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시민사회운동 20년-6월 항쟁과 운동의 분화(2)
仁川愛/인천시민사회운동
2007-07-31 00:39:10
인천 시민사회운동 20년-6월 항쟁과 운동의 분화(2)
- 주민운동, 연합운동, 시민운동
이념의 틀을 깨고 분열과 통합 거듭하다
-주민운동
인천지역 주민운동은 87년 6월 항쟁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대중운동으로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빈민지역 공부방, 탁아소, 진료소, 작은 교회 등에 흩어져 개별적, 국지적 성격으로 진행되었던 운동들을 인천을 권역으로 재조직하고 그 틀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인천은 부평, 주안, 남동공단의 수출공업단지와 임해 목재단지 등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돼 있었고 이 주변으로 노동자, 영세민이 밀집해 있었다.
주민운동은 동구 송림, 만석, 송현동 일대와 북구 십정, 산곡, 효성동 등 달동네, 영세민 밀집지역, 재개발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인천지역 주민운동은 80년대 노동운동과 궤를 같이 하여 기독교 도시빈민 선교운동 및 여성운동 차원에서 시발됐으며 청년, 대학생들이 강한 운동성을 같고 이들 지역 공부방, 진료소 등에 활동가로 참여했다.
87년 12월 ‘인천빈민지역활동가협의회’(빈활협)이 발족됐다. 80년대 초, 중반부터 빈민지역 공부방, 탁아소 등에서 일하던 활동가, 실무자 15명 가량이 역량을 모아 영세민 밀집촌 철거에 공동대처하고 주민운동의 영역을 넓혀가기로 한 것이다.
빈활협은 주민신문, 마을잔치, 어머니교실 등을 통해 주민교육 사업을 벌이며 공동체 생활을 강화해갔으며 지방자치제, 임대차보호법 등 지역문제 연구사업을 진행했다.
한편 6월 항쟁 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87년 대선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벌이면서 구단위 지부 체제로 전환해갔는데 87년 말 부평지부가 결성돼 지역운동을 전개했다.
부평지부는 동별 조직을 축으로 주민독서실, 풍물패 등을 조직하고 도서 무료 대여사업, 불공정 방송에 대한 시청료거부운동, 시사토론회 등의 주민사업을 벌여왔다.
89년 2월 빈활협과 국본 부평지부는 ‘인천지역주민회’란 이름으로 통합해 대중화를 꾀했다.
초대 회장은 김정택 목사와 홍미영 ‘해님방’ 대표였다. 주민회는 동별 모임체를 골간으로 유아 놀이방, 굶는 어린이를 위한 밥집, 취학 아동 공부방 등을 운영하고 여성사업, 주민사업, 소식지 등을 통해 주민들과 지역문제를 공유, 여론화하며 공동체의식을 높여나갔다.
90년 3월 주민회 회원들과 직간접으로 연계돼 활동했던 십정동 해님방, 화수동 민들레어린이집, 송림동 사랑방어린이집, 청천동 햇살어린이공부방, 만석동 기차길옆공부방, 구월동 청솔의집 등 인천, 부천지역 15개 공부방이 공부방연합회를 결성해 소외된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교육, 문화, 복지 공동체를 형성했다. 빈민운동에 참여한 민중 교회가 운영하는 공부방이 많았다.
이들 공부방들은 운영난으로 사업이 중단돼 95년 공부방연합회도 해산됐다가 99년 들어 복구됐다. 송림동 사랑방진료소, 송현동 산마루진료소, 효성동 백마진료소, 십정동 열우물진료소, 부천 새롬진료소 등 주민회와 연계돼 무료진료 활동을 벌이던 5개 진료소도 ‘인천지역진료소연합’을 구성해 진료 활동에 효율화를 기했다. ‘인천지역주민회’는 공부방, 탁아소 등이 독립해가면서 91년 해체, 분화됐다
87년 8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전국총회에서 박형규목사가 연설하고 있다. 인천 국본은 87년 6월 항쟁 이후 전개된 인천지역 연합운동의 모태였다.
- 연합운동
6월 항쟁을 이끈 국본은 5월27일 창립됐지만, 인천본부는 86년 5.3 인천항쟁 여파(지도급 인사의 구속 수배)로 87년 9월6일에 창립됐다.
인천의 6월 항쟁은 인사연 등 8개 공개단체로 구성된 ‘4.13 호헌분쇄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지역공동대책위’가 중심이 됐다.
인천 국본은 종교인, 노동자, 학생, 청년, 빈민, 자영상인과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을 아우러 2천여명의 서명을 통해 출범했다.
인천 국본은 군부독재의 완전한 종식,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외세 반대운동, 민주주의의 철저한 실현, 기층민중 중심의 광범위한 생존권 투쟁의 적극 동참 등을 표방했다.
이어 87년 대선을 앞두고 ‘민선 민간정부 수립’과 ‘기층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목표로 정책간담회 등을 전개나가며 전면적인 개혁을 통한 민주화를 촉구하고 시민의 단결됨 힘을 모아나갔다.
공동대표는 이근창 신부, 주복균 목사, 오순부 인해협 회장, 이호웅 인사연 의장, 제정구씨가 선임됐다.
국본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 대선을 전후로 정치적 노선을 놓고 분열, 와해됐고 그 후신으로 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출범했다.
민통련이 명망성 있는 인사를 중심으로 구성됐다면 전민련은 대중적 조직을 중심으로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적 구심체로 출범했다.
그것은 각 부문의 대중조직들이 하나의 전선을 형성하고 하나의 지침에 따라 투쟁하기 위한 이른바 ‘전선운동’이 본격화된 것이기도 하다.
인천 국본은 대선 후 88년 9월 전민련 인천조직인 인민련 창립으로 이어졌다.
인민연에는 인사연, 인천민중연합, 인천노동운동단체협의회, 인천민주청년회, 천주교사회운동연합(천사협), 인천기독교사회운동연합(기사연), 인천민중문화예술운동연합 등이 가입했다.
초대의장 이호웅 인사연 의장에 이어 김정택, 양재덕이 의장으로 활동했다.
인민연은 민중생존권 지원과 5공비리 관련자 처벌, 조국통일운동을 당면 중점과제로 설정하고 당시 대량 해직사태를 맞은 전교조 인천지부와 인노협을 지원했다.
한편 90년 들어 ‘보수대연합 분쇄’와 ‘민중생존권 쟁취’를 위한 계급대중조직의 전선체로 ‘민자당일당독재분쇄 및 민중기본권쟁취 국민연합’(국민연합)이 결성되어 정파와 대상이 다른 전선체가 일시 양립하게 되었다.
인천조직은 ‘민자당장기집권음모분쇄 및 민중생존권 쟁취 국민연합 인천본부’로 명칭을 정하고 90년 4월 김정택 등을 공동의장으로 결성됐다.
국민연합은 광주학살 5공비리 철저한 진상규명, 부동산투기 근절, 독점재벌 특혜정책 철폐 등 8대강령을 채택했다.
전민련은 91년 합법정당 건설에 대해 의견이 대립하고 일부는 독자정당 건설을 위해 탈퇴하는 등 혼란에 빠져 지도력을 잃고있는 가운데 인천민중연합 등 일부 단체는 국민연합 인천본부로 ‘전선 이동’했다.
인천본부에는 인노협, 전교조, 인대협, 민중당, 인천지역 주민회, 노동자대학, 인천지역 노동교육상담단체협의회, 기사연 등이 참여했고 후에 인민련도 결합했다.
양 전선체는 91년 12월 상설 전선체로서 민주주의민족통일운동연합(전국연합)으로 통합됐다. 전국연합에는 전노협, 전농, 전대협, 전교조, 전빈협(전국빈민연합) 등 부문별 대중조직을 묶어 기층 민중세력의 포괄하는 조직화를 이뤄냈다.
인천연합은 92년 2월 결성됐고 인민연은 92년말 조직을 해소하고 인천연합과 통합했다.
인천연합은 결성시 인노협, 인대협, 전교조 인천지부와 인사연, 천사협, 기사연, 인천노운협, 인천민중연합, 인문연, 여노회를 통합한 최대 전선을 이뤘다.
인천연합 초대의장은 양재덕 인민련 의장이 선임됐다. 인천연합은 96년 인천민중연합 등 조직의 이탈, 분화를 거쳐 97년 6월 6기 발대식 때는 9개 단체(가톨릭청년연대, 민족사랑노동자회, 인천노동자의 집, 여노회, 인천부천총학생회, 통민노회, 전교조, 현장문예단 좋은세상, 기독노동자인천연맹)가 남았다.
-시민운동
87년 6월 항쟁 이후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일정 부분 인정되고 시민적 활동 영역도 확장됐다.
경제성장의 결과 스스로 중산층으로 여기는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점진적 개혁을 선호했으며 환경, 의료, 교육, 여성문제 등 일상생활에서 개혁과 개선을 요구하는 자기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군사 정부의 정치 사회적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지역 시민사회에서도 다양한 요구들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이 시민운동의 이름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90년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돼 민주화운동진영이 이념적 혼란에 빠지고, 92년 군부정권이 퇴진하면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분화도 심화됐다.
민중민주운동에 몸담아왔던 활동가들 중 일부는 제도정치권에 들어가거나 시민단체를 결성했으며 일부는 생활전선으로 향했다.
6월 항쟁 이후 부각된 시민운동은 그러나 내면적으로 사회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의 성격을 띠며 다양한 인천지역 사회운동을 포괄해나갔다.
89년 목요회를 시작으로 94년 해반문화사랑회, 청량산살리기시민모임 등 인천지역 시민단체의 창립이 잇따르는 한편 92년 경실련을 비롯, 환경운동연합, 참교육학부모회 등 전국 조직 시민단체의 인천지부가 차례로 창립되기 시작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80년대 초·중반 인천의 빈민운동
인천, 서울 등 수도권 주민운동의 시발은 1968년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내 창립된 초교파적 도시선교위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농 인구가 대거 수도권 판자촌으로 몰려들면서 도시 빈민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70년 4월 서울 창전동 판자촌 지구에 지은 시영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와 71년 7월 경기도 광주대단지(현 성남시)에서 발생한 판자촌 이주민 폭동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도시빈민들의 비참한 삶에 관심을 갖게했다.
71년 9월 도시선교위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주민조직운동(CO, Community Organization)을 훈련시켜 서울 청계천과 인천, 성남 등지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CO 훈련은 활동가이자 조직가로서 지역에 들어가 살면서 주민 공통의 이해관계, 요구 및 문제점을 파악하되, 주민 스스로 이를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주민지도자를 발굴하고, 단합된 노력을 고양시키도록 했다.
인천의 빈민운동은 80년대 초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산선)를 매개로 시작됐다.
산선은 70년대까지 당면한 노동자 중심의 도시선교 활동을 벌여왔으나 80년, 81년 각각 ‘민들레어린이집’과 ‘민들레(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고 70년에 창립한 ‘산우신용협동조합’과 유기적으로 결합, 주민운동을 본격화했다.
동구 송림6동에 있었던 사랑방교회는 사랑방어린이집과 한글교실, 사랑방진료소 등을 통해 주민운동을 벌였다.
동구 화수동에 소재한 산선은 이들 세 형태의 주민사업과 조합원, 부모교육을 통해 80년대 초 화수, 화평, 만석, 북성동 일대 주민을 위한 기초생활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민들레어린이집은 80년 9월 산선 총무, 간사로 일하던 조화순, 김동완 목사와 유효순 교사를 중심으로 문을 열어 2~6세 맞벌이 빈곤층 어린이의 보육사업을 통해 주민모임을 발전시켜갔다.
민들레협동조합은 주민 250여명을 조합원으로 그 대표들이 운영위원회를 통해 참여했다. 인천기독병원 수련의 양요환와 서울대 치대생 전동균 등으로 조직된 의료진 20여명과 동구보건소에 근무하던 조옥화를 실무진으로 구성, 주말진료와 야간진료, 보건상담, 영유아 건강관리 등의 사업을 수행했다.
83년 11월에는 만석동 판자촌(아까사끼촌)에 진보적 여성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한국여성평우회가 인천의 첫 빈민여성 사업으로 ‘큰물공부방’을 개설했다.
학령기 아동을 돌보았던 최초의 공부방인 ‘큰물공부방’은 87년 2월 아까사끼촌이 철거될 때까지 빈민 기혼여성들을 위한 생활공동체의 모임체로서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홍미영은 실무자로 84년 8월부터 서울에서 ‘큰물공부방’으로 이주했고, 아까사끼촌 철거 후 십정동으로 옮겨 87년 5월 ‘해님방’을 열었다.
인천 산선은 70년대 조승혁, 조화순, 김동완 목사에 이어 83년 김정택 목사가 총무를 맡았다. 김정택 목사는 86년 송현동 영세민촌에 산마루교회를 설립해 진료사업 등 주민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85년 10월에는 박종렬 목사가 송림6동에 사랑방교회를 세우고 공부방과 진료소, 한글, 주부교실을 열어 인천지역 주민운동에 합세했다.
86년 4월 개시한 ‘사랑방진료소’에는 홍학기, 김인수, 이원준 등 청계피복노조 진료에 참여했던 경희대 출신 의료진과 성모자애병원 간호사 등이 결합해 양,한방, 치과 치료를 할 수 있었다.
박종렬 목사는 89년 11월 조직된 전국빈민연합 의장으로도 활동했다. 김동완, 김정택, 박종렬 목사는 연세대에서 주민조직훈련(CO)을 받고 빈민운동에 투신한 사례다.
김정택 목사는 92년 사회운동에서 손을 떼고 96년 강화에서 환경농업농민회를 조직했다.
박종렬 목사는 송림동 재개발사업으로 사랑방교회가 사라질 때까지 ‘송림제2구역 주택재개발사업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02.7~04.8)하면서, 조합장 공정선거를 이끌어냈고 분양가 인하와 세입자 이주문제를 지원하고 송림동에서의 주민운동을 마무리했다. 송정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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