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과 인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10-24 01:45:39
개항과 인천
강덕우(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2007년 10월 22일 (월) 14:59:31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 강덕우(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의 기점을 개항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일치된 것으로, 한국의 근대를 취급하는 다수의 교재나 논문은 근대의 단초를 개항으로 설정하고 있다. 한국사에 있어 근대와 개항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단순히 항구의 문을 열어 외국의 배들이 들어와서 무역하는 것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근세에 들어와서 국가 사이의 조약에 의거해 민간의 무역을 정부가 허가해주고 이를 규제 보호하는 일련의 체계를 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 3국에서 개항이 그토록 중대한 역사적 사실이 된 것은 3국이 모두 쇄국상태로 문호를 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에 있어서의 개항은 중국이 먼저 그리고 일본, 그 다음이 한국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이 순서는 지리적인 위치에도 원인이 있으나 그보다도 서양과 가져왔던 접촉의 기회와 깊이의 순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3국의 개항은 각기 특정한 상황 아래서 이루어졌지만 당시 세계의 추세로 보면 결국 조만간에 필연적으로 닥쳐올 현상이었으며 늦어도 19세기 후반에는 어차피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오늘날의 역사인식이다.
▲ 개항초 인천항
개항은 보통 우호 또는 우호통상의 이름을 띤 조약의 체결로 이루어졌지만 실제 내용은 우호라기보다는 개항당하는 나라가 불공평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이른바 ‘불평등조약’이 되고 말았다. 강화도조약의 체결은 타율적이었고 불평등한 것이었으며 일본이 타국에 강요한 최초의 것이었다. 조약의 내용은 1858년 영일조약을 거의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일본은 기왕에 구미제국으로부터 강요당했던 수모적 사항들을 교묘하게 윤색해 조선에 강요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내재적 발전론에 상처를 입게 되고, 근대자본주의의 침략을 받게 되었으며 식민지 종속국으로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인천의 개항문제가 제기된 것은 1879년 4월이었는데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가 체결된 지 3년2개월, 원산 개항이 허용되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조일수호조규의 제5관에 부산 초량항을 개항하는 외에 경기·충청·전라·경상·함경 5도 중에서 2개 처를 더 개항하되 개항시기는 고종 13년(1876) 2월부터 기산해 20개월 이내로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추가 개항에 소극적이었고 일본 측의 적지 선정도 지연되었기 때문에 2개 처의 추가 개항이 늦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1890년대 인천항과 대불호텔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정부의 자주적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무력시위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된 불평등조약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당초부터 조약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성의가 없었다. 일본 역시 처음부터 인천을 개항지로 염두에 두고 조선에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측의 요구에 대해 조선은 원산항 개항을 인정하는 대신 인천의 개항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강경한 거부자세로 일관했다. 인천은 수도에 아주 가까운 해안의 요충으로 보장중지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19세기 말 외국의 무장상선의 출몰과 병인양요(1868년), 신미양요(1871년) 등의 대 사건은 인천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 한층 높여주었다. 두 양요 때 미국과 프랑스 함정들이 모두 인천 앞바다 작약도 앞에 정박해 군사 행동을 개시했으므로 인천, 부평, 영종진 일대는 자연이 군사적 요지가 되었다. 이와 같이 군사적 요지가 됨으로써 인천은 ‘도성(都城)의 인후(咽喉)’라는 인식 아래 한반도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던 것이다.
▲ 1890년대 인천항 모습
그러나 일본은 수차에 걸친 서해안 탐사에서 적격지를 발견하지 못한 터라 제물포를 제외하고는 새삼 제기할 곳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서울과의 거리를 고려할 때 반드시 그 개항을 성사시킬 필요도 있었다. 일본은 제물포 일대를 탐사한 후 이곳을 개항장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①월미도의 정박지는 영종·대부·소부 기타 여러 섬들에 둘러싸여 풍랑이 일더라도 노도가 될 걱정이 적고 조수의 속도도 3해리반 정도로서 대선이 항상 정박할 수 있음.
②제물포와 월미도 사이에는 간조시에도 한줄기 수로가 형성되어 있고, 제물포 연안은 간조시에도 2장(丈)이 넘는 수심을 이루고 있어 선각(船脚)이 물에 잠기는 정도가 12척인 배도 만조 때에 접안하여 화물을 부리거나 적재할 수 있음.
③작은 배라면 해안에 직접 접안하여 자유스럽게 내왕할 수 있고 대형선박 접안을 위한 부두를 설축할 때에도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용이하게 축항할 수 있음.
④바닷길이나 물길 모두 서울에 가까워 왕복에 편리한 곳임.
그러나 인천 개항에 대한 반대여론도 적지 않았는데, 인천을 개항하면 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살면서 미포와 어염 등을 높은 값으로 교역하면 서울의 시장이 피폐하고 민생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국왕에게 바친 ‘조선책략’의 내용이 알려지고 인천 개항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의 유림이 일제히 궐기해 척사상소를 올렸다. 개항 시기 교섭이 늦어진 것은 이러한 척사론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과격한 척사상소문을 올린 홍재학을 능지처참에 처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으며 인천 개항과 개화정책을 강행했다.
인천은 바로 이 같은 역사의 현장이 되었고, 또 문호개방의 최전방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의 끈질긴 요구로 수백년 동안 한적한 어촌으로 존속해 왔던 제물포(濟物浦)가 개항되자(1883)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들도 속속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그리하여 제물포에는 인천해관(海關;1883)과 인천감리서(監理署;1883)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전관조계(專管租界;일본 1883, 중국 1884) 및 공동조계(共同租界;1884)가 들어섰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각국의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되어 갔다. 황해를 통한 외국과의 해상교통이 폐쇄된 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지역사회가 국제적 도시사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제물포 개항은 인천지역사회에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했지만, 그보다는 일본이 인천을 한국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청·일전쟁(1894∼1895)과 노·일전쟁(1904∼1905)을 치르면서 한국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우선 제물포와 한성(漢城)을 잇는 도로와 철도를 부설하고(1899) 이들과 연계되는 항만의 확장·수축에 착수했다(1906). 그리고 이어 일본의 식량(쌀)과 공업원료(주로 목면)를 확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 수리조합 설립(부평수리조합:1923) 등을 추진했다.
인천지역사회는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 앞서 많은 토지와 인력을 수탈당하고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했다. 그리고 몰락한 농민은 저임금의 노동자와 가계보조적 노동인구(부녀자·아동들)를 증대시켜 조선인의 노동 여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인천지역사회에 통곡과 신음 소리가 가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에 연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인천지역사회는 철저히 일본화된, 일본인 중심의 도시와 농·공단지로 변해 갔다. 따라서 그만큼 일본인의 억압과 수탈은 심해져 갔고, 그에 따른 한국인의 저항도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개항 이후 인천의 지역사회는 급변, 상공업은 번창일로였다 하지만 토착 인천인과는 별개였고 토착의 자본도 변변치 못했다. 인천의 경제적 지배층으로 부상한 것은 일제에 협력하고 부화한 집단이 주가 되었으며, 대다수 인천인들은 그들에 의해 수탈당하는 양상으로 전락했다.
한국사 전반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근대적 개항은 한국의 역사 전반에 있어서는 ‘근대화’라는 발전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더라도, 인천지역사회의 희생을 담보로 해 이룩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 전반에서 개항이 갖는 의미와 항도(港都) 인천이 갖는 개항의 의미 및 그 이후의 사회변동에 대한 규명은 반드시 선결되어야만 될 과제인 것이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21) “인천에서의 조약”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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