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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인천지명의 탄생

by 형과니 2023. 4. 25.

인천지명의 탄생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5 08:08:15

 

인천지명의 탄생

김상열(인천송암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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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의 허브도시인 인천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명품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송도국제도시 개발, 2009년 도시엑스포 개최, 2014년 아시안게임 유치 등을 통해 세계 10대 도시로 성장할 브렌드인 인천이라는 지명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탄생하게 되는지 인천 지명의 변천과정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인천(仁川)’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13(1413)의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역사기록에는 미추홀(彌鄒忽)’, ‘소성(邵城)’, ‘경원(慶源)’, ‘인주(仁州)’ 등 여러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화도진도에 나타난 인천도호부관아

 

# 인천 최초의 이름, 미추홀

 

백제의 건국설화 온조설에 따르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형제가 고구려로부터 남하하여 온조는 한강유역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고 비류는 미추홀로 와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고, 비류설에는 비류가 어머니와 온조 등 일행을 거느리고 미추홀로 와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그 후 장수왕 63(475) 한강유역을 확보한 고구려는 이곳에 매소홀현을 두게 되었다.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들이다.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우리 고장의 이름은 미추홀(彌鄒忽)이다. 미추홀은 백제 초기 인천의 명칭이지만 인천의 어느 지역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지리지에 미추홀이 인천으로 표기된 이래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미추홀국, 미추국, 비류국 등으로 일컬어지며, 미추홀의 위치가 인천지역이었음이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여졌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 미추홀이 문학산성으로 표기된 이래 이후의 동사강목, 여지도서등의 지리책에서도 문학산을 미추홀로 비정하고 있다.

 

미추홀은 순우리말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미추홀과 매소홀은 같은 뜻을 가진 토박이말의 동음이자이므로 같은 뜻을 가진 명칭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 ‘고을(·)’로 해석하여 수성(水城)’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거칠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거친 들로 해석하기도 한다. 인천은 소래산을 비롯한 여러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큰 평지가 없고, ‘산과 골짜기마다 갯물로 되어 땅이 거칠고 물이 짜다(土濕水鹹)’ 라는 기록으로 보아 물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최근에는 미추홀을 한자의 훈을 따서 붙인 이두식 표현으로 보아 밑골또는 바탕골로 해석하여 비류백제의 수도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비류에 의해 미추홀로 역사의 문을 연 우리 고장은 고구려의 남하정책 이후 매소홀현으로 그 명칭이 바뀌어 신라가 668년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계속 매소홀로 불리어 오다가 경덕왕 16(757)소성현으로 개칭되었다.

 

경덕왕은 새로운 귀족세력에 의해 기울어 가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일련의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취했다. 그것은 경덕왕 16(757)부터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으로 추진되었다. 한화정책이란 신라의 제도와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것으로, 그 하나가 토박이말로 되어 있던 지명을 모두 한자어로 바꾸고 지방제도를 95소경 117293현으로 정비하는 것이었다. 이때 인천에 처음 붙여진 한자이름은 소성(邵城)이었고, 규모는 현()에 해당하였기에 소성현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소성의 소()높다는 뜻과 거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아마도 문학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의 인천은 독립된 군현(郡縣)이 아니라 율진군(栗津郡)에 딸린 고을이었다. 즉 통일신라시대에는 인천이 크게 융성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 고려시대의 인천지명

 

소성현이라는 지명은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계속 불리게 된다. 고려시대는 여러 귀족들이 등장하여 서로 정권을 장악하는 귀족정치시대로, 그 중에서도 최대 문벌귀족을 이루었던 인주 이 씨의 본거지가 인천이었기 때문에 인천은 몇 차례 승격과 지명의 개칭이 이루어지게 된다.

 

 

원인재

 

소성현으로 불리던 인천이 숙종대(1095~1105) 경원군으로 승격 개칭되었는데 그것은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태후 이 씨(仁睿太后李氏)의 내향(친정)이었기 때문이다. 인예태후는 인주 이 씨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의 증손자인 이자연(李資淵)의 맏딸로서 문종의 왕비가 되었는데, 문종과의 사이에서 10왕자와 2궁주를 낳았다. 그 중에는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義天)도 있었고, 후에 순종·선종·숙종 등 3명은 왕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인주 이 씨는 외척으로서 가문의 영광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여 번성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왕이 되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고, 그 왕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므로 왕의 어머니의 고향은 경사의 근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숙종은 소성현으로 불리던 인천의 이름을 경사 ()’, 근원 ()’을 써서 경원군으로 승격 개칭하였던 것이다.

 

인종대(1122~1146)에 인천은 군에서 주()로 승격되면서 명칭을 인주로 변경하였는데, 그것은 인종의 어머니 문경태후(文敬太后) 이 씨의 내향이었기 때문이다. 숙종이 민씨와 결혼하여 예종을 낳았는데,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李資謙)은 자신의 둘째딸을 예종과 결혼시켰다. 이자겸의 둘째딸은 인종을 낳았고, 인종이 왕이 되자 문경태후로 추존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자겸은 외손자인 인종과 자신의 두 딸을 중첩적으로 결혼시킴으로써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인종은 자신의 어머니 문경태후와 왕비 2명의 내향이 인천이므로 인주로 개칭·가호하였다. 그러나 이자겸은 인종을 폐하고 왕이 되고자 1126년에 반란(이자겸의 난)을 일으켰으나 그 난이 실패함으로써 인주 이 씨는 몰락하고 말았다.

 

인천은 고려 말기인 공양왕 2(1390)에 이르러 다시 경원부로 환원 승격되었다. 그 이유는 인천이 칠대어향(七代御鄕)이기 때문이다. 공양왕은 신종의 7세손이었는데 왕위에 오르자 조상을 추숭하는 의미로 4(부조, 조부, 증조부, 고조부)에게 작위를 가하는 동시에 7대조인 신종의 선대 7명의 왕이 인천을 외향으로 하거나 왕비가 내향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상을 현양하는 의미에서 고을의 규모를 부()로 승격시키고 주호장에게 홍정을 하사하였다. 즉 인천은 문종·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의 7명의 왕 중에서 5명의 왕(순종·선종·헌종·숙종·인종)의 어머니의 고향이고, 5명의 왕(문종·순종·선종·예종·인종)의 왕비의 고향이기 때문에 7대어향이라 부르고, 다시 경사스러운 고장이라는 뜻의 경원(慶源)으로 환원하였던 것이다.

 

# 인천의 탄생

 

 

문학초등학교에 있는 인천 도호부 건물

 

조선왕조가 성립되자 새 왕조와 인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태조 원년(1392)에 인주로 환원·강등되었다. 그러나 태종 13(1413)에 이르러 현재 우리 고장의 이름인 인천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의 지방제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그 일부 명칭을 고치기도 하였으나, 1413년에 지방제도를 일대 개편하여 8도제(八道制)를 갖추고 전국의 333개 고을을 유수부 부윤 대도호부 20·도호부 74·73·154 등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군이나 현에 ()’자가 들어 있는 고을은 자 대신 ()’이나 ()’으로 고치게 하였는데 영주(寧州)’영산(寧山)’으로, ‘금주(衿州)’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다. ()단위였던 인천도 이때 인주에서 자가 으로 바뀌어 조선 초에는 인천군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지명에 자나 자가 많이 들어간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자료제공 = 인천시역사자료관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5) '인천의 고인돌'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 편집자 주)

 

 

글쓴이 프로필

 ▶인하대 사학과 졸. 문학석사(역사전공)

 ▶인하대 사학과 강사

 ▶인천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운영위원