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중심지, 인천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5 08:07:15
동북아 중심지, 인천
# 외래문물의 수용과 대응
▲ 인천객주회
인천항이 비록 일본의 강압으로 개항되기는 했지만, 우리사회 내부에서도 18세기부터 사회개혁을 모색추구하는 기운이 있어 왔고, 또 그 과정에서 외래의 이질적 문물과도 접촉해 왔기 때문에 인천사회는 외래문물이나 시세의 변화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고 변용하는 입장이었다 할 것이다. 1897년에 설립된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는 그 하나의 좋은 사례였다. 제물포 개항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객주들의 조합인 인천객주회(仁川客主會 ; 1885)를 모체로 사회유지들이 함께해 설립한 이 협회는 일본 기업과 상인에 대응해 우리 민족상인의 상권을 옹호·신장하면서 새로운 상업질서의 정립을 꾀하고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인천지역에서 외세에 대한 저항이 무력적 양태보다는 노동쟁의나 계몽활동 같은 사회운동에서 더욱 두드러졌던 것도 이 같은 분위기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 신상협회장정
그러나 일본의 무단적 식민지정책이 강행되면서 한국인의 반일·항일감정은 날로 높아만 갔고, 그것은 점차 조직적 집단적 저항·투쟁을 도모하게 했다. 3·1독립만세운동(1919)은 이러한 운동 양태를 표출시키는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일본이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를 파기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외에서나마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뚜렷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국외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光復軍)이 외교적으로, 또는 무력적으로 광복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동안 국내에서는 이들과 연계해 일본의 지배를 약화시키고 우리 민족의 실력을 배양하려는 다양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 민족운동
1919년 3월 6일 인천에서 시작해 부평·김포·강화 등으로 확산되며 한 달 넘게 독립만세를 불렀던 인천지역에서도 그 기운을 이어 수많은 조직이 결성되고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개항 후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온 노동운동과 기독교회를 중심으로 한 청소년운동은 그 중심에 있었다. 1920년대 초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금주(禁酒)·단연(斷煙)운동이 인천조선물산소비조합(仁川朝鮮物産消費組合 ; 1923)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또 전국적 민족운동 조직인 신간회(新幹會)와 근우회(槿友會)의 인천지회가 조직되기도 했으나(1927~1929), 광복에 이르기까지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으로 저항과 투쟁을 지속해 간 것은 노동운동과 청소년운동들이었다. 특히 노동운동은 인천소성노동회(仁川邵城勞動會)를 확대·결성한 인천노동총동맹(仁川勞動總同盟; 1924)의 지원 아래 각 직업별 노동조합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해 갔는데,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지하로 스며들면서 적색 노동조합의 성격과 무력투쟁의 성향도 지니게 되었다.
한편, 청소년운동은 1920년대 초에 인천이우구락부[仁川以友俱樂部 · 부장 하상훈(河相勳)]와 인천한용단[仁川漢勇團 · 단장 곽상훈(郭尙勳)]이 조직되면서 20여 개 단체가 결성되어 각기 목적한 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들의 활동은 시국강연회·웅변대회 개최, 야학(夜學) 운영, 노동쟁의 후원, 연예·체육활동 등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었는데, 뒷날 이들의 연합체인 인천청년동맹(1925)과 인천여자청년동맹(1926)이 결성되기는 했으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억압으로 인해 노동운동에서처럼 응집된 조직적 활동을 지속적으로 행하지는 못했다. 당시 청소년운동이 주로 서울을 통학하는 학생들이나 내리교회(內里敎會) 학생들이 중심이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항일운동들은 일본의 식민지배 말기에 전개된 다양한 한민족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을, 우리 인천지역 주민을 광복에 이르도록 보존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 광복과 변화
▲ 광복과 시민들
광복 후 한동안 우리나라는 나라이름마저 각양각이하게 부를 정도로 다양한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난립해 혼란을 거듭했다. 미군이 가장 일찍 진주했다는(9월 8일) 인천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군정(美軍政)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를 지향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인천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미군정 때 잠시 제물포시(1945년 10월 10일~27일)로 바뀌었던 인천부도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경기도 인천시로 정립되었고(1949년 8월 15일), 시의회도 구성되었으며 시장 또한 간선(間選)으로 선출되었다(1952). 그리고 이들에 의해 일본의 잔재와 미군정의 과도기적 조치들이 하나 하나 청산되고 일신되어 갔고, 경제 안정과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시책도 속속 마련되었다.
▲ 인천상륙작전 당시 불바다가된 시가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인천지역에 다시 한 번 시련을 주었다. 인명의 피해나 주민간의 갈등에서도 그러했지만, 일본이 남겨 놓고 간 공장과 시설로나마 가까스로 일구어 가던 경제가 거의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더구나 인천상륙작전의 생생한 현장이 되었고, 휴전(1953년 7월 23일) 후 20여만 명의 이북 피난민까지 수용했던 인천지역사회는 각고의 노력을 다시 해야 했다. 인천항을 수·출입 창구로 하고 그 배후 공단(工團)을 주요 가공 공단으로 하면서 인천항을 한국의 관문으로 삼았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에 휴전 이듬해 말에는 인천에서만도 267개 공장을 갖게 되는 복구를 이루었으나, 자재난·전력난·자금난에다가 기술력의 부족까지 겹쳐 더 이상의 성장에는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 도약과 성장
▲ 경인고속도로 기공식
인천의 본격적인 성장은 1960~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거듭 추진되면서 이루어졌다. 임해공단들과 부평공단(경인공단)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수출 위주로 전개되면서 이를 위한 각종 기간시설의 확충과 편의시설의 확대가 우선적으로 마련되었다. 인천 내항의 도크 확장(1966~1975), 그에 따른 연안부두의 축조(1973), 경인고속도로의 건설(1967~1968), 경인전철의 부설(1971~1974) 등이 바로 그러했다.
인천지역의 이러한 성장은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각종 산업을 발달하게 하고 아울러 인구 증가를 가속화시켰다. 인천시가 구제(區制)를 실시하던 당시(1968), 서울·부산·대구에 이어 4대 도시로 성장하면서, 지속된 경제발전은 인천시의 산업과 사회를 더욱 성장시켜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해 인천직할시로 승격하게 했다(1981).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화·정보화의 추세와 중국의 개방화 정책으로 인천지역의 지정학적 비중이 더욱 높아지자 1961년에 폐지된 지방자치제의 부활(1991)과 연계, 인천광역시로 확장·승격되기에(1995년 3월 1일) 이르렀다.
# 세계를 향한 동북아의 국제도시
지금 인천은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로 세계를 향해 웅비하고 있다. 서울의 관문으로서 항만·상업도시를 이루어 온 원인천에다가 농·공업도시 부평을 아우르고, 이어 농·수산과 문화·관광의 보고(寶庫) 강화와 옹진 등을 합하면서 동북아시아의 허브(Hub) 공항을 더해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거대한 관문이자 국제적 물류중심지, 산업·정보단지, 관광·휴양단지로 비약적인 성장을 기하고 있다. 지난날의 인천과는 완연히 다른 새로운 차원의 국제도시로 변화하고 있다 할 것이다. 여기에 송도경제자유구역의 기반조성과 도시엑스포(2009), 아시안게임(2014) 개최라는 도전적 과제들도 있다. 이 모두가 ‘세계를 향한 국제도시, 인천’의 미래를 향한 방향제시라 할 것이다.
오늘날 인천이 이같이 성장·변모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가 근래에 이룩한 경제적 정치적 성장과 뒤이어 이루어진 환(環)황해권의 개방화가 인천지역의 지정학적 특성과 맞물린 때문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난날 오랜 세월에 걸쳐 인천지역사회에 쌓여 온 역사적 토양에 기반한 바도 간과할 수 없다.
〈자료제공 =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 다음은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4) '인천지명의 탄생'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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