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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강화 무애원/도예로 불심 전파

by 형과니 2023. 4. 6.

강화 무애원/도예로 불심 전파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4-04 15:32:18

 

세상을 빚고 사랑을 빚는 거친 손

'내가 품으리라' 마음 먹고 출가, 도예로 불심 전파

 

숲으로 둘러싸인 무애원은 건물 양식의 독특함과 사방을 장식한 도자기로 방문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한다.

 

무애원과 설봉. 여느 선방이나 암자를 연상하며 덕 높은 스님을 만나려니 하고 길을 나섰다. 강화대교를 건너 민족의 성지, 강화에 들어섰다. 차를 몰아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유적공원 바로 앞에서 무애원으로 접어들었다. 풍성하게 우거진 느티나무와 낯선이를 향해 컹컹짖어대는 황구가 우리를 맞는다. 그리고 올록볼록 엠보싱처럼 사방 풍경을 장식한 도자기들.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머무르지 않고 거침이 없다는 뜻의 무애원(無碍院)은 조계종 산하 포교원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강화 관광명소로서 도자기를 만드는 곳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원장인 설봉 스님이 이곳에서 도자기를 굽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나니 공중변소 지붕까지 차지한 도자기가 이상스럽지 않다.

 

경황 중에 방문객을 맞은 설봉 스님은 복색은 승려이나 절집 향내 보다는 흙냄새가 먼저 뭍어나는 도인이었다. 예술에 대한 소신과 자신만의 비법을 퍼뜩 풀어놓기 시작했다. 스님은 다른 도예가들의 방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비법으로 도자기를 빚는다. 20여년 전 늦깎이로 도예계에 입문한 설봉 스님의 도예 세계는 독특한 유약의 개발과 활용, 그리고 디자인의 독창성을 축으로 움직인다.

 

분업화되고 표준화된 제작방법을 따르는 도예가 아니라 모든 재료와 공정을 직접 챙기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나만의 작품 세계를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달항아리, 고구마형 항아리, 매병과 유병 등의 전통 도자기를 재현하는데 역점을 두면서도 기존 형태를 변형시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지요

 

처음에는 유광약을 이용해 빚었지만 독창적인 무늬와 빛깔을 내기 위해 밤나무재, 굴껍질, 부싯돌 등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재료를 이용해 무광유약을 개발해 썼다. 밤을 낮 삼아 나무재와 광물로 유약을 제조하고 실험하며 특이한 문양과 빛깔, 질감을 얻기 위해 물도 잘 빠지지 못한다는 고운 채를 사용했다. 자신의 손으로 탄생시킨 도자기가 누군가의 것과 비슷하더라는 이야기만 나와도 그 도자기와 유약은 가차 없이 폐기되고 만다.

 

그는 예술적 재능이 탁월했던지 서각, 서예는 물론 춤과 노래에 능했다. 모두가 도자기 빚는데 도움이 됐다.

그러고 보니 고집스런 도예가의 면모가 더욱 짙기도 하다. 이런 그가 승려라니. 부산 출생이면서 건축을 공부했다는 스님은 한때 교편을 잡으며 학비를 제 때에 내지 못해 곤혹을 치루는 아이들을 돕지 못해 발만 굴러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그 아이들을 내가 품어야지라고 맘 먹고 무엇으로 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고민했습니다. 성직자가 돼야겠는데 처음엔 가톨릭 신부가 될까 생각했지만 간섭이 많을 것 같아 훌훌 움직이기 편한 승려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때가 29세 나이. 경남에 있는 은하사에서 참선과 공부를 하며 몇 년간을 보낸 뒤 1976년 서울 신길동 대방천 둑가 판자촌에 무애원을 세웠다. 그래서 모인 제자들과 길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을 데려다 함께 놀며 법회를 가르쳤다. 하나, 둘 느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 간식거리와 학용품을 사주기 위해서였다.

 

건물 뒷편 가마다. 지금은 전통 흙가마 보다는 가스불로 도자기를 구워낸다.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자주 탁발을 나가고 시간이 남으면 카페의 실내장식을 해주며 상가집에 가서 경도 읊었어요. 결손 가정 아이들도 상당히 많아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한테 남모르게 학비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한두 해 모인 아이들이 1982년에는 무려 12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에게 11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애원 어린이민속공연단이 만들어져 군부대, 고아원, 교도소, 섬마을 등을 두루 방문하여 위문공연을 했다. 무애원이 안정기에 접어들 즈음 그동안 잠들어 있던 예술적 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 신도가 가마터를 소개한 연유로 도자기와 만났다.

 

청소년 수련과 도자기에 전념하기 위해 1992년 강화 무애원으로 이주한 설봉스님은 어린이 포교에 전념하던 이전과 달리 제2의 포교를 시작했다. 전문 도예연구소를 설립하여 도예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는 한편 군 포교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인연일까, 행병대원이 많은 강화에서 일요일에는 정기법회를 갖고 여름이면 '이병의 날'을 치렀다.

 

겨울에는 칼바람이 들이치는 해안초소를 돌며 따뜻한 커피와 함께 훈훈한 마음을 날랐다. 군인들의 어버이로 불리는 스님은 2002년 군법당인 기룡사를 건립하기도 했다. 이들의 안녕과 무사제대를 위해.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가야할 온정은 손길은 멈추지 않고 있다. 직접 거두지는 않고 있지만 수익의 일부가 청소년들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 이제 장년이 된 무애원 아이들이 지금은 든든한 후원자요, 지지자로 미쁘기만 하다.

 

설봉 스님의 거친 손에서 사랑이 빚어지고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개성있는 작품세계와 87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회를 훌쩍 넘긴 전국 순회전시를 통해 스님의 작품에 푹 빠진 마니아는 셀 수 없을 정도. 스님의 뜻에 동참해 기존 작품을 구입하거나 원하는 형태로 맞춤 주문을 하기도 한다. 또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지방에서 강화 무애원을 찾는다.

 

도인(道人), 도예가(陶藝家)의 손이 꼭 저럴까, 농투성이처럼 거칠고 투박하다. 연민의 정으로 택한 수도자의 길, 도예로 다시 완성되는 거침없는 사랑이고 보면 그 어느 것에 거침없는 불심과 다름없을 것 같다. 작업실로 총총히 사라지는 스님의 뒷모습이 아름답고 엄숙해 보인 것은 기울어진 햇살의 장난 때문이었을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실 저는 절도 없고 신도도 없습니다. 하물며 작업실이나 방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금 머무는 그곳이 작업실이고 방입니다. 걸쳐서 편하고 너무 흉하지 않으면 입은 옷이 되고 내 입에 맞으면 밥이 되지요

 

무애원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www.muaewon.org)를 통해 알 수 있다. 도자기 만들기에 참여를 원하는 경우 932-5087,5088로 문의하면 된다. 참여 인원이 최소 10인 이상이어야 일일도예교실이 열리는데 유치원과 초,,고교에서도 단체로 참여하면 유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