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미도 등대와 6월 이야기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6-30 00:05:59
팔미도 등대와 6월 이야기
기고 - 전재천 인천해수청 주사
19세기 말, 인천에 각국의 정치·경제적 거점을 마련해 이권을 챙기려던 열강들이 앞다퉈 개항장 인천을 찾았다.
제일 먼저 눈독을 들인 나라가 일본이었다. 1901년, 침탈 야욕을 불태우던 일본은 개항되던 해 우리 정부와 체결한 '통상장정'에 '한국 정부는 통상 이후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를 설치한다'고 한 조항을 들어 등대 건설을 강권했다.
결국 정부는 강권에 못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등대와 북장자서, 백암등표 건설에 착수했다. 그렇게 해서, 1903년 6월, 우리나라 최초로 팔미도 등대가 완공됐다.
팔미도는 면적이 0.076㎢의 작은 섬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 인천항에서 13.5㎞ 남쪽 바다에 있다. 해발 58m의 산꼭대기 근처에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이 등대는 현재 인천항을 드나드는 외항선들을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6·25 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게 함정들의 밤 바닷길을 밝혀주기도 했었다.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팔미도 등대가 노후화하자 해양수산부는 2003년에 등탑과 사무실이 같이 있는 연면적 187.5평 규모의 새 등대를 착공했다.
높이를 7.9m에서 23.6m로 높이고 광학적인 빛의 세기도 크게 강화해 더 멀리까지 뱃길을 안내할 수 있게 됐다.
팔미도 등탑은 인천광역시 지방문화재 40호 및 해양수산무 등대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돼 원형 그대로 보존되며 참전용사들이 다시 찾는 전적지로도 유명하다.
등대섬 팔미도는 아직 일반인 출입이 불가능한 군사지역에 있지만 역사적인 큰 사건의 획을 그은 등대인 만큼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이 매년 학생과 시민들을 상대로 한 '등대체험 행사'를 실시해 왔다.
다소 늦었지만 마침 6월이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와 6·25 전쟁, 열강의 각축 시절 사이에 얽힌 뒷 얘깃거리를 소개해 봤다./전재천 인천해수청 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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