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물의 선구지, 인천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5 08:06:11
근대문물의 선구지, 인천
▲ 강덕우(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개항과 인천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미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조선에도 통상(通商)을 요구해 오기 시작하자, 이들 군사시설은 보장처의 수호보다는 서양세력의 진입을 저지·차단하는 최전방 방어시설로 기능하게 되었다.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서양세력들이 서해안지역, 그 중에서도 수도 한양(漢陽)에 이르는 입구, 이른바 인후지지(咽喉之地)인 인천 해안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서양세력의 끈질긴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의 해금(海禁)책은 끝내 인천 해안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 1866)와 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가 그것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경우와는 달리, 프랑스와 미국은 이 충돌에서 조선의 집요하고도 처절한 저항을 받았다. 이에, 그들은 모두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약탈로 만족하며 퇴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전쟁의 주무대가 된 강화도는 몽골의 침공 때보다 크나 큰 상처를 입었지만, 500여 년 만에 다시 한 번 조국수호의 성지(聖地)로 부각되었다.
▲ 1890년대 인천항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물리친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그런데 그것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조선 진출을 새롭게 기도해 오던 일본에게 뜻밖의 장애가 되었다. 일본은 조선 진출에 기선을 제압하고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하야하는(1873) 정국의 변화를 기회로, 이른바 운요오호(雲揚號)사건을 감행했다(1875). 그리고 이 사건의 수습을 빌미로 새로운 수호통상 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정부는 이를 거부하는 회담을 강화에서 진행하는 한편, 인천도호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1875) 포대를 증설하는 등 무력 침공에 대비했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과 국내 정세의 변화로 끝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 강화도조약)에 응하고 말았다(1876).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일본과의 교린(交隣)정책이 무너지고, 해금책이 또한 파기되는 단서가 된 것이다.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자 중국(청나라)은 조선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견제하기 위해 서둘러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열강들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주선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요구, 체결했다(1882). 중국과 일본의 문호개방으로 이른바 은둔국(隱遁國)이라 불리웠던 조선도 그 문호를 세계에 개방하게 된 것이다.
인천은 바로 이 같은 역사의 현장이 되었고, 또 문호개방의 최전방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의 끈질긴 요구로 수백 년 동안 한적한 어촌으로 존속해 왔던 제물포(濟物浦)가 개항되자(1883)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들도 속속 이곳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고, 또 조선정부도 이들의 조선 진출을 가능한 한 개항장에 국한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제물포에는 인천해관(海關 ; 1883)과 인천감리서(監理署 ; 1883)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전관조계(專管租界 ; 일본 1883, 중국 1884) 및 공동조계(共同租界 ; 1884)가 들어섰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해 각국의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되어 갔다. 황해를 통한 외국과의 해상교통이 폐쇄된 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지역사회가 국제적 도시사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천의 개항'을 이 제물포 개항으로부터 기산(起算)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라 보겠다.
# 인천지역사회의 시련과 변화
▲ 1900년대 인천 중앙동(본정)모습
제물포 개항은 인천지역사회에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했지만, 그보다는 일본이 인천을 한국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청일전쟁(1894~1895)과 노일전쟁(1904~1905)을 치르면서 한국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우선 제물포와 한성(漢城)을 잇는 도로와 철도를 부설하고(1899) 이들과 연계되는 항만의 확장·수축에 착수했다(1906). 그리고 이어 일본의 식량(쌀)과 공업원료(주로 목면)를 확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 수리조합 설립(부평수리조합 : 1923) 등을 추진했다.
인천지역사회는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 앞서 많은 토지와 인력을 수탈당하고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했다. 그리고 몰락한 농민은 저임금의 노동자와 가계보조적 노동인구(부녀자·아동들)를 증대시켜 조선인의 노동여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인천지역사회에 통곡과 신음 소리가 가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이에 더해 행정구역도 개편했다(1914). 지방 군·면을 폐·치·분·합(廢置分合)함으로써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활권역과 공동체 질서를 파괴·약화시키는 한편,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해 일본인에게만 유리한 일본인 중심의 도시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인천지역에서는 자연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인천사회가 그 초점이 되었다. 앞서 경기도 인천군에서 인천부로(1910) 바뀌었던 원인천사회는 이 개편에서 도시지역과 농·어촌지역으로 양분되었다. 인천부는 일본인 시가지를 중심으로 부역(府域)이 크게 축소되고, 나머지 농·어촌지역은 부평을 중심으로 신설된 부천군(富川郡)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각국공동조계와 청국전관조계도 모두 철폐되고, 부의 하부 행정조직도 모두 일본식[정(町), 정목(丁目)]으로 바뀌었다. 인천부는 완전히 일본인 도시로 변했고, 한국인은 각종 생활편의시설에서 완전히 소외·격리되었다.
▲ 1910년대의 인천 시가지 전경
이 같은 일본인 중심의 행정구역 개편은 일본의 식민지경영이 강화되고 대륙침략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인천사회에 일본인 이주자가 크게 증가하자 부역의 확장이 요구되어 1936년에는 부천군에 편입시켰던 인천의 일부, 문학면의 학익·옥련·관교리와 다주면의 도화·용정(용현)·사충(주안)·장의(숭의)·간석리를 다시 인천부에 편입시키고, 이어 중일전쟁(1937)을 계기로 경인시가지계획이 마련되자(1940) 부천군의 4개 면(서곶·문학·남동·부내면)을 인천부에 더 편입시켜 갔던 것이다. 경인시가지계획이 경성부(京城府)의 서남단에서 인천부의 동북단에 이르는 350㎢ 지역에 7개 공단(중공업·군수공업기지)과 11개의 거주지를 건설하고 김포·부평평야를 절대농지로 해 식량공급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인천부는 1910년의 부역, 곧 옛 인천도호부의 부역에다가 부평군의 일부까지 차지하는 넓은 부역을 갖게 되었다. 개항 직후 제물포 중심의 작은 항구도시·상업도시였던 인천사회가 거대한 항만도시이자 커다란 중공업단지와 농업단지를 배후에 두는 산업도시로 그 모습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인천지역사회는 철저히 일본화된, 일본인 중심의 도시와 농·공단지로 변해 갔다. 따라서 그만큼 일본인의 억압과 수탈은 심해 갔고, 그에 따른 한국인의 저항도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료제공 =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글쓴이 프로필〉 - 강덕우 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하대 사범대 졸
▶인하대 대학원(사학과) 박사
▶인하대 강사
▶한국방송통신대 강사
'인천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지명의 탄생 (0) | 2023.04.25 |
---|---|
동북아 중심지, 인천 (0) | 2023.04.25 |
개국(開國)과 왕도(王都)의 고장, 인천 (0) | 2023.04.25 |
월미도 연표로 알아본 인천의 역사 (0) | 2023.04.23 |
개항과 인천 (0) | 2023.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