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연표로 알아본 인천의 역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3-29 17:41:26
월미도 연표로 알아본 인천의 역사 1454년 월미도 동명(洞名)은 북성동(北城洞). 조선 초기부터 이 곳에 ‘북성(北城)’이라는 성곽이 있었음. 단종2년(1454년) 정인지 등에 의해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는 “인천 서쪽 15~19리에 둘레 250 보(步)의 성이 있어 제물량. 제물포영, 제물진으로 불렀다.”고 기록. 1695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청에서 비변사에서 논의한 중요한 사항을 날마다 기록한 책) 숙종 21년(1695년) 3월 4일지에 ‘1656년 효종 7년에 월미도에 처음으로 관사를 짓고 행궁(行宮)으로 불렀음’을 밝힘. 1708년 4월 21일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월미도(月尾島)란 지명 등장. 숙종 34년 민치대(閔致垈), 상소문에서 “인천은 해안 방어의 요충이어서 일찍이 정승 홍명하(洪命夏)가 행궁(行宮)을 월미도에 설치하자고 했다.”고 밝힘. 1785년 7월 26일 정조 9년, 유학 조익의 상소문에서 ‘월미도에 군영을 설치하여 수로를 방어하게 하면 수륙을 모두 지킬 수 있다.’고 주장 1834년. 고산자(孤山子) 김정호의 청구도(靑丘圖)에 월미도 등장. 1866년 9월 20일 프랑스 ‘로즈’제독, 중국 지부(芝罘)에서 군함 3척을 이끌고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 이들은 월미도를 ‘로즈’(Roze)섬, 작약도를 ‘보아제’ 섬이라고 부름. 1866년 10월 13일 프랑스 ‘로즈’제독, 순양함 ‘라 플라스’ 호 등 7척의 군함과 해병대를 태우고 재차 침입하여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 10월 16일, 강화도 점령. 30여 일간 강화성에 머물면서 만행을 자행. 18개의 은괴 상자와 강화서고(江華書庫)를 약탈.(병인양요) 1866년 11월 11일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조선군에 패한 프랑스 군, 강화성에 불을 지르고 퇴각, ‘로즈’는 이 날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 중인 군함과 합류하여 물러감. 1871년 5월 26일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코로라도’호 등 5척의 군함을 이끌고 인천 월미도 해상에 정박 6월 11일 강화도 점령. 7월 3일 인천을 떠나 지부(芝罘)로 퇴거.(신미양요) 1875년 9월 19일 일본 군함 운양호(雲楊號),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 20일 강화 초지진을 공격하다 퇴각하여 영종진(永宗鎭.지금의 영종도)을 점령, 아군 전사 35명, 포로 16명, 일본군 부상 2명. 군수품을 노획하고 성을 방화한 뒤 일본 장기(長崎)로 귀환.(운양호 사건) 1882년 5월 8일 청국 군함 ‘양위호’(揚威號), 조미수호조약 체결 예비 교섭차 청국 사신(使臣) 마건충, 정여창을 태우고 월미도에 정박. 1882년 5월 12일 미국 ‘슈펠트’제독,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 체결 차 군함 ‘스와타라’호 편으로 월미도 해상에 도착. 1882년 5월 22일 조선 정부 전권 대신 신헌(申櫶), 미국 해군 함대 사령관 슈펠트 제독과 조미수호조약을 인천에서 체결. 1882년 5월 27일 영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윌리스’, 조약 체결 교섭 차 제물포에 도착. 1882년 6월 6일 조선 정부, 영국 극동 함대 사령관 ‘윌리스’와 인천에서 조영수호조약(朝英修好條約)을 체결. 1882년 6월 21일 청국 주재 독일 공사 ‘브란트’, 군함 ‘슈돗슈’호로 조약 교섭 차 인천 월미도에 도착. 1882년 6월 30일 조선 정부, 청국 주재 독일 공사 ‘브란트’와 인천에서 (朝獨修好條約)을 체결. 1882년 7월 29일 일본 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 월미도에 잠입하였다가 영국 측량선으로 인천을 탈출하여 일본에 도착. 1883년 1월 1일 인천항 개항 1883년 5월 7일 조선 주재 미국 초대 공사 ‘푸트’ 인천항 도착 1883년 7월 26일 보빙사절단, 인천항을 떠나 미국으로 향발. 1885년 4월 5일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목사 인천항에 도착. 1891년 1월 21일 정부 월미도지소차입약서(月尾島地所借入約書)을 일본과 체결. 1892년 8월 10일 정부, 미국 군함의 월미도 소포(小砲) 연습을 허락. 1894년 4월 12일 상해에서 살해된 김옥균의 시신, 청함(淸艦) 위원호(威遠號) 편으로 인천 소월미도(小月尾島) 앞에서 양화진으로 옮겨짐. 1895년 10월 26일 태양력 사용. 1896년 8월 16일 러시아, 조선 정부에 월미도 남쪽 지역에 대한 조차(租借) 계약서를 제출. 1897년 12월 31일 미국 스탠더드 석유 회사, 월미도에 석유 저장소를 설치. 1899년 12월 29일 영미(英美)합자회사, 인천에 영미연초공장을 준공하고 생산 개시. 1900년 한인(韓人) 송정섭(宋廷燮), 정부로부터 월미도 개척 허가를 받아 이를 일본인 길천좌태랑(吉川佐太郞)에게 전매. 일본은 이를 기화로 1904년 월미도 민가를 강매(强買), 철거하고 포대를 축조하는 등 요새로 만듦. 1902년 9월 13일 정부, 월미도에 예포대(禮砲臺) 설치를 발표. 1902년 12월 22일 제1차 하와이 이민 1백21명,미국 상선 겔릭 호 편으로 인천항 출발(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루루 항에 도착). 1903년 3월 8일 하와이 이민 1백 24명, 인천항 출발. 1903년 6월 1일 소월미도와 팔미도에 등대를 설치. 1904년 2월 9일 일본, 이날 정오 월미도 앞바다에서 러시아 순양함 바리야크 호를 기습, 러일 전쟁 발발. ‘숭가리’호 등 러시아 선박 2척 자폭(自爆). 1904년 2월 16일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 등 서울 주재 러시아 인들, 프랑스 순양함 파스칼 호 편으로 인천에서 상해로 출항. 1904년 5월 4일 인천 데실러(大是羅)양·행 알선, 하와이 이민 40여명, 인천항 출발. 1904년 6월 17일 하와이 이민 1백20명 인천항 출발. 1904년 9월 26일 하와이 이민 1백 52명, 인천항 출발. 1905년 3월 6일 멕시코 이민 1천 33명, 인천항 출발(남자 8백 2명, 여자와 어린이 2백 31명 유카 탄 주 베라쿠르스 상륙) 1905년 3월 31일 하와이 이민 2백76명, 인천항 출발. 1905년 5월 18일 하와이 이민 2백 88명, 인천항 출발. 1905년 8월 8일 러일전쟁 당시 월미도 앞바다에서 자폭한 러시아 함정 바리야크 호 인양. 1906년 8월 1일 월미도 포대폐지. 1906년 9월 29일 월미도에 폭풍우표(暴風雨標)를 설치. 1910년 9월 5일 항로표식선(航路標識船) 광제호(光濟號), 월미도에 최초로 무선 전신을 개시. 1910년 9월 8일 전(前) 판돈부영사(判敦寧府事) 김석진, 일본인에게 월미도를 매도한 데 대해 그 부당함과 을사오적을 주살을 상소하고 자결. 1914년 9월 1일 월미도, 인천부(仁川府)로 편입. 1915년 8월15일 인천관측소, 월미도에 기상 신호를 게양하기 시작. 1916년 11월 1일 소월미도 부근 암초 제거 공사 시행. 1919년 4월 1일 인천부 부민 수천 명, 월미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침. 1920년 4월 18일 월미도 벚꽃놀이를 위한 경인선 ‘花列車’를 임시 운행. 1922년 월미도 둑길 완공. 1923년 7월 10일 인천 월미도 욕장(浴場) 개장. 1924년 5월 1일 인천 우편국, 월미도에 자동 전화 설치. 1924년 5월 4일 인천사진구락부, 월미도에서 촬영대회 개최. 1925년 6월 9일 비행사 장덕창(張德昌), 수상 비행기로 월미도 뒤편 해상에 착륙 방문. 1929년 8월 23일 근우회(槿友會) 인천지회, 월미도에서 친목 도모를 위한 원족(遠足)을 실시. 1931년 11월 인천부, 월미도에서 해태(海苔) 양식시험 사업 착수. 1935년 6월 14일 인천 부두 인부 1천 5백여 명, 임금 협상 격렬로 총파업. 1937년 1월 29일 인천백미사(仁川白眉社) , 잡지 ‘월미’ (月尾) 창간. 1937년 6월 15일 월미도 ‘용궁각’(龍宮閣) 영업 개시. 1937년 11월 21일 월미도교(月尾島橋) 준공. 1941년 10월 23일 월미도 서북방 암초에 등표(燈標)를 신설. 1945년 8월 15일 일본, 연합군에게 항복, 식민 통치 35년만에 광복. 1945년 8월 27일 인천의 일본인들, 월미도 등대를 폭파. 1945년 9월 8일 ‘하지’ 중장 휘하 미군, 인천 상륙. 1946년 4월 18일 인천 군정관(軍政官), 월미도를 해안 경찰대의 훈련장으로 전용한다고 발표. 1949년 6월 4일 월미도 조탕(潮湯) 영업 재개. 1950년 6월 25일 6․25전쟁 발발. 1950년 9월 1일 인천여자상업중학교, 교명을 월미여자중학교로 변경. 1950년 9월 10일 유엔군, 인천상육작전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월미도를 궁중 폭격.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감행(월미도의 상륙지점은 ‘그린 비치’) 1950년 9월 18일 이날까지 미국 제7보병사단 제32연대를 포함한 유엔군 2만 5천여 명과 차량 4천 5백 47대, 화물 1만 4천여 톤이 인천항에 양륙됨. 1955년 8월 6일 인천 시내 학생들, 월미도에 몰려가 중립국 휴전감시위원단의 적성국가인 폴란드, 체코 축출 데모 연일 전개. 1955년 9월 6일 월미도 주재 휴전감시위원단 ‘체코’ 대표 4명 , 이날 밤 9시 헬리콥터로 판문점으로 철수. 1955년 10월 22일 월미도에서 펼친 적성휴전감시위원단 축출 시위, 11주 째로 돌입. 1955년 10월26일 하와이 교포 원로단 46명, 배편으로 인천 도착. 1957년5월 6일 소월미도에 등부표(燈浮標) 설치. 1958년 7월 7일 소월미도 부근 해상에서 미국 수송선에 받쳐 상처를 입은 고래가 잡힘. 1963년 12월 27일 소월미도에 등대 설치. 1964년 10월 15일 인천항사무소, 월미도 물양장(物揚場) 매립 완료. 1966년 4월 7일 미8군, 월미도 징발 토지 2만 5천여평을 국방부에 이관. 1970년 9월 28일 대성목재(주), 월미도에 공장을 준공. 1973년 1월 15일 국립수산진흥원, 월미도 매립지에 청사(廳舍) 신축. 1973년 3월 12일 월미도, 중구(中區)에 편입됨. 1974년 5월 10일 인천항 제2도크 완공(1966년 착공, 총 공사비 1백 93억 6천여 만원) 1983년 2월 12일 용주해운(주), 월미도에서 인천-영종도간 ‘카페리’취항 1988년 9월 27일 소련 관광 여객선 미하일 솔로호프호 체류 소련 민속 예술단, 월미도 인천 선원학교 강당에서 공연(제 24회 서울 올림픽 행사 일환). 1989년 1월 1일 영종, 용유, 계양면, 인천직할시에 편입. 1989년 6월8일 해군 9513부대, 월미산(月尾山)을 시민에게 공개, 1989년 7월 2일 월미도 ‘문화의 거리’ 개장(만남 교환의 장, 문화 예술의 장, 연출의 장 등 3개 구간, 길이 7백 70m, 폭 20m) 1990년 5월 24일 국내 최초의 식당 관광 유람선 ‘코스모스’ 호, 문화의 거리에서 취항. 1992년 2월 22일 인천일보사, 해군2함대사령부, 인천광역시 새얼문화재단 등과 함께 월미산가꾸기 범 시만 운동 전개. 1992년 9월 15일 미 군함 USS.CURTS 호, 인천상륙작전 행사 참가 차 입항. 1992년 11월 12일 인천국제공항 기공식 거행(영종도) 1993년 4월 8일 원과해운주식회사 용주 5호를 인천(월미도)-영종도간에 취항(9백78톤). 1996년 4월 17일 인천시, 월미도 일주 경전철(輕電鐵)건설 계획을 발표, 1997년 9월 18일 해군 2함대사령부, 9․15 인천사육작전 48주년을 맞아 격전지 월미산을 일반에 공개. 1998년 11월 14일 제9회 월미축제 개최(21일까지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서). 1999년 2월 9일 에브게니 주한 러시아 대사 일행,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인천항에서 자폭한 바리야크 호와 격침된 코리에츠호의 추모행사 거행 1999년 8월 3일 한국전쟁기념사업회, 인천상륙작전 직전 월미도에서 첩보 활동을 벌여 인천 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고 임병래 중위를 ‘8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 1999년 10월 9일 제 10회 월미 축제 개최, 문화의 거리에 길이 25m, 너비 65m 의 친수 계단 준공. 1999년 10월 15일 인천광역시 중구청,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 준공(노래:박경원, 글씨:김재은, 글:김윤식) 1999년 12월 10일 해군 제2함대사령부, 평택 기지 준공식 거행. (53년만에 인천에서 평택으로 기지 이전) 2000년 2월 28일 인천광역시, 월미산을 자연 녹지에서 보존 녹지로 변경. 2001년 10월 13일 인천광역시, 50여 년만에 월미산을 역사와 생태를 주제로 한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에게 개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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