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횃불시위로 섬 전체가 자주의 불길-강화

by 형과니 2023. 3. 9.

횃불시위로 섬 전체가 자주의 불길-강화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04:58:38

 

횃불시위로 섬 전체가 자주의 불길

종교인 참여 활발, 대체로 평화적인 독립운동

 

강화지역 31운동은 최초 1919318일 읍내에 모인 1만명이 벌인 대규모 시위가 발단이었다. 이후 27일 강화읍 장날에 장을 보기 위하여 장터에 나왔다가 시위에 참석했던 주민들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리단위로 시위를 확산시키면서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야간 횃불시위 등을 벌여 이웃 동리에도 자연스럽게 시위 사실이 전해져 섬 전체로 독립만세 운동이 확산됐던 것이다.

 

당시 강화읍내 시위는 부내면 읍장의 규모가 컷던 탓에 경남 진주읍내 시위와 더불어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사례로 섬 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이튿날인 19일에서야 일본군 진압대가 파견된 점도 대규모 시위를 가능케 한 요인이었다.

 

길직리와 선두리의 인사들이 처음 시위를 준비할 때는 주로 강화의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연락을 취했으며 이후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시위는 강화의 북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갔고 이어 강화 중부지역으로 옮겨 전군에 걸쳐 시위가 확대됐다.

 

종교인의 참여도 활발해서 18일의 시위는 기독교 북감리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성공회 인사들은 읍내에서 시위가 진행될 때 동참했고 시위가 전군으로 확산되면서는 성공회 신자들의 주도로 시위가 전개되기도 했다.

 

312, 13일 부내면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기도가 있었고 교동에서는 23일에 학생들이 참여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272천명 가량이 참가한 읍내 시위의 경우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유리창을 파괴하며 서기를 구타하는 등 격렬했으나 강화의 시위는 대체로 평화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하거나 야간의 횃불시위 형태로 진행됐다. 강화의 31운동은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로 일관한 점과 전군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성공회 신자들의 시위참여도 주목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강화도에 있는 3.1운동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