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장수동의 생명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10-11 20:59:37
하천을 찾아서-(14)장수천과 얽힌 사연
풍족했던 옛 장수동의 생명수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에서 만수동까지 잇는 너른 들판의 한 가운데에는 장수동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무네미골·장자골·만의골 등 장수동에서 시작한 장수천 물길은 현대·금호·담방마을 아파트가 있는 만수6동에 닿는다. 이곳은 예전 드넓은 논들이 펼쳐 있었다.
1910년대 일본인이 제작한 지도를 보더라도 거마산 바로 밑 만의골에서 무네미 마을을 따라 밑으로 수산동 입구까지 너른 논이었다. 동서로는 만수동에서 서창동까지 논이 이어졌다.
“장수동이 개발제한구역과 공원으로 묶여 개발이 안 돼 그렇지,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장수동엔 만수동보다 훨씬 많은 인구가 살았어.” 남동구 의회 윤창렬(61)의장이 기억하는 장수동은 먹고 살기에는 풍족한 동네였다. 지금도 구월동과 만수동, 심지어 남촌동에 땅을 갖고 있는 장수동 사람들이 더러 있을 정도다.
장자골에 얽힌 여덟 명의 장사에 대한 전설에서도 장수동의 부(富)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나라 살림이 극도로 어려운 때였다. 넉넉한 동네였던 이곳은 도둑들이 노리는 곳 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 동네 주막에 수상쩍은 장정들이 찾아와 술을 먹고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히 여긴 주모는 남편을 시켜 동네 청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소식을 들은 동네 청년 중 여덟 장사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
어둠이 깔리자 도둑들은 부잣집을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시작했다. 이 때 여덟 장사가 나타나 도둑을 모두 잡아 포도청에 넘겼다. 이후부터는 장자골에 다른 도둑들이 얼씬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장자골의 한자어는 힘 센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장자(將者)’골로 쓰는 이유다.
하여튼 너른 들판의 생명수는 장수천이었다. 농사철이 되면 서로 장수천 물을 대기위해 동네 전체가 난리법석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모내기 뒤에 찾아오는 가뭄이야, 벼가 타들어 가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장수천에 보를 막아 고인 물을 논에 대는 거야, 그러면 위쪽 논과 달리 아래 논은 댈 물이 없어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지, 도리가 없던 아래 논 주인은 위 논에 가서 작대기로 둑에 구멍을 내 자기 논에 물을 대, 그 때부터 논주인들 간에 다툼이 동네 싸움으로 번졌지.”
윤 의장은 아직도 모내기철 광경을 또렷히 기억한다. 모내기철 군인과 학생들이 총동원 된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장수천에 흐르는 부족한 물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군인들은 삽을 들고 개울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한참을 파고 나면 큰 웅덩이가 생기고, 그 곳에 물이 고였다. 학생들은 타래박으로 모내기를 못한 논에 물을 나르곤 했다.
이마저도 물을 댈 수 없는 논은 말뚝 모를 내야만 했다. 말뚝 모는 나무 꼬챙이로 논바닥에 홈을 낸 뒤 벼를 꽂는 모 심기의 한 기법이다. 워낙 날이 가물어 논에 댈 물이 없고 논바닥은 굵은 금이 갈 정도로 매 말라 있어 사용한 것이다.
날이 가물어 속을 태우던 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이 구멍 난 듯 쏟아지는 장맛비로 물난리를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장수천 끝자락인 만수6동 현대와 금호·삼익 아파트 일대는 20여년 전만해도 큰 방죽이 길게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담방마을의 이름도 방죽과 연관이 있다. 담방 마을 앞에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방죽이 있었다. 밀물 때 방죽 뚝은 바닷물로 찰랑찰랑했다. 방죽 둑을 넘으려고 담방담방하던 모습과 만수동의 너른 들판이 자리 잡았다 해서 붙여진 ‘벌담방이’가 줄어 ‘담방이’가 됐고, 담방마을이 생겼다는 얘기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풍족했던 옛 장수동의 생명수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에서 만수동까지 잇는 너른 들판의 한 가운데에는 장수동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무네미골·장자골·만의골 등 장수동에서 시작한 장수천 물길은 현대·금호·담방마을 아파트가 있는 만수6동에 닿는다. 이곳은 예전 드넓은 논들이 펼쳐 있었다.
1910년대 일본인이 제작한 지도를 보더라도 거마산 바로 밑 만의골에서 무네미 마을을 따라 밑으로 수산동 입구까지 너른 논이었다. 동서로는 만수동에서 서창동까지 논이 이어졌다.
“장수동이 개발제한구역과 공원으로 묶여 개발이 안 돼 그렇지,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장수동엔 만수동보다 훨씬 많은 인구가 살았어.” 남동구 의회 윤창렬(61)의장이 기억하는 장수동은 먹고 살기에는 풍족한 동네였다. 지금도 구월동과 만수동, 심지어 남촌동에 땅을 갖고 있는 장수동 사람들이 더러 있을 정도다.
장자골에 얽힌 여덟 명의 장사에 대한 전설에서도 장수동의 부(富)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나라 살림이 극도로 어려운 때였다. 넉넉한 동네였던 이곳은 도둑들이 노리는 곳 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 동네 주막에 수상쩍은 장정들이 찾아와 술을 먹고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히 여긴 주모는 남편을 시켜 동네 청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소식을 들은 동네 청년 중 여덟 장사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
어둠이 깔리자 도둑들은 부잣집을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시작했다. 이 때 여덟 장사가 나타나 도둑을 모두 잡아 포도청에 넘겼다. 이후부터는 장자골에 다른 도둑들이 얼씬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장자골의 한자어는 힘 센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장자(將者)’골로 쓰는 이유다.
하여튼 너른 들판의 생명수는 장수천이었다. 농사철이 되면 서로 장수천 물을 대기위해 동네 전체가 난리법석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모내기 뒤에 찾아오는 가뭄이야, 벼가 타들어 가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장수천에 보를 막아 고인 물을 논에 대는 거야, 그러면 위쪽 논과 달리 아래 논은 댈 물이 없어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지, 도리가 없던 아래 논 주인은 위 논에 가서 작대기로 둑에 구멍을 내 자기 논에 물을 대, 그 때부터 논주인들 간에 다툼이 동네 싸움으로 번졌지.”
윤 의장은 아직도 모내기철 광경을 또렷히 기억한다. 모내기철 군인과 학생들이 총동원 된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장수천에 흐르는 부족한 물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군인들은 삽을 들고 개울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한참을 파고 나면 큰 웅덩이가 생기고, 그 곳에 물이 고였다. 학생들은 타래박으로 모내기를 못한 논에 물을 나르곤 했다.
이마저도 물을 댈 수 없는 논은 말뚝 모를 내야만 했다. 말뚝 모는 나무 꼬챙이로 논바닥에 홈을 낸 뒤 벼를 꽂는 모 심기의 한 기법이다. 워낙 날이 가물어 논에 댈 물이 없고 논바닥은 굵은 금이 갈 정도로 매 말라 있어 사용한 것이다.
날이 가물어 속을 태우던 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이 구멍 난 듯 쏟아지는 장맛비로 물난리를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장수천 끝자락인 만수6동 현대와 금호·삼익 아파트 일대는 20여년 전만해도 큰 방죽이 길게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담방마을의 이름도 방죽과 연관이 있다. 담방 마을 앞에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방죽이 있었다. 밀물 때 방죽 뚝은 바닷물로 찰랑찰랑했다. 방죽 둑을 넘으려고 담방담방하던 모습과 만수동의 너른 들판이 자리 잡았다 해서 붙여진 ‘벌담방이’가 줄어 ‘담방이’가 됐고, 담방마을이 생겼다는 얘기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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