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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꽃게 조개 지천 '황금 갯벌'···역사 속으로

by 형과니 2023. 4. 15.

꽃게 조개 지천 '황금 갯벌'···역사 속으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9-06 04:23:36


꽃게 조개 지천 '황금 갯벌'···역사 속으로


1960~70년대 송도의 모시조개(가무락)와 꽃게는 대단했다. 정월 보름 송도의 모시조개 탕을 먹지 않으면 ‘나이를 헛 먹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지금 송도의 꽃게탕 거리가 과거의 ‘펄 꽃게’와 맞닿아 있다. 장사꾼들이 다른 곳에서 잡은 꽃게에다 펄을 발라 맛 좋은 ‘송도 꽃게’라며 속여 팔 정도였다.

지금의 해안도로가 난 인천 남구 학익동~옥련동~동춘동은 1970년대 초 만해도 ‘백합’ 껍질이 수북이 쌓여 있던 곳이다. 썰물 때 남구 용현동 토지금고 인근 낙섬(落島)에서 연수구 옥련동 아암도(兒岩島)까지 백합 껍질 위를 길 삼아 다닐 정도였다.

‘황금 갯벌’이었던 송도 갯벌의 부침(浮沈)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당시 송도갯벌은 남구 용현동∼연수구 옥련동∼청학동∼동춘동∼남동구 고잔동∼논현동까지 펼쳐 있었다.

남구 용현동 갯골은 동양제철화학 앞까지 들어서 있었고 송도 석산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남구 학익동과 연수구 옥련동 사이에 작은 동네가 ‘조개 골’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바로 앞 갯벌에서 조개를 캐다 팔았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와 럭키 아파트 등이 들어 선 옥련동의 능허대는 밀물 때 섬이었다. 동춘동 앞 바다에서 연수동 롯데 마트 인근까지도 갯골이 길게 나 있었다. 남동구 고잔동 앞 바다에서 선학동과 문학경기장 인근까지 바닷물이 들고 나는 갯벌이었다.

인천의 어촌계도 이 갯골을 중심으로 생겼다. 연안(동구 만석동)∼송도(연수구 옥련동)∼척전(연수구 청학동)∼동막(연수구 동춘동)∼고잔(남동구 고잔동)∼소래(남동구 논현동)등이 있었다.

인천은 심한 조수 간만의 차로 생긴 갯벌이 드넓은데다 영양분이 풍부한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등의 물이 빠지는 길목이어서 조개류를 양식하기에는 탁월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송도 갯벌은 양식업 투자의 핵심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1961년 47만6천238㎏이었던 양식 생산량은 이듬 해 106만1천697㎏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계속된 양식업 진흥사업으로 1965년 양식 생산량은 472만7천73㎏으로 급증했다.

1970년대 정부가 양식 사업을 국가장려사업으로 권장하면서 송도 등 연안 갯벌은 대규모 조개 양식장으로 변모했다.

1971년 백합 118㏊, 가무락 315㏊, 굴 10㏊이었던 양식장이 1979년에는 백합 374㏊, 가무락 438㏊, 굴 22㏊로 넓어졌다. 생산량도 712만9천408㎏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979년 송도 갯벌의 조개양식은 사양길을 걸었다. 인천항 관내 공유수면 종합매립 기본계획에 따라 건설부가 신규어장 개설을 막고, 기존 어업권에 기간 연장허가를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양제철화학은 1965년 폐석회를 묻기 위해 학익동과 옥련동 80만평을 매립하기 시작했고, 인천위생공사(주)와 (주)한독은 1981년과 1982년 관광단지 조성을 위해 옥련동 앞 바다 7만5천 평과 40만7천여 평을 육지로 매웠다.

한국화약은 1985년 화약 시험장과 야적장으로 고잔동 갯벌 11만평, 토지공사는 남동공단 조성으로 논현동 갯골 85만평을 매립했다. 가무락과 펄 꽃게를 키웠던 송도의 갯벌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