 교류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희곡작가) 진우촌을 중심으로 인천 문학청년들과 교류가 이뤄졌던 것으로 짐작된다”며 “어느 시기에는 인천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강사는 지난 2004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학술지 '한국학연구'에 '엄흥섭과 인천에서의 문화운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인천의 문학운동사와 근대문화를 찾다보면 쉽게 만나는 이름이 바로 엄흥섭이었다. 그는 “해방 후 자료를 보면 대중일보의 엄흥섭을 알게 되지만 작가 엄흥섭과 연결이 안 된다”며 “그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엄흥섭을 연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인천을 배경으로 쓴 엄흥섭의 작품으로는 '새벽바다', '고민', '정열기' 등이 있다. 이중 '새벽바다'는 일제 식민지시대의 현실과 당시 인천의 모습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이 강사는 “이 작품은 일본인이 만들어 놓은 화려한 중심가와 조선서민들이 사는 뒷골목이 대조를 보이고 있다”며 “엄흥섭은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는 소설을 왕성하게 썼다”고 설명했다. 또한 “30년대 후반에는 통속소설로 변화, 일제 말에는 친일적인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엄흥섭은 문학사에서 동반자 작가로, 통속소설을 쓴 작가로만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인천을 문화·소설적 공간으로 적극 탐구한 인천 문화운동의 숨은 주역입니다.”
이 강사는 “인천문화·언론에서 중심인물이 된 것을 보면 지역에서 숨은 활동이 있었을 것 같다”며 “글솜씨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왕성하고 성실하게 활동한 작가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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